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주변을 담아낸 작가 이우성
끊임없이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
1969장 드로잉 애니메이션에 담아
익숙하지만 우리가 갈망하는 풍경
대상의 미묘한 변화 주목한 강동주
최근 비 주제 레인 리딩 전시 참여
종이에 쏟아지는 비 그림으로 옮겨
길고 긴 장마처럼 작품 속 장면 지속

#계절이 가져온 변화
지난 5월, 저녁 7시에도 날이 환하던 순간부터 마음이 설렜다. 일교차가 커서 겉옷을 입고 다녔지만 좋아하는 계절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은 들떴다. 여름이 드디어 왔다. 6월이 되니 햇빛이 강렬해지고 풀잎은 싱그러우며 공기는 청량하다. 계절이 가져온 변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청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성하(盛夏)는 맑고 밝은 청춘과 닮았고 그래서 여름은 좋은 시절이다. 어쩌면 이 시절을 위해 쓸쓸하고 시리기도 한 지난 계절들을 버텨내는지도 모르겠다.
이맘때면 꼭 꺼내어 읽어보는 책이 있다. 김연수 시인의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다시 책을 읽으며 다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예컨대 “글을 잘 읽었다”라든가.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네가 어떤 시를 쓸지 꼭 보고 싶다” 같은 말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하다.”
이러한 문장들이 담은 김연수 시인의 청춘을 두고 김애란 소설가는 말했다.
“우리가 청춘에 대해 말한다는 건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어머니 또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리고 그게 한 시절 우리를 그토록 빛나게 한 여름의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말을 보고 난 뒤 여름이 나에게 펼쳐 둔 속셈에 관해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지금의 여름을 치열하게 경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름의 다양한 모습이 떠올랐고 거기엔 이우성, 강동주의 회화도 있었다.
#바다, 이우성의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
이우성(38)은 홍익대학교 회화과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평면전공 전문사 학위를 받았다. 학고재 갤러리(2017, 서울), 아마도 예술공간(2017, 서울), 아트 스페이스 풀(2015, 서울), OCI 미술관(2013, 서울), 서교예술실험센터(2012, 서울), 175 갤러리(2012,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그는 This is not a church(2021, 서울), 학고재 갤러리(2021, 서울),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2020, 서울), 아르코미술관(2020, 서울), 경기도미술관(2020, 안산), 주홍콩한국문화원(2020, 홍콩)에서 개최한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작가는 그동안 주로 자신의 일상과 주변 환경, 인물들을 관찰하여 캔버스나 천 위에 그렸다. 얼마 전 그는 애니메이션 영상과 그 과정을 담은 OHP 필름 드로잉을 새롭게 발표했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2021)는 이러한 애니메이션 영상 작품이다. 1969장에 달하는 드로잉을 그리고 이어서 만들었다.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는 바다의 모습을 재현했다. 영상이 동반하는 아름다운 음악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어자혜의 연주다. 작가는 어자혜에게 작품을 보여주며 떠오르는 감상을 즉흥 연주로 부탁했다.
이우성 역시 팬데믹의 재난적 상황으로 커다란 변화를 경험했다. 일상생활은 컴퓨터 모니터 안에 갇힌 채 온라인으로만 이루어졌다. 갑갑한 매일을 보내던 그는 2016년 뉴질랜드에 머물며 발견한 바다의 풍경을 영상으로 기록해둔 것이 생각났다. 해 질 녘 혼자 걷다 만났던 바다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당시 촬영했던 영상을 노트북 모니터에 재생하고, 스크린 위에 투명한 OHP 필름을 올렸다. 그 위에 파도의 모습, 즉 무수히 변하는 바다의 순간을 오일 파스텔로 그렸다. 수천 장이 된 필름들을 연결해 움직이는 그림인 애니메이션으로 바다를 구현해냈다.
작가는 그림의 소재이자 동기였던 일상을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째로 잃어버렸다. 이러한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그는 그림으로 정면 돌파하는 길을 선택했다. 일상을 그리는 그는 잃어버린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서정적인 방법을 찾았다. ‘어쩌면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몰라’는 OHP 필름 드로잉들과 함께 선보였다. 이를 통해 제작 과정을 드러내며 ‘그리기’라는 반복적 행위를 강조한다. 이 행위는 이우성이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갖게 된 그리움을 극복하려는 시도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풍경,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움직임이다.
이우성이 제시하는 바다의 모습이 익숙하거나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익숙하고 평범한 바다가 지금 작가와 우리가 갈망하는 가장 그리운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지극히 사적이고 특별한 순간을 일깨워 기억하게 한다. 이우성은 작품을 통해 “무언가 막연한 기대를 품고 바람을 쐬러 나가는 길을 떠올리는 건 어떨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가 처음 향하는 저 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저 길의 끝에 바다가 있다는 것은 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더 멋진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사적이고 특별한 순간이 될 그 일.

#장마, 강동주의 ‘빗물 드로잉’
강동주(33)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 공부했다. 2012년 누하동 256에서 개인전 ‘정전(停電)’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2021, 과천), 아르코미술관(2021, 서울), 두산갤러리(2021, 2016, 서울), 일민미술관(2015, 서울), 일현미술관(2013, 양양)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2013년 일현미술관 ILHUYN TRAVEL GRANT, 2013년 OCI미술관 OCI YOUNG CREATIVES, 2014년 두산 연강 예술상을 받았다.
작가는 대상과 그것을 향하는 시선, 시간의 흐름에 따른 대상의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다. 이 대상은 도시의 풍경일 때가 많으며 종이와 연필, 먹지 등으로 주로 담는다. 이러한 작업은 대상을 단순히 평면으로 옮겨와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뛰어넘는 시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생하는 대상과 공간 사이 관계를 비롯해 그들을 매개하는 작가의 위치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대상을 쓰임이나 용도로 보는 대신 주변과 관계 맺는 존재로서의 오롯한 상태를 보여준다.
강동주는 최근 비를 주제로 삼은 ‘레인 리딩(Rain Reading)’ 전시에 참여했다. 전시는 다가올 어떤 일을 예측하거나 감지하는 인간의 일상적 감각을 비를 예감하는 일에 비유한다. 코로나19의 등장 이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결말 또한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지금, 신체의 내밀한 신호이자 사람이 지닌 본능인 감각을 다시 바라보게 한 것이다.
‘빗물 드로잉’(2021)은 강동주가 이 전시에서 선보인 새 작업이다. 종이 위에 쏟아지는 비를 받아 불규칙적으로 일그러진 동그란 흔적들을 남겼다. 그것을 새로운 종이에 흑연 가루를 사용해 정물을 보고 그리듯 다시 옮겨 그렸다.
강동주의 작품은 공간의 변화에 따라 시간의 늘어짐으로 계속된다. 관람자 역시 그것을 경험하는 데 시간을 소요한다. 그렇게 있으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모습과 그 변화가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존재를 인식할 때처럼 서서히 드러난다. 화면을 처음 바라볼 때는 공기 중에 안개 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점차 바닥에 떨어져 번지는 빗방울의 겹침이 된다. 결국 흐르는 시간 속에서 관람자의 눈과 작품 속 장면은 어긋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진다. 그리고 길고 긴 장마처럼 그렇게 지속한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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