세계일보

검색

[장석주의인문정원] ‘노래의 씨앗’을 심는 마음

관련이슈 장석주의 인문정원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2-01-07 22:47:07 수정 : 2022-01-07 22:47:0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이육사 詩 ‘광야’ 읽으며 가슴 뛰어
고난 속 ‘새 날’ 꿈꾸는 용기 갖길

1월은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 달, 신생의 기쁨을 누리기에 맞춤한 달이다. 새날이 밝으면 어제의 삶은 이미 죽은 삶이다. 물론 새날이 온다고 고난의 은밀한 흐름이 그치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혹독한 날은 문 앞에 와 있고, 불안과 공포로 우리 이마는 차갑다. 기적을 꿈꾸지 말라. 지금은 나쁜 날씨에 맞서 기초와 뿌리를 다지고, 팽팽한 활의 시위를 당기는 강한 심장이 필요하다. 그 심장으로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라! 서로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용기를 내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다.

1월엔 나태한 정신을 번쩍 깨우는 시, 빛깔과 울림이 강렬한 시를 읽어야 한다. 이 계절에 읽기에 가장 좋은 시는 이육사의 ‘광야’다. 일제강점기 때 열일곱 번이나 감옥을 드나든 독립운동가이던 시인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은 1942년 여름이다. 시인은 그 여름 서울에서 중국 베이징의 감옥으로 압송되는 기차 안에서 칼날 같은 추위로 얼어붙은 광야에 흰눈 내리고 매화 향기가 퍼지는 시적 환상을 떠올리며 이 시를 구상한다.

장석주 시인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 ‘광야’)

천지개벽이 일어난 태초의 날을 물들인 것은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흑암이다. 하늘과 땅은 온통 검정색이 뒤덮었으리라. 그 흑암의 날이 지나고, 지금 광야를 물들인 색깔은 흰색이다. 시인이 호명한 흰눈, 매화, 백마가 다 희다. 흰색은 색깔보다는 빛에 더 가깝다. 시인은 이 삭막한 광야에 흰빛으로 충만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꿈꾸며 장차 목 놓아 부를 노래의 씨앗을 심는다. 검정색은 밤, 비밀, 혼돈, 짓누름의 색이다. 반면에 광음의 세월이 지난 뒤 지금의 흰색은 인고 끝에 얻은 낮, 가능성, 해방, 자유의 색이다.

이 시가 지시하는 ‘광야’는 너른 땅이 아니라 거칠게 버려둔 황무지다. 곡식이 자라는 비옥한 땅과 대비되는 개척되지 않은 땅이다. 바위와 메마른 흙, 엉겅퀴와 잡초들만 무성한 채로 버려진 함부로 손대기에 어려운 땅이다. 산술적 평균에도 못 미치는 쩨쩨한 삶을 꿰뚫어버리는 광음의 세월 동안 숱한 계절들이 하늘, 광야, 산맥, 바다를 스쳐간다.

‘광야’에서 태고와 현재, 바다와 산맥, 매화 향기와 겨울의 대비는 매우 선명하다. 초인은 이 광야에 백마를 타고 온다고 했다. 흰말은 사물들이 또렷이 분별되지 않은 채 뒤섞인 도착(倒錯)과 혼돈의 시간인 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여기에로 온다. 밤을 뚫고 오는 흰말이 새벽이라면 초인은 고난의 극한을 견디며 제 일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백마는 닭이 홰를 치며 우는 동이 트는 새벽에야 도착하고, 그때 흰색의 판타지가 완성될 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흰말은 저기 먼 데서 지금도 달려오는 중이니 아직은 목 놓아 노래 부르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우리의 인고와 기다림이 결실을 맺기에는 이른 때라는 뜻이다.

지금은 흰눈 내리고 매화가 피는 계절이다. 천지 사방이 결빙하는 겨울, 아직 얼음은 차고 단단하다. 이 혹한의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대개는 손을 놓고 있거나 허둥대며 움츠리겠지만 시인은 홀로 나서 광야에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심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백마를 타고 올 손님을 맞아 조촐한 잔치를 벌이려는 준비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광야에 목 놓아 부르는 노래와 꽃의 향기가 퍼지는 황홀경을 꿈꾸고,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노래한 시인! 장엄한 시공간이 펼쳐지는 ‘광야’를 읽으며 감히 누구도 손대지 못할 척박한 땅에 노래의 씨앗을 심는 시인의 결의를 가만히 헤아릴 때 내 가슴은 더워진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그 암담한 시절에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심는 마음을 노래한 시인은 1944년 1월 16일 중국 베이징의 차디찬 감옥에서 눈을 감는다.


장석주 시인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민주 '하트 포즈는 시크하게'
  • 김민주 '하트 포즈는 시크하게'
  • 아이린 '너무 사랑스러워'
  • 아이유 '사랑스러운 눈빛'
  • 한소희 '완벽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