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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시간 거친 인간 내면과 궤적 ‘조형 언어’로 표현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1-10-09 14:00:00 수정 : 2021-10-09 10: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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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응축된 시간이 만든 당신의 지금

조각가 정현의 시각적 서사
현대사회에서 용도 폐기되고 외면받는
침목·아스팔트 콘크리트 등 재료 사용
버려진 물건서 발견한 ‘제 살 깎기’ 내공

침목으로 만든 거대한 군상
물성과 인간의 탐구 사이에서 균형 중시
팔레 루아얄 ‘서 있는 사람’ 전시 대표적
파쇄공·녹 드로잉도 눈길 끄는 작품들
정현의 팔레 루아얄 전시는 현지 반응이 좋아 기간을 6개월이나 연장했다. 앙코르 요청으로 생크르국립공원에서도 선보인 바 있다. 2016년 파리 팔레 루아얄 정현 개인전 설치 장면. 학고재 제공

#조각가 정현의 ‘흐름’을 담은 작품

정현은 1956년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다녔다.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 고등 미술 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 베이징 금일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김종영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소마미술관, 포항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2006년 올해의 작가, 김종영 미술관 오늘의 작가, 김세중 조각상 본상 등을 받았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에서 조각을 전공한 그는 1980년대에 파리로 유학을 하러 갔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미술을 만나자 작업의 전환에 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의 작업은 사실주의적 측면이 강하여 외면의 묘사로 보이기 쉬웠다. 줄곧 다루고 싶던 인간의 내면과 그것의 궤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새로운 작업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고 거기에 사용할 재료를 찾아 나섰다. 다양한 재료를 만나고 만져보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낡고 오래된 침목(枕木)이 들어왔다. 침목은 철도 도상 위에서 레일을 직접 지지하는 목재다.

작가는 침목을 작업하기로 했으나 바로 손을 대어 다듬지 않았다. 혹독한 시간을 견디어 낸 그것의 몸에서 숭고와 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인천에서 자라며 군수물자를 나르던 열차들을 봤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열차는 지나갔고 침목은 묵묵히 그것을 받치며 제자리를 지켰다. 한참 동안 침목을 바라보다 10여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손을 움직였다. 거친 표면의 나무를 도끼로 자르고 전기톱으로 다듬으며 사람의 형태로 만들었다. 바닥에 누워 버티던 침목은 그의 손을 거쳐 사람의 모습으로 우뚝 섰다.

정현은 이때부터 침목, 아스팔트 콘크리트, 석탄, 잡석 등을 재료로 모으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 용도를 다했다고 외면받고 버려진 폐기물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살을 깎으며 버틴 경험을 통해 어느 때보다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인고의 시간을 거친 인간의 내면과 역사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현은 결국 침목과 더불어 버려진 물건에서 본 의미를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표현하게 되었다.

김영준은 이러한 그의 작품을 두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전시 서문에서 다음같이 썼다. “조각가 정현의 작업은 ‘흐름’을 담고 있다. 시간의 흐름, 의식의 흐름, 기(氣)의 흐름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시각적 서사시다. 흐르는 세월이 우리네 삶에 남긴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체험적 기록이다. 그리고 작가 내면으로부터 샘솟듯 흘러나와 시각적 언어로 발현된 창작의지를, 그 힘과 에너지를 세상에 전하는 울림이다.”

철판에 녹 드로잉 작품 ‘무제’(2014). 학고재 제공

#조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

정현은 이렇게 물성과 인간의 탐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조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드러난 것은 보는 이에게 시각적, 정신적 감동을 전한다. 2016년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서 열린 ‘서 있는 사람’ 전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작가는 한불 수교 130주년에 맞춰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서 전시를 열었다. 루이 14세가 거주했던 이 장소는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여기에 사람이 서 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각자 모습은 다르지만 굳건한 태도는 같다.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주먹을 꽉 쥔 듯하다. 어떤 강력한 의지와 힘이 거기서 전해진다. 호위 무사처럼 선 이들의 주변에는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늘어졌다. 그 일렬의 나무를 따라가서 고개를 들면 화려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궁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눈을 돌려보면 회랑이 장소를 포위하듯 감쌌다. 그런데도 사람은 굳건하게 서 있다. 여기에 사람이 서 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정현은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침목으로 만든 50여점의 거대한 군상을 세웠다. 인상 깊은 점은 주변환경을 모두 제치고 정현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서 있는 사람은 화려함의 극치인 프랑스의 궁도 풍성함을 자랑하는 칠엽수 나무도 모두 앞선다. 긴 시간을 거친 물건과 사람이 지닌 응축된 에너지의 위엄은 이토록 강하다.

침목 작업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정현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파쇄공 작업이 있다. 파쇄공은 무게가 수십 톤에 이르는 구(球) 형태의 쇳덩어리다. 제철소에서 자석으로 아주 높이 올렸다 떨어트리며 사용한다. 아래에 있던 쇠를 용광로에 넣을 크기로 깨트리기 위해서다. 정현은 2010년 포항제철소 내 고철 야적장을 방문했다가 이 쇳덩어리를 처음 봤다. 그것이 낙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뼛속으로 스미는 강한 진동을 느꼈다.

둥그렇고 우람한 덩어리가 바닥에 놓여 있다. 바위처럼 보여 가까이 다가가 만져본다. 손에 차가움이 느껴지며 쇳덩어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가만히 다시 보고 서 있으면 상처들이 보인다. 둥글다고 생각했던 것은 눌린 듯 찌그러져 있다. 표면에는 무언가에 의해 찍히고 파인 흔적들이 있다. 파쇄공이다.

정현은 작업을 하며 재료에 지나친 변형을 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잃지 않도록 작업한다. 그것이 지나온 시간과 존재 자체에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폐기 철물이 품은 힘을 끌어내는 것에 주력한다. 본래 약 16t이었다가 약 8t까지 닳고 줄어든 파쇄공은 이렇게 우리 눈앞에 작품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제 파쇄공은 단순한 파쇄공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과 인고에서 비롯한 깊이와 힘의 상징이다.

2015년 이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을 방문해 본 사람은 정현의 조각을 한번은 봤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옆 한옥 건물을 사용하는 갤러리 앞에 놓인 육중한 파쇄공이 정현의 작품이다. ‘무제’(2013). 학고재 제공

#콜타르와 철이 그리는 드로잉

정현은 작업을 하면서 일기를 쓰듯 지속하여 드로잉을 해왔다.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전형적인 미술 재료가 아닌 콜타르 또는 철을 사용한다. 콜타르는 석탄을 고온으로 건류할 때 부산물로 생기는 검은색 유상 액체다. 콜타르로 그린 드로잉에서는 야성적이며 거친 느낌이 전해진다. 작가가 이미지의 형태가 아닌 재료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결과다.

철 드로잉 또는 녹 드로잉에서는 이 의도가 더 강조된다. 철을 캔버스에 묻히고 이를 긁어낸 화면. 그 위에 물을 뿌려 녹을 아래로 흐르도록 유도한 작업이다. 작가와 재료가 조응을 이루며 완성한 이 작품에는 시간의 흐름과 일의 흔적이 있다. 작가는 과정을 지나간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결과로 보여주려는 바람을 이렇게 내보인다.

어느새 시월이고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 달려온 듯하지만 아직 도착선이 보이지 않는 지금, 당신이 가장 지친 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응축된 시간과 힘을 가진 때일 수도 있다. 정현이 조각과 드로잉을 통해 보여주었듯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일으켜 그 안의 가능성을 다시 가늠해볼 법도 하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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