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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살려낸 벤예후다는 ‘이스라엘의 세종대왕’

입력 : 2021-11-11 19:37:41 수정 : 2021-11-11 19: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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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언어를 살려낸 사람들

유대인들 나라 잃고 뿔뿔이 흩어져
본래 쓰던 히브리어 서서히 사라져
벤예후다, 경전 속에 남은 문자 연구
어휘사전 만들고 새로운 단어 보완
일상의 대화 가능한 언어로 되살려

영어는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빛내
작품에 쓰인 주옥같은 표현·단어들
오늘날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쓰여
작업 중인 엘리에제르 벤예후다. 그의 집념이 이스라엘어를 살려냈다.

개인과 그 개인이 태어난 문화가 가진 언어는 일방적인 관계로 보인다. 태어난 아이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언어를 배우게 되고, 그 언어는 아이의 사고 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한 개인이 한 언어의 생존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가장 쉽게 떠오르는 예가 세종대왕이다.

물론 세종대왕은 한국어라는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표현되는 글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게다가 그 노력은 왕 혼자서가 아닌,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노력이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결정하고 추진하지 않았다면 한국어는 아직도 한자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지 모른다. 디지털 시대에 알파벳을 사용하지 않고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행운도 크지만, 우리가 중국 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면 자문화 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중국이 한국 문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종대왕이 글자를 발명해서 한국어의 독립을 지켰다면 이미 사라진 언어를 살려낸 사람도 있다. 인류가 역사 속에서 목격한 것처럼 언어는 영원하지 않다. 로마제국의 언어였던 라틴어는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고 문자로만 남아있고,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230개가 넘는 언어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히브리어도 원래 그렇게 사라진 언어였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전세계로 흩어져 정착한 지역 문화에 동화되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게 사멸한 히브리어를 일상언어로 살려낸 사람이 작가이자 언어학자였던 엘리에제르 벤예후다(1857∼1922)이다.

동유럽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벤예후다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유대 경전을 공부했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잘 알았고, 파리 소르본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인 시온주의(Zionism)를 접하게 된 벤예후다는 20대 초에 당시 오토만 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후 경전 속 문자로만 남은 히브리어를 일상어로 되살리기 위한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먼저 히브리어 어휘를 모은 사전을 만들었고, 자신의 가족부터 히브리어로 대화하게 가르쳤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882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말할 줄 아는 최초의 현대인이 되었다. 벤예후다는 아내가 아파서 가정일을 도울 일손이 필요했지만 아들이 혹시라도 히브리어 외의 다른 언어를 듣고 배울까 걱정이 되어 가정부도 구하지 않았고, “동물의 소리도 결국 다른 언어라서 아이가 듣고 따라할까 걱정되어 들려주지 않았다”고 썼을 만큼 철저했다. 처음에는 괴짜 같은 행동이었지만, 결국 새롭게 건국한 현대 이스라엘은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고, 사라진 이스라엘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세계를 제패한 영어는 어떨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이지만, 가장 강력한 언어는 영어다. 왜냐하면 중국어는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많은 언어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건 제1외국어의 지위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는 다 합쳐봐야 4억명이 되지 않지만, 서로 다른 비영어권 문화 출신의 두 사람이 만나면 영어를 쓴다. 하지만 이렇게 막강한 힘을 가진 영어도 모든 언어가 그렇듯 한때는 사용 규칙, 즉 문법도 표준화가 되지 않은 엉성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훌륭하고 세련된 표현이 많지 않았다.

외국어를 배우다가 가끔 자신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를 발견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뛰어난 표현이 많다는 건 그 언어를 많이 사용할 좋은 유인이 된다. 재치 있는 표현이 많으면 사용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사랑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수준에 맞는 표현을 만들어내는 등의 ‘투자’를 하게 되고, 그 언어는 점점 더 풍부해진다. 영어에서 그 작업을 시작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오른쪽)가 4세기 전에 만들어낸 표현들은 20세기 힙합 뮤지션들도 사용하는 일상어가 되었다. 왼쪽은 미국 래퍼 제이지.

“셰익스피어는 ‘햄릿’ 같은 유명한 작품을 쓴 극작가이자 시인”이라고 설명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가 영어라는 언어에 끼친 영향을 가늠하기 힘들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팩폭(팩트폭행)’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한다. 그런데 이 표현을 우리가 50년 후에도 사용할까. 지금 60, 70대 이상은 ‘어깨’, ‘이빨’ 같은 말은 각각 깡패와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알고 있지만, 젊은 층은 사용하지도, 들어본 적도 없는 표현이다. 그런데 누군가 유행어를 잔뜩 만들어냈는데, 너무나 절묘하고 처음 들어도 바로 이해하기 때문에, 더 좋은 표현을 찾기 힘들어서 수백년 후에도 계속 사용된다고 생각해보라. 그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이 셰익스피어다.

가령 ‘break the ice’라는 표현을 보자. 처음 만난 사이에 어색함을 없앤다는 이 표현은 너무나 적절해서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아이스브레이킹’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표현을 차가운 마음을 녹인다는 의미로 처음 등장한 것이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다. 영어 수업시간에 ‘suddenly(갑자기)’와 같은 의미의 숙어로 배운 ‘all of a sudden’도 같은 작품에 처음 등장했다. 형용사인 sudden을 명사처럼 취급한 시적인 표현인데, 이 작품이 큰 인기를 끌면서 모두가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4세기가 넘은 지금도 사용된다. 한때 한국 TV를 장악했던 ‘개그콘서트’에서 만들어낸 표현들이 2400년대에도 전혀 낯설지 않게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 밖에 ‘heart of gold (고결한/친절한 마음)’ ‘one fell swoop(단번에, 일거에)’ ‘too much of a good thing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good riddance(없어지니 속이 후련하네)’ ‘love is blind (사랑에 눈이 멀다)’ ‘send him packing (쫓아내다)’ ‘wild good chase(부질없는 노력)’ ‘to come full circle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다)’ 같은 것도 영어권에서는 요즘도 일상 대화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표현들이지만 그 기원은 결국 셰익스피어가 쓴 연극 대본에 있다.

셰익스피어는 관용구만 만든 게 아니라 단어도 만들어냈다. 영어에서 ‘토하다’는 vomi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일상에서는 캐주얼하게 puke라는 말을 더 쉽게 사용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된다. 단어도 한국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스웩(swag)’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힙합 문화를 통해 들어와 허세, 스타일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에서 swagg'ring (swaggering)이라 사용한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오만한, 활개치는’의 의미로 사용된 이 단어는 2000년대에 들어와 제이지, 솔자보이 같은 뮤지션들이 가사에 사용하면서 힙합문화에 유입되었고, 이제는 비영어권 문화에서도 이해하는 단어가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주장까지 나올 만큼 너무나 많은 표현들이 셰익스피어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정말로 그가 만들어낸 게 맞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가 처음 대본에 넣은 이런 표현들은 그의 연극이 큰 인기를 끈 후에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게 셰익스피어가 영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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