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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청나라와 미국의 첫 조약 “왕샤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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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5-02 23:45:55 수정 : 2021-05-02 23: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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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청나라는 1844년 7월 3일에 첫 조약 ‘미중 평화, 친선, 상업의 왕샤조약’을 체결했다. 6월 16일에 협상을 시작해서 비교적 빨리 완성됐다. 미국이 청과 조약 체결을 추진한 데는 영국 요인이 있었다. 영국은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로 ‘남경조약’을 맺었다. 이에 영국을 라이벌로 의식한 미국이 발끈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앞장선 이가 미 하원 의원 케일럽 쿠싱이었다. 1841년 그는 이미 의회에 영국의 조약 체결에 대응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842년 12월 27일 그는 존 타일러 당시 대통령에게 청과의 조약 체결 필요성을 전략적인 차원에서 경고했다. 영국이 이를 토대로 앞으로 일본과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를 거점으로 태평양을 장악할 것이라고 읍소를 놨다. 그의 이런 강박관념은 확장주의자였던 그의 이력(오리건, 텍사스, 쿠바 합병)과 무관하지 않았다.

남경조약을 체결한 중국의 기영 전권대사(왼쪽 사진)와 미국의 케일럽 쿠싱 하원 의원. 출처:위키피디아

3일 뒤 그는 협상 전명특사로 임명됐다. 그의 전략 목적은 최혜국대우로 남경조약의 특혜와 권리를 공유하면서 중국에서 미 국민의 보호 장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미 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을 민사 분야까지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남경조약이 형사사건의 치외법권을 보장했기 때문에 최혜국대우의 이유로 동등하게 적용받을 수 있었다.

이를 관철하는 데 그만의 성공 비법이 있었다. 중국이 거부하는 것을 극구 주장하면서 이에 매몰되게 만드는 것이다. 중국이 전념할 때 최대한 많은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다. 가령, 그는 협상 장소와 대상을 북경과 청 조정으로 주장하자 청은 남경조약을 체결한 기영(耆英)을 즉각 보내 협상에 임하게 했다. 역사는 되풀이됐다. 그는 미국이 북경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데만 집중했다. 그 외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만약 그가 쿠싱이 선의의 징표로 건넨 군사전술과 방어시설 구축에 관한 책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명운도 조금 달라졌을 법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정보를 외세와의 관계에 활용했으면 중국이 오늘날 말하는 치욕과 수모의 시기를 단축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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