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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편지 없는 시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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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4-30 22:23:09 수정 : 2021-04-30 22: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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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우연을 다정한 필연으로
사람의 일 중에서 으뜸으로 꼽아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며 사는 당신에게 편지를 적는 일은 쑥스럽습니다. 우리는 집과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렇게 책을 써서 번 돈으로 쌀이나 부식을 사고, 의료보험료와 국민연금을 내고, 더러는 벗들과 찬 술과 따뜻한 음식을 나누지요. 햇빛 좋은 날은 교하 숲길을 걷고, 동네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리거나 단골카페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봄날의 곰처럼 고요한 날의 안녕을 누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우리는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이 씩씩한 거위 한 쌍같이 평범한 나날을 살아갑니다.

나는 이른 저녁에 잠들고 새벽에 깨어나 글을 쓰지만 당신은 한밤중에 글을 쓰지요. 나는 간장게장이나 육개장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인도 카레나 스파게티를 좋아합니다. 당신은 군것질을 좋아하고, 나는 아침에 먹는 사과 한 알과 호박죽을 좋아하지요. 당신은 다족류 벌레를 두려워하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위에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아요. 우리는 다른 게 많은 사람들이지요. 우리가 다른 것은 다른 유전형질을 타고나고, 다른 성장과정을 겪은 탓이겠지요.

장석주 시인

당신은 어느 낯선 별에서 온 것일까요? 당신은 채식주의를 지향하고, 동물복지를 위해 동물복지단체에 달마다 일정액을 후원하지요. 또한 연약한 것들을 대상으로 삼는 세상의 부조리와 어리석음,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합니다. 그런 당신이 모란이나 동백 같은 식물이 아니고, 내가 초승달을 보며 울부짖는 늑대가 아니라는 건 정말 다행한 일이지요. 우리가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으로 만나 인연을 맺은 것은 얼마나 놀라운 우연인가요? 우연은 우연으로써 견고하고, 우연은 우연으로써만 빛나지요. 사랑이란 불행을 서로 나누며 인생이라는 우연을 다정한 필연으로 바꾸는 과정이겠지요.

애초 불행의 항체가 결핍된 채로 외로움을 앓는 내게 어느 날 당신을 만난 건 축복입니다. 당신은 일주일에 세 번씩 발레 교습소에 나가 발레를 하는데, 아침부터 설레는 모습을 보이지요. 설마 당신은 도약을 꾸준히 연습해서 새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날기를 갈망하나요? 시와 발레를 사랑하고, 착하게 살려는 당신은 탐욕스러운 족제비와 바퀴벌레들이 들끓는 이 세상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감옥이지요. 햇빛과 생수와 보온양말만 있다면 나는 그 감옥에서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어요.

당신은 내가 잠든 자정 넘어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가만히 올려놓아요. 동트기 전 홍매화 가지에 되새 떼가 날아와 소란스럽게 우짖을 때 일어나는 나는 당신이 잠든 새벽에 책상 위에서 편지를 발견하지요. 백지 위에 꾹꾹 눌러 쓴 그 편지를 읽으면 밤새 차가워진 내 심장은 더워집니다. 편지에 뭐 대단한 게 적혀 있지는 않아요. 당신은 그저 내 건강을 염려하는 문장 몇 개를 적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에는 늘 당신의 다정한 마음과 지극한 태도가 깃들어 있지요. 당나귀가 당근을 아삭아삭 씹어 먹듯이 당신의 편지를 찬찬히 읽을 때 내 마음은 등불을 켠 듯 환해져요.

최근 한 천문학자가 또 다른 작은 달을 찾았는데, 지름 5미터 남짓한 이 소형 위성은 지구의 인력에 끌려와 궤도를 돌고 있다지요. 이 작은 달은 언제 궤도를 벗어나 우주 저편으로 날아갈지 모릅니다. 큰 행성 주변 궤도를 하염없이 도는 위성같이 우리는 사랑이라는 자장(磁場) 안에 서로의 궤도를 돌겠지요. 우리가 소나무나 박테리아가 아니라 사람으로 사람의 일을 도모하며 사는 건 기적이지요. 사랑은 사람의 일 중에서 으뜸으로 꼽을 만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 사랑의 힘을 우연의 일과 재난을 견디며 살아갈 동력으로 삼겠지요. 내 마음이 온종일 머무는 거기에 늘 당신이 있기를!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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