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청소년 노린 디지털 성범죄 갈수록 ‘악랄’ [심층기획]

, 세계뉴스룸

입력 : 2021-09-06 06:00:00 수정 : 2021-09-07 08:00:4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2019년 가해자 505명… 전년比 두 배 이상 ↑
한 명이 다수에 범행… 피해 13∼15세 최다

‘박사방’ 10대 피의자, 소년법 최고형 확정
‘제2의 n번방’으로 기소된 일당에도 중형

법원 ‘솜방망이 처벌’ 의식 양형기준 강화
죄질 나쁘거나 상습범, 최대 징역 29년

경찰, 9월 하순에 위장수사 제도 시행
진정 등 부담 없애… 범죄 감소·예방 기대감

성착취 텔레그램 ‘박사방 사건’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상대로 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크게 높인 계기였다. 하지만 사회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고, 되레 범죄자들이 지능화·악랄화하는 모습까지 보여 우려를 더한다. 이에 경찰과 검찰, 법원 등 형사사법기관이 경각심을 갖고서 대응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는 중이다. 이달 말부터는 경찰의 위장수사가 시작돼 범죄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인터넷 환경이 발달할수록 악랄해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속옷 모델을 섭외한 뒤 실제로는 나체사진을 전송받아 이를 빌미로 협박하거나, ‘온라인 그루밍(길들이기)’을 통해 신체사진을 받는 식이다. 태어날 때부터 전자기기에 익숙해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청소년들은 성인층에 비해 디지털 성범죄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증가세를 거듭하는 디지털 성범죄 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지는 아동·청소년 대상 범죄 증가율이 그 근거다.

 

5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8년 전체 성범죄 가해자(유죄 확정)의 6.5%(251명)에 불과했던 ‘디지털 성범죄’는 2019년 13.9%(505명)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이 중에서도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2019년)는 266명으로, 전년(223명) 대비 19.3% 증가했다. ‘피해자’도 505명을 기록해 전년(251명)보다 101.2% 급증했다.

 

전체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13세 미만 피해자’ 비중도 커지고 있다. 2016년 23.6%이던 13세 미만 피해자는 2019년 30.8%로 7.2%포인트 늘었다. 무엇보다 성착취물 제작 및 통신매체이용음란죄 등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13~15세가 가장 많았다. 여성가족부는 “한 명의 범죄자가 다수의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련 판례도 쌓이기 시작

 

디지털 성범죄 관련 판례들은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 단계다. ‘n번방 사건’과 ‘박사방 사건’의 관련자 대부분은 1·2심을 거쳐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텔레그램 ‘박사방’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닉네임 ‘태평양’ 이모(17)군은 장기 10년·단기 5년형을 선고받은 원심이 지난달 확정됐다. 이군은 ‘박사방 사건’에서 처음 형을 확정받았는데, 그가 받은 형은 소년법상 최고형이다. 지난 3월에는 텔레그램 n번방을 모방한 ‘제2의 n번방’을 운영하며 여중생들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기소된 일당에게 중형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닉네임 ‘로리대장태범’ 배모(19)군에게 장기 10년·단기 5년의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배군과 닉네임 ‘슬픈고양이’ 류모(21)씨 등은 2019년 11월 접속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수집할 수 있는 트위터 유사 피싱사이트를 만든 뒤, 피해자의 접속을 유인해 인적사항을 알아냈다. 이후 여중생들의 계정에 접속해 그들의 온라인 일탈행위 게시물을 수집한 뒤 경찰인 것처럼 접근해 유포할 것처럼 협박했다. 이들은 이런 수법으로 여중생들의 나체 사진 등을 촬영해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제작한 다음 단체 대화방에 전송한 혐의를 받았다. 류씨는 2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이밖에도 춘천지법 형사2부(재판장 진원두)는 작년 12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A(24)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A씨는 메신저를 통해 피해자인 청소년을 알게 된 후 애니메이션을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호감을 얻었다. 이후 “그림을 그릴 자료가 필요하다”며 신체 사진을 요구했고, 사진을 받은 뒤에는 음란메시지를 보내며 성적 불쾌감을 유발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향후 건전한 성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A씨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이들 선고가 이뤄질 때마다 여론은 들끓었다. ‘솜방망이 처벌’ 비판을 넘어 ‘법원이 범죄를 조장한다’는 식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기존 판례를 넘어선 양형기준을 마련, 올해부터 시행했다. 새 기준은 죄질이 나쁘거나 상습적인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제작 범죄에 권고 형량을 최대 징역 29년3개월로 정했다. 다만 이 기준은 개정 이전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위장수사로 잡는다

 

경찰은 이번 달 24일부터 위장수사 제도를 시행한다. 위장수사는 신분 ‘비공개’ 수사와 신분 ‘위장’ 수사로 나뉜다. 신분 비공개 수사는 경찰관 신분을 숨기고 성 착취물 구매자로 행세해 범인에게 접근한 후 범죄 증거를 수집하는 방식이다. 비공개 수사를 하려면 상급 수사부서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신분 위장수사는 가상 인물의 신분증 등 문서 제작까지 가능한 점이 다르다. 이 방식으로 수사하려면 검사의 청구를 거쳐 법원 허가까지 받아야 한다. 위장수사의 기간은 한 번 허가받을 때 3개월까지 가능하고, 3번까지 연장할 수 있어 총 1년을 넘을 수는 없다.

 

경찰은 이미 디지털 성범죄 위장 수사관 40명을 선발했다. 실제 수사 경력 2년이 넘는 수사관 중에서 심리·적성검사를 통과한 이들이다. 이들은 연수원 실무교육 중이며, 곧 전국 시도경찰청 사이버 또는 여성청소년 수사 업무에 투입될 예정이다.

 

경찰은 위장수사 법제화로 인해 디지털 성범죄 대응역량이 크게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존에도 판례가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위장수사가 가능했지만, 범죄자나 그 가족들이 ‘경찰이 성착취물 판매를 유도해 속아 넘어간 것’이라는 등의 진정을 넣으면 수사관이 피의자로 전락해 조사받기도 해 적극적으로 수사하기 힘들었다.

 

최종상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사이버범죄수사과장은 “법제화를 통해 면책조항이 생겨 훨씬 적극적인 수사가 가능해졌다”고 강조했다. 면책조항은 위장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위법행위를 저질러도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한 처벌하지 않도록 했다. 최 과장은 “수사관들은 청소년들의 용어까지 완벽히 익히는 등 기술적인 훈련을 철저히 받게 된다”며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범죄 예방 효과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성범죄자 종합 DB 구축·배상명령제 활성화 절실”

 

“성범죄자 종합 데이터베이스(DB) 구축과 배상명령제도 활성화가 꼭 필요합니다.”

 

박경규(사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디지털 성범죄 억제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박 위원은 지난달 12일 법무부의 ‘디지털 성범죄 대응 TF(태스크포스)’의 전문위원으로 위촉됐다. 변영주 영화감독을 위원장으로 하는 TF 위원들은 법무부에 디지털 성범죄 대응 정책을 제안하고 입안 관련 자문을 전달하게 된다.

 

박 위원은 디지털 성범죄 대응능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경찰·검찰·법무부 등 모든 관계부처가 공조해 ‘성범죄자 종합 DB’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재범률이 높고 ‘암수범죄(범죄가 실제로 발생하였으나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은 범죄)’가 많기 때문에 수사기관에 입건됐을 때 그 사람의 성향, 재범 가능성 등을 꼼꼼히 파악하고 기재해 지속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재 범죄경력조회서에는 ‘기소유예’, ‘집행유예’ 등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 기록되는 데 그치고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2020 법무부 성범죄 백서’에 따르면, 불법촬영 범죄 등 디지털 성범죄의 재범률은 75%에 달한다.

 

박 위원은 ‘판결전조사제도’ 활성화를 한 대안으로 제안했다. 판결전조사제도란 피고인의 성장 배경·인격 등을 조사해 양형의 근거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범죄자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이에 걸맞은 ‘맞춤형’ 보호관찰 명령을 내리는 등 적절한 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법무부 보호관찰관 인력 부족 등으로 제도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실제 보호관찰관 제도는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다. 최근 전자발찌 연쇄살인범 강윤성 사건에서도 드러났듯, 7월 말 기준 보호관찰관 1명이 대상자 17.3명을 관리 중이다.

 

박 위원은 형사재판에서의 ‘배상명령제도’도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피해자가 따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더라도, 법원이 형사재판에서 치료비·위자료 등의 배상을 명령하는 제도다. 박 위원은 “성범죄 피해자들은 형사재판에서도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게 원칙인데 이들에게 별도로 또 민사소송을 제기하라는 건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성범죄의 경우 배상명령이 활성화돼야 범죄 억지력도 높아지고, 피해자 보호라는 취지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