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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빠인데 양육권 없다고… 아이 학대당해도 속수무책

입력 : 2021-10-26 06:00:00 수정 : 2021-10-26 1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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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제 허점에 비극 겪는 미혼부들

민법 따라 이혼 300일 내 출생아
아이 엄마의 前 남편 자녀로 간주
소송해 호적 올렸지만 문제 산적

미혼부 신고 길 열어준 ‘사랑이법’
일부 예외적 상황서만 허용 한계
싱글대디협회 “불평등한 법” 지적
지난 8월 A(41)씨가 딸(7)을 만나 찍은 사진. A씨는 “아이 엄마가 아이 손톱도 제대로 잘라주지 않는다. 아이를 방임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A씨 제공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제 아이인데… 아빠가 되는 건 너무 힘드네요.”

인천에 사는 A(41)씨는 매일 아이의 방을 치운다. 올해 7살이 된 딸 나연이(가명)가 이 방에 머무는 시간은 한 달에 고작 38시간. 매일 보고 싶은 딸이지만, 한달에 두번만 만날 수 있다. 지난 4월 양육권을 둘러싼 아이 엄마와의 소송에서 패소했기 때문이다.

A씨는 2014년 B씨와의 사이에서 나연이를 얻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하려고 주민센터를 찾았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B씨가 전 남편과 이혼한 지 300일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법 제844조에 따르면 여성이 이혼하고 300일 안에 낳은 아이는 전남편 자녀로 간주해 다른 남성의 호적에 올릴 수 없다. A씨는 “(B씨가) 미혼인 줄 알았는데 아이를 호적에 올릴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출생신고를 하고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일단 B씨의 전 남편을 친부로 출생신고를 했다”고 회상했다.

A씨는 B씨와 2년 정도 아이를 같이 키웠지만, 성격 차이 등으로 결국 갈라섰다. 나연이가 눈에 밟혔으나 법적으로 ‘아빠’가 아니기에 양육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A씨는 소송을 제기해 나연이가 5살이 됐을 때 비로소 자신이 아빠라는 것을 인정받았으나 양육권은 찾아오지 못했다. A씨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방임하는 정황이 있었는데도 재판부는 엄마가 아이를 키워왔다는 점을 들어 엄마에게 양육권을 줬다”고 토로했다.

A씨는 “매번 아이를 만날 때마다 좋으면서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아이의 손톱은 늘 긴 상태고, 이에는 충치가 많다고 한다. A씨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아이가 ‘엄마한테 맞아서 코피가 났다’고 한 적도 있고, 내게 오면 엄마에게 돌아가기 싫어한다”며 “아동학대 기관에 신고했으나 양육자가 아니란 이유로 별다른 조치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출생신고를 내가 못 한 것이 비극의 시작인 것 같다”며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주 양육자가 엄마라는 인식이 크다. 아빠의 권리를 찾기가 힘들다”고 호소했다.

A씨의 사례는 혼외관계 출산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현행법은 혼외자녀의 경우 원칙적으로 친모만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규정한다. 남성이 자신이 아빠임을 입증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25일 관련 단체 등에 따르면 올해 2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사랑이법)이 통과돼 남성도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기존 법은 아이 엄마의 이름과 등록기준지, 주민등록번호가 모두 ‘불명’인 상태에서만 남성이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아이 엄마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거나 잠적하더라도, 아이 아빠는 아이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출생신고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법은 개정됐지만 남성의 출생신고는 여전히 험난하다. 개정안은 ‘친모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신고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아빠가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싱글대디가정지원협회 ‘아빠 품’의 김지환 대표는 “현재 가족관계등록법은 까다로운 재판을 거쳐야만 아이의 출생이 인정되는 불평등한 법”이라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이다. 병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시·읍·면장에게 통보되고, 출생신고가 되지 않을 경우 시·읍·면장이 직권으로 출생신고를 하도록 한 것이 골자다. 그러나 A씨 사례처럼 혼외관계에서 아이가 태어날 경우 호적관계 등에 대해 명확한 기준이 정해지지 않았다.

미혼부 4명은 최근 ‘혼외자의 출생신고는 친모만이 가능하다’는 가족관계등록법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김지환 대표는 “아이를 책임질 자신이 없는 여성이 병원 밖에서 출산하기도 하는데 출생통보제는 병원 밖에서 태어난 아이는 보호하지 못하는 등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며 “출생신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혼외자녀는 엄마만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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