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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멋지게 살아낸 생존자들에 보내는 찬사 [뉴스+]

입력 : 2021-05-04 23:00:00 수정 : 2021-05-05 01: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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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세대 매료시키는 70대 스타들
자칭 ‘생계형 배우’ 윤여정
솔직한 속내 재치있는 입담
할리우드까지 홀딱 반해

발레하는 할아버지 박인환
꿈을 이루는 과정보며
시청자들 눈물샘 폭발

70에 피어난 박막례 할머니
‘나이듦’의 롤모델로
젊은이들의 환호 받아
나훈아(왼쪽부터), 윤여정, 박인환

“나는 생존자다.”

배우 윤여정(74)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해 가진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령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윤여정은 “결혼 후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주부로 10여 년을 보냈다. 그러다 이혼의 아픔을 겪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나를 싫어했다.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면 안 된다’라며 방송국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중략) 나는 생존자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 연기를 그만두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견뎌냈다. 나는 살아남았고 이렇게 연기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삶이라는 긴 여정에 멋지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감동을 주고 있다. 바로 70대 노년 스타들이다. 대중문화의 장에서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지금 이들은 누구보다 멋진 모습으로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있다.

◆생존자 윤여정에 경의를 표하다

윤여정은 단연 그 절정에 있는 인물이다. 지난달 30일 KBS 다큐인사이트의 ‘다큐멘터리 윤여정’편은 생존자 윤여정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줬다. 그럼에도 어떤 드라마보다 감동적인 내용으로 시청률 6.4%를 기록했고, 동시간대 지상파 1위를 차지했다.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최우수 여우 조연상을 받고 기자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다큐멘터리 윤여정’이 소개한 55년 연기 인생을 보면 윤여정의 성공과 인기에 대한 통찰과 흔들림 없는 직업적 신념, 이를 바탕으로 한 당당함, 무례한 질문을 웃으며 따끔하게 받아치는 내공 등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연기 생활로 겪은 경험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 후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생계형 배우’로 살아가던 그는 토크쇼 진행자의 무례한 질문에도 “내가 기호 있는 여배우가 아닌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맡은 역할이) 직장생활 하는 여자, 독립성이 강한 여자, ‘사’자 들어간 여자였고 시청자들은 그런 부류의 여성 캐릭터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의 인생 여정은 혐오와 싸우는 여성이었든, 편견과 싸우는 소수자였든, 먹고살기 위해 어떤 일도 버텨야 하는 자본주의 정글 속 한 인간이었든, 곳곳이 ‘살아남기’의 서사였다. 그는 이제 배우로서 최고 영예라는 오스카상을 거머쥐고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만큼 달관한 경지에 있고, 그를 향해 전 세계의 목격자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코리아그랜마’ 계정으로 활동 중인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의 모습. 유튜브 캡처

이 같은 현상은 최근 몇 년간 콘텐츠 업계에서 종종 포착됐다. 131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박막례(74) 할머니는 윤여정이 ‘미나리’를 통해 세계에 통용시킨 말, ‘코리아 그랜마(Korea Grandma)’, ‘케이(K) 할머니’의 원조다.

박 할머니는 유튜브 활동 초기 한 콘텐츠에서 손녀딸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며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더 무서운 건 할아버지가 날 학교에 안 보낸 것’이라고 마무리지어 그 시대 딸로서 고난의 성장기를 들려줬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모시려는 유명인사가 됐고, 평생 식당일을 하며 뒤집어댔던 파전처럼 “인생이 확 뒤집어졌다”고 말하며 보는 이들에게 쾌감과 희망을 준다. 여자라는 이유로 공부를 안 시켜준 가정을 나와선 바람둥이 남편을 만나 인생은 더 꼬이고, 50년 식당 주방에서 일하다 70세에 치매 위험 진단까지 받았던 할머니는 그야말로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인생이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과목의 권위자가 된 할머니는 “남의 장단에 맞추지 마라”, “느그들이 맞다”며 인생선배로서 자신의 손녀와 구독자들에게 사랑이 듬뿍 담긴 조언을 아끼지 않아 왔다. 할머니 삶에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든든한 팬층이 됐다.

◆‘멋진 어른상’ 꾸준히 부상

할머니들뿐만이 아니다. ‘멋진 어른상’을 보여주는 인생 베테랑 할아버지들을 향해서도 환호가 일고 있다.

가수 나훈아가 지난해 9월 KBS의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신곡 테스형 무대를 선보이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추석,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의 절정에서 비대면 콘서트로 온 국민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었던 가수 나훈아(74)는 ‘멋진 어른의 부상’을 일찌감치 예고한 인물이었다. 당시 노 개런티 콘서트로 사회에 베풀 줄 아는 어른상을 보여줬고, 사이다 같은 멘트로 강자나 권력에도 할 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하기에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거부한 적이 있다”는 후일담도 그를 빛낸 요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질적인 건 무대였다. 최정상에서도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로 ‘프로다움’을 보여준 무대가 그를 ‘왕년의 가수’, ‘라떼는 가수’가 아니라 ‘여전한 가왕’으로 불리게 했다.

배우 박인환이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 출연한 모습. tvN캡처

배우 박인환(76)은 가장 최근 부상한 시니어다. 지난달 27일 종영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나이 일흔에 발레를 시작하는 심덕출 역할을 맡아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극중 인물 덕출과 30년 만에 미니시리즈 주인공에 도전하는 배우 박인환의 모습이 겹쳐 시청자들의 응원이 퍼져나갔다.

그는 드라마 종영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6년차 국민배우답지 않은 겸손함과 도전정신을 이야기했고, 극중에서 덕출이 스물세 살 채록과 특별한 우정을 쌓듯, 공동 주연이자 신인인 배우 송강과의 우정도 소개했다.

그는 “몸에 딱 달라붙는 발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우리 나이에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드라마 출연 계기로 “보통 젊으면 어리다고 무시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극중 채록처럼 젊은 친구에게 배우기도 하고 우정과 마음을 나누는 과정도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는 역설적으로 이상적인 어른에 대한 욕구가 배경에 깔려 있으며, 매체 변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동세대 노인층은 그간 사회적 주목을 못 받다가 주목을 받게 되니 지지를 보내고 있고, 젊은 층의 경우는 기성세대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그와 반대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신선하게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실에서 젊은 층은 고압적이거나, 기성세대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 강요하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라떼는’ 집단, ‘꼰대’라고 하는 집단으로 기성세대를 많이 봐왔는데 대중문화 속에서 보는 모습은 반대”라며 “젊은이를 보듬어 안는다거나, 익숙한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기성세대상이 나타나니 이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방송 전문가는 “레거시미디어에서 다루지 않았던 소외계층이 유튜브 등을 통해 등장해 박막례 할머니와 같은 슈퍼스타가 나왔고, ‘문명특급’ 같은 유튜브 콘텐츠에서 윤여정의 새로운 모습을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이들의 지혜와 매력도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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