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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귀은의멜랑콜리아] 냉소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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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10-25 22:53:40 수정 : 2021-10-25 22: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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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 보며 욕망 반복학습
빚투·영끌… 발버둥 쳐보지만
‘기득권 카르텔’에 자포자기
외면은 부조리 동조하는 셈

정치는 대선이 가장 흥미롭고, 경제는 부동산이 제일 뜨겁다. 그 대선과 부동산이 만나는 지점에 ‘대장동’이 있다. 여기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가세한다. 대장동 판이 ‘오징어 게임’과 닮았다고 너도 나도 거든다. 이제, ‘대선-부동산-오징어게임’, 그 XYZ선이 만나는 지점에 대장동이 찍힌다. 대장동 이슈에 전국민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장동을 향한 시선을 더욱 강력하게 견인하는 것은 ‘욕망’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황인호(이병헌)가 프런트맨이 되기 전 그의 책꽂이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과 ‘세미나11’이 있었던 것에 주목하자. 라캉은 욕망이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모방되고 학습되는 것이라 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 인간 욕망의 본질이다. 나는 나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나의 욕망은 알 수 없기에, 욕망은 쉽게 ‘돈’으로 환산된다. 그 돈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돈으로 환산된 욕망은 모호하지 않고 구체적이다. 정성적이지 않고 정량화돼 있다. 이 욕망의 단위가 ‘대장동’으로 인해 바뀌었다. ‘억’ 단위에서 ‘몇십억, 몇백억’으로 한순간에 뛰어 버렸다. 욕망이 단위가 바뀌면 뭐하나, 오히려 욕망과 현실의 거리는 더 까마득해졌다. 그 낙차에 현기증이 일어도 욕망의 학습은 끝이 없다. 대장동 이슈가 연일 업데이트되고 온갖 매체에서 그것을 보도하는 사이, 우리는 ‘대장동’이란 판을 통해 욕망을 반복학습한다.

반복학습만큼 효과가 뛰어난 학습법이 있을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과 ‘패닉바잉’(공황구매)은 이 반복학습의 결과이다.

학습하지 않는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기에 시험에 대한 불안이 없다. 학습을 너무 많이 한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역시 모르지만, 얼마만큼 모르는지도 가늠할 수 없기에 신경증에 노출된다. 그러다가 아예 번아웃, 자아고갈에 이른다. 부동산에 대해서도 국민은 세 부류로 나뉜다. 별 관심 없는 자와 신경증적 강박주의자, 그리고 번아웃으로 무력해진 자.

5년 전, 아파트를 사면서 이런 말을 들었다. “대출도 없이 집을 사다니, 특이하네요.” 얼결에 무대출 자가소유자가 돼 버렸지만, 일시금을 투척할 수 있었던 건 부자라서가 아니었다. 지방 면 소재지에 있는 아파트는 서울의 투룸 전셋값과 비슷하다. 그렇더라도 적은 돈은 아니어서 통장에 한 달 생활비를 남겨놓고 가진 돈 다 쓸어모아 집을 샀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처럼 빚 없이 사는 것이 인생 목표라서도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는 이 금융자본주의에서 빚을 지게 돼 있다.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 자동차나 스마트폰 할부 같은 것이 모두 빚이다. 빚이 있어야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가 돈을 벌고 자본주의는 더 거대해진다. ‘개미’가 없다면 주식시장이 성황을 이룰 수 없듯이, 주식시장이 개미를 만드는 시스템으로 공룡화되듯이, 결국 개미를 희생양으로 주식시장이 더 폭력적으로 변해가듯이, 개인의 대출과 신용카드, 온갖 할부금이 금융자본주의의 미끼가 된다. 금융자본주의는 부채자본주의이다.

대출을 받아야 이득일 때가 있다. 은행빚을 내면 이자를 내야 하지만, 금리는 물가상승률보다 낮고, 대출로 인해 발생한 잉여자산은 투자로 이어질 수 있기에, 대출을 받을 수만 있다면 받는 것이 경제적 이득일 수도 있다. 모르지 않지만, 이성보다 늘 직관이 먼저인 사람이라 직관대로 집값을 온전히 다 치렀다. ‘내 집이다’라는 확정과 확증 속에 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신념은 자본주의 ‘부의 추월차선’을 탈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의 증상일 것이다.

부의 추월차선이건, 계급의 사다리이건, 그것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을까. 다만, 추월차선과 그 사다리조차 정보를 독점한 카르텔의 내부자에게만 허락된 것이고, 외부자는 자칫 잘못 탔다가 충돌하거나 추락하는 사고가 날 수도 있기에 애초에 그 근처를 서성이지 않는 것이다. 추월차선과 사다리는 안정적이지도 않다. 정부가 가계부채 운운하며 전세대출을 조였다가 다시 풀었다가 하는 사이, 누군가는 전세 계약을 포기하면서 계약금을 날리고, 누군가는 더 높은 이자로 대출받아 결국 더 많은 빚을 지게 되고, 또 누군가는 반전세로 계약했다가 앞으로 내야 할 월세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대장동 프로젝트가 한창일 때 우리는 매달 꼬박꼬박 적금을 넣으면서 행복해했다. 이제, 대장동 커넥션을 지켜보면서 그때 그 행복조차 자조하게 된다. 그 대장동 커넥션을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질문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진행 중일 카르텔과 커넥션을 직시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보가 없는 외부자는 그것을 투시할 눈이 애초에 없다. 오히려 속지 않으려 눈 똑바로 뜨고 살면 더 속아 넘어가게 된다. 라캉은 ‘세미나 21’에서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고 했다. 세상이 이미 기만과 허구 속에 있는데 눈에 보이는 그것만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라캉은 냉소주의자였을까. 라캉을 읽은 황인호는 냉소주의자였을까. 대장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점차 냉소주의자가 돼 가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냉소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된다는 점이다. 냉소주의는 지금의 현실은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에 결국 현실이 더 악화되는 것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의 부조리가 더 거대해지는 것을 추인하게 되는 셈이다. 차라리, 분노가 낫다. 분노는 모이면 세계를 바꾸는 에너지가 될 수도 있지만, 냉소주의는 서서히 세상을 무너뜨린다. 이 냉소주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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