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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대문자 이름표기 거부하고 소문자로 스스로를 낮춘 여성운동가

입력 : 2021-12-27 21:00:00 수정 : 2021-12-27 20: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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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벨 훅스의 소문자 이름 표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저자이자 교육자
할머니의 저항정신과 용기 이어받고자
그녀의 이름을 차용해 소문자로 표기

MS의 연구원 데이나 보이드도 동참
문장 어디에서나 대문자인 ‘I’에 의문
자기중심적 영어권 표기에 반기 들어
필명 벨 훅스로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왓킨스의 젊은 시절 모습.

우리나라에도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흑인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학자였던 벨 훅스가 지난주 세상을 떠났다. 백인 여성들이 중심이 된 페미니즘 운동에 반대하고, 남성 혐오적인 페미니즘에 반대해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으로 정의한 벨 훅스는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힌 운동가이자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한 교육자였고, 수십 권의 책을 낸 저자였다. 그런데 그가 쓴 책을 보면 저자 이름이 특이하게도 모두 소문자로 ‘bell hooks’라고 인쇄되어 있다. 왜일까.

벨 훅스의 어린 시절 이름은 글로리아 진 왓킨스(Gloria Jean Watkins)로 일반적인 영어 이름과 마찬가지로 각 단어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외증조모인 벨 블레어 훅스(Bell Blair Hooks)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필명을 벨 훅스라고 바꿨지만, 증조모와 구분하기 위해서 소문자로만 사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1978년에 나온 그의 첫 책 ‘And There We Wept(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울었다)’에서부터 대문자 없이 bell hooks로만 등장한다.

증조모 이름인 ‘벨 훅스’에 끌리게 된 건 그가 어렸을 때 겪은 일 때문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 풍선껌을 사러 구멍가게에 갔다가 무슨 일 때문인지 어른에게 말대꾸를 했단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며 “(말대꾸를 하는 걸 보니) 벨 훅스 집 애가 맞네”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의 태도를 물려받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저항정신과 의지, 용기를 갖고 싶어서 그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독자들이 저자인 자신보다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과 주장에 초점을 맞추기 원하는 의미에서 할머니와 달리 소문자로만 이루어진 bell hooks를 선택했다.

여기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소문자는 겸손한 거고, 대문자는 자신을 내세우는 건가. 사람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이름에 대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건 벨 훅스가 유명하지만 훅스 외에도 영어권에서는 몇몇 사람이 대문자 없는 이름을 사용하곤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연구원으로 테크놀로지와 소셜미디어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자인 데이나 보이드(danah boyd)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danah.org)에서 이름에 대문자를 넣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어에서 다른 인칭대명사와 달리 1인칭 주격 대명사(I, 아이)만 대명사로 쓰는 게 항상 거슬렸다. 어릴 때부터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영어권의 문화에서는 1인칭 주격만 특별하게 취급한다. 우리(we)나 그들(they)은 왜 대문자로 쓰지 않는가? 아, 그리고 나는 벨 훅스의 작품을 좋아한다.”

자신의 필명을 대문자 없이 ‘bell hooks’라고 적은 글로리아 왓킨스의 저서 가운데 하나.

데이나 보이드는 왜 영어에서 1인칭 주격만 문장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대명사로 사용되는지 연구를 했는데, 그 이유가 놀라웠다고 한다. 옛날 영어에서는 1인칭 주격은 항상 문장의 첫 단어로만 등장했고, 문장의 첫 단어는 반드시 대문자로 표시하는 규칙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대문자였다. 그런데 문장의 유행이 바뀌면서 때로는 문장 중간에도 1인칭 주격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까봐 문장 중간에도 대문자로 아이를 썼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문장 처음에 대문자로 들어간 아이(I)에 익숙하다 보니 위치와 상관없이 대문자를 선호했다.

보이드는 또한 알파벳을 사용하는 언어 중에서도 영어만 유일하게 1인칭 주격을 대문자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프랑스어(je), 독일어(ich), 스페인어(yo) 모두 1인칭 주격이라도 문장 중간에 들어가면 소문자로 표시한다. 원래 옛날 영어의 1인칭 주격은 독일어 ich에 가까운 ic였는데, 그렇게 쓸 때만 해도 문장 중간에서는 대문자 없이 ic로 표기했다가 c가 떨어져 나가고 i만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대문자로 변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 자체가 글자가 “나를 보라”고 외치는 셈이다. 대소문자가 없는 한국어에서는 폰에서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소리를 지르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느낌표(!)를 많이 사용하고 이는 영어에서도 다르지 않지만, 영미권에서는 올캡스(all caps) 즉, 문장 내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만 쓰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거나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벨 훅스가 자신의 이름에서 대문자를 없앤 것은 그와 반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그의 이름을 보는 사람들은 직관적이고 시각적으로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개인이 맞춤법 규칙을 어겨도 될까. 여기에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있다. 프랑스어도 그렇다고 들었지만, 한국어는 국가가 정하는 하나의 바른 용법, 즉 맞춤법이 존재하는 일종의 ‘중앙집권적’인 관리를 한다. 하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아서 주요 매체나 출판사, 단체가 룰을 만들어 갖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문법이나 맞춤법, 표기법은 동일하지만 매체에 따라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대부분의 매체에서 협력은 cooperation, 재선은 re-elect라고 쓰지만 ‘뉴요커’ 매거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분음부호표를 사용한 cooperation, reelect 같은 표기법을 사용한다. 따라서 매체들이 벨 훅스의 뜻을 존중해서 소문자로만 쓰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문장 중간에 bell hooks라고 들어갈 수는 있지만 반드시 대문자가 되어야 하는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문장 제일 처음에 벨 훅스의 이름이 들어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령 뉴욕타임스의 경우는 문장 처음에 아이폰(iPhone)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애플의 바람과 달리 IPhone으로 쓴다. 애플 제품의 공식명칭이 iPhone이라고 해도 문장 처음에 등장할 때는 예외 없이 대문자로 들어가야 한다는 태도다.

그럼 뉴욕타임스는 벨 훅스라는 이름도 문장 맨 앞에서는 대문자를 쓰게 했을까. 소설 ‘파친코(Pachinko)’로 잘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Min Jin Lee)씨가 2019년 이 신문에 기고한 ‘벨 훅스를 찬양하며(In Praise of bell hooks)’라는 글의 중간에는 ‘훅스의 글(hook’s writing)’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이 있는데, 여기에서 뉴욕타임스는 소문자 h로 문장을 시작하는 예외를 허용하고 있다.

이 기고문은 그가 예일대학교 2학년 때 벨 훅스의 미국 흑인문학 강의를 들었던 때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민진 작가는 그 강의를 가르친 교수의 이름을 벨 훅스의 본명인 ‘글로리아 왓킨스’로 소개하고 왓킨스라는 이름으로 글을 전개하다가 그가 필명을 벨 훅스로 바꾸게 된 사연을 소개한 이후로는 벨 훅스로 바꿔서 이야기한다. 신문도, 글쓴이도 벨 훅스의 선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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