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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쓸 때는 이순신이 돼야 하듯 주인공 영혼과 접신”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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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5-01 10:38:24 수정 : 2021-05-01 10:3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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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의 대호’ 김탁환 작가

25년간 ‘불멸의 이순신’ 등 30편 펴내
길게 구상하지만 쓸수 있겠다 생각땐
확 달려들어 2∼3년 안에 집중해 집필

신작 ‘당신이 어떻게…’ 7년이나 구상
여성CEO 중심 패션업계 이야기 담아
작품 위해 1년간 매주 가방회사 찾아

내가 추구하는 문학의 핵심은 다정함
다정함이 공감 낳고 결국 사람도 살려
장편 취재는 자신의 무식함 깨닫는 과정
1996년 첫 장편을 펴낸 이래 25년간 장편소설만 무려 30편, 권수로는 60여권을 펴낸 김탁환 작가는 “장편은 늘 하드한 일”이라며 “머리만 굴려 쓸 수 있는 세계가 결코 아니다. 제대로 장편을 쓰려면 몸과 마음을 다 써야 한다. 늘 새로운 질문을 하고 새 세계를 보여줘야 하는 장편의 세계는 쌓이는 세계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재문 기자

‘지금 뭔가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평생 소설만 읽다가 죽겠구나.’ 1995년 어느 비 오는 날 오전, 진해 해군사관학교 앞바다를 바라보던 국어교관 김탁환에게 문뜩 한 생각이 피어났다. 학사장교로 입대해 매일 오전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출근한 그였다. 대학 선후배나 동료들은 여전히 소설을 읽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 역시 그럴 터였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연구자들끼리 팀을 이뤄 조선 후기의 ‘대소설’(지금의 대하소설)을 읽어왔다. 5년간 200∼300권 정도. 그가 애초 상정한 인생 행로는 해사 교관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고전문학 교수가 되는 길이었다. 함께 소설을 읽던 선후배 역시 대체로 그러했다. 그 순간 그를 뒤흔든 건 한 생각이었다. ‘혹시 나에게 소설 쓰는 재능이 있다면, 한번 써볼까.’

김탁환에게 ‘한번 써볼까’의 대상은 단편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자신이 내내 읽어온 장편 또는 대하소설을 의미했다. 그때부터 퇴근 후에 흑백다방 등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군 복무 중 원고지 4000장을 쓰고 제대한 뒤 나머지 원고를 완성해 1998년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을 펴냈다. 책은 큰 인기를 끌었고, 드라마로도 제작되면서 그를 학자의 길이 아닌 소설가의 길로 끌고 가버렸다.

그는 이후 평균적으로 매년 책을 한 편 이상 내는 식으로 25년간 무려 30편(권수로는 60여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그의 작품 ‘불멸의 이순신’ ‘나, 황진이’ 등은 드라마로 제작됐고, ‘열녀문의 비밀’ ‘노서아가비’ 등은 영화로 제작됐다. ‘역사소설의 대가’, ‘대표적인 장편소설 작가’, ‘장편소설의 대호’ 등 다양한 상찬이 붙었지만, 그 역시 수많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김탁환은 왜 장편소설에 매혹됐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장편을 꾸준히 써낼 수 있었을까. 앞으로 그가 펼쳐 보일 장편 세상은 어떤 것일까. 지난달 장편소설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전2권, 해냄) 출간을 핑계로 그를 지난 26일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하얀 셔츠에 머리까지 하얗게 샌, 하지만 다정한 그와 마주 앉아 문학의 대지를 함께 내달렸다.

신작은 자신만의 속도를 꿈꾸는 열정적인 본질주의자 유다정이 일과 사랑을 매개로 욕망하고 갈등하면서 한 뼘 더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독고찬의 청혼을 거절한 후 자신의 꿈이던 가방을 만들며 승승장구하던 다정은 더 큰 성장을 위해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가방을 만들어주는 오더메이드 서비스 ‘트로이 프로젝트’를 시작하지만 첫 고객 아서를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꿈꾸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1권, 30쪽)고 했는데, 이번 신작은 어떻게 시작됐는가.

“이번 작업은 크게 보면 주제가 2개였다. 하나는 꼭 써보고 싶은 주제였던 의식주 가운데 무엇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책 제목이 나타내듯이 만남이었다. 사람이 산다는 건 만나는 문제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어쩌다가 이 인간을 만났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만남이란 큰 주제와 의(衣)의 문제가 합쳐져서 이런 형식으로 나온 것이다.”

―주인공 유다정은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어떤 인물인지 조금 설명해 달라.

“유다정은 자본주의의 꽃인, 오랜 역사의 패션 산업에서 세계적인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꿈꾸는 회사의 대표이다. 질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성장하려는, 자연을 가방 안으로 녹이려고 하는 무모한 본질주의자이다. 패션업계 여성 CEO로서 나중에 업적을 이룬다면 유리천장을 깬 성공사례일 수도 있다. 피해자로서의 여성에 머물지 않고, 그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지독한 경험주의자’(2권, 351쪽)라는 말처럼, 작품을 위해 1년간 매주 가방회사를 찾았다고 하던데. 디테일한 묘사나 문장도 돋보인다.

“작품을 보면 가방이나 옷 등 머리에서 발끝까지 브랜드가 나오는데, 남성 독자들에겐 암호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유다정은 패션업계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기에 그의 입장에선 이렇게 얘기해야 진짜인 것이다. 물론 제가 이것을 처음부터 알았을 리가 없다. (배경이) 현대가 됐던 조선 시대가 됐던, 풍속을 제대로 그리는 게 장편이다. 관념을 쓰는 것이 아니고, 관념을 쓰기 위해서라도 주인공의 삶의 현장이나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는지 등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그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지하철을 한 시간 넘게 타고 가방회사 ‘아서앤그레이스’를 찾아갔다. 가죽을 만든 장인들을 만나서 어떻게 만드는 것도 보고, 만든 것이 어떻게 전시되는지도 봤다. 다음 날 오전 백화점이 개장하기 전 매장 세팅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실제로 서울의 어느 백화점에서 밤샘을 하기도 했다.”

진해 출신으로 서울대 국문학과 학사와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한 김탁환은 1994년 계간문예지 ‘상상’에 평론 ‘동아시아 소설의 힘’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1996년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이야기’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활동했다. 데뷔 이후 ‘불멸의 이순신’을 비롯해 장편만 30편 60권 이상을 쏟아냈다.

―데뷔 이후 엄청난 속도로 많은 장편을 쏟아냈다, 이유나 배경이 무엇이었나.

“처음 서른 살에서 마흔 살까지는 교수이면서 작가인 조건에서 최대한 많이 쓰자고 생각했다. 제 또래 가운데 문운이 있는 친구들은 20대 초반에 작가가 됐지만, 나는 작가에 뜻이 없다가 서른이 다 돼 뒤늦게 소설가가 됐으니까. 바둑기사 서봉수님을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처럼 실전에서 일단 많이 써보고 배워가자고 생각했다. 서봉수는 처음 조훈현과 대결할 때에는 승률 차이가 컸다. 그는 계속 지면서도 대결을 이어가며 실력을 키웠고 나중에는 조훈현의 타이틀 일부를 빼앗으며 한국의 대표 기사가 됐다. 이를테면 ‘잡초 바둑’이었다. 스토리가 막히고 인물에 문제가 생겨 실패하면서도 계속 썼다. 써보니 300∼400년 된 장편 소설의 역사가 있더라. 이런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장편을 쓰겠다는 건 시건방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10년간 쓰면서 배우자고 생각했고, 최대한 다양한 장르들을 써나갔다.”

해군사관학교 국어교수를 거쳐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카이스트(KAIST) 문화기술대학원 부교수 등으로 재직했던 그는 2009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의 문학세계도 바뀌었다. 질문이나 주제 의식은 커진 반면 작품 양은 확 줄었다. ‘밀림무정’ ‘혁명-광활한 인간 정도전’ ‘뱅크’ 등이 이 시기 대표 작품이다.

“마흔 살이 되니까 장편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장편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죽음, 선과 악, 의식주,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 클래식한 주제, 유행을 타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더라도 인류가 반복해서 하는 질문들, 몇만 년 동안 반복되고 인류와 함께 하는 질문들을 잡고 전력투구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오십 살까지 작품 네 편만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2년 반에 작품 하나 정도 쓰더라.”

2014년 4월,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그의 삶과 문학인생도 요동쳤다. 당초 의식주, 즉 무엇을 입고 어떻게 먹고 어디서 살 것인가에 관해 쓰려던 그는 ‘거짓말이다’, ‘살아야겠다’ 등 소위 ‘사회파 소설’을 집중적으로 쓰게 됐다.

시간이 흘러 당초 계획한 대로 돌아가려 했지만, 쉽게 돌아오진 못했다. 조선 영조시대의 광대 ‘달문’을 모티브로 한 장편 ‘이토록 고고한 연예’와 ‘대소설의 시대’를 쓰면서 자신의 트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특히 ‘대소설의 시대’를 쓰면서 18, 19세기 대소설의 시대와 화해하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김탁환은 문학인생 제4막의 초입에 서 있다. 지난해 의식주 문제 가운데 농업과 생태의 문제, 환경 먹거리 문제를 다룬 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와 이번 장편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는 그 4막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쯤 될 터다.

―추구하는 문학은 무엇인가.

“내 문학은 다정이라는 것이 핵심이구나, 이런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 다정함이 공감을 낳고, 공감이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 같다. 작년 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쓸 때, 농부 이동현씨가 쌀에 감정이입을 하더라. 아침마다 벼에 가서 인사하고 오늘은 햇살이 세니 물을 대줄게, 이렇게 다정하게 설명하더라. 그걸 보고 지금까지 사람에게만 저런 마음을 가졌는데 앞으론 나도 다른 생명체에게도 가져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내가 현장에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정과 자유가 저의 제일 큰 화두다.”

―“정확하게 쓰는 건 참으로 어렵소”(2권, 11쪽)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고 쓰는가, ‘김탁환표 장편’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가.

“저는 구상을 길게 하는데, 문제의식이 닦아졌고 이제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면 확 달려들어서 2, 3년 안에 집중해 집필하는 스타일이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도 써볼까 하고 생각한 것은 7년 정도 된 것 같고, 지금 쓰고 있는 작품도 5년 이상 구상을 했다. 이순신을 쓸 때는 이순신이 돼야 하듯이, 주인공의 영혼과 제 영혼이 접신해야 한다. 그것은 심장을 바꿔 끼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작년까지 농부의 심장이었다면 이번 작업을 할 때는 가방회사 여사장의 심장이었다. 하나의 심장으로 살면 어렵지 않지만, 작업할 때마다 심장을 바꿔 끼워야 하는 건 고통스럽다.”

다음 작품을 위해 요즘 서울과 곡성 작업실을 왕래하고 있다는 그는 장편 작가의 태도랄까 자세를 강조했다. “장편을 쓰기 위한 취재 과정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 좋지 않기도 하면서도 또 좋다. 이십여 년 소설을 썼지만 40여 년 가방을 만든 장인 앞에 서면 문외한이 된다. 하나도 모르는 세상이 있구나, 하고 작업을 할 때마다 느낀다. 계속 무너지는데, 무너지는 게 너무 좋다.”

요컨대 발자크 같은 방대한 소설 세상을 꿈꾸는 김탁환이 장편소설의 대가가 된 데에는 오랜 구상과 치밀한 취재, 지치지 않고 밀고 가는 성실함, 음악까지도 관리하는 습관 등이 어우러진 장인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화는 없고, ‘소설노동자 김탁환’이 있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소설가 김탁환은 ●1968년 진해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해군사관학교 국어교수,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부교수 등 역임 ●1994년 ‘상상’에 평론 ‘동아시아 소설의 힘’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1996년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이야기’를 출간하며 소설가로 활동 시작 ●문화계간지 ‘상상’ 편집위원, 문화계간지 ‘1/n’ 주간, 창작집단 ‘싸목싸목’ 대표 등 역임 ●작품으로 장편 ‘불멸의 이순신’ ‘허균, 최후의 19일’ ‘나, 황진이’ ‘열녀문의 비밀’ ‘노서아가비’ ‘밀림무정’ ‘혁명-광활한 인간 정도전’ ‘뱅크’ ‘거짓말이다’ ‘대장 김창수’ ‘대소설의 시대’ 등이, 평론집 ‘소설 중독’ ‘진정성 너머의 세계’ ‘한국 소설 창작 방법 연구’ 등이, 산문집으로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김탁환의 쉐이크’ 등이 있음 ●요산김정한문학상(2016), 카멜레온문학상(201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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