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희귀 고려불화 포함
비지정문화재 많아 활용폭 커져

무려 2만1600여 점이다. 28일 삼성이 발표한 이건희 컬렉션 기증이 ‘역대 최대 규모의 기증’임을 확인하는 숫자다. 이 중 국보(14점)와 보물(46점)이 60점이라는 사실은 질적으로 역대 최고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기증품 대부분인 비지정문화재는 우리 역사의 전 시대, 전 분야를 망라한다. 기증품을 받게 된 국립중앙박물관(중박)은 소장품의 양과 질을 한층 보강해 활용과 연구의 폭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가장 눈에 띄는 기증품은 정선의 말년작인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다. 가로 138.2㎝, 세로 79.2㎝ 크기의 대작으로 정선의 400여 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며 ‘금강전도’(〃 제217호)와 함께 조선후기에 꽃피운 진경문화를 상징하는 걸작이다. 동국대 최응천 교수는 “국립박물관에 화첩 등의 소품은 있었으나 인왕제색도 같은 정선의 대작은 없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소품들과 함께 전시하면 ‘겸재 정선의 방’ 같은 독립된 전시실을 꾸밀 수도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기증으로 중박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분야의 소장품을 확충했다는 점에서 보면 고려불화인 ‘고려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수월관음도’(비지정문화재)의 존재가 두드러진다. 고려불화는 예술성, 희귀성면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문화재지만 중박에는 2016년 기증받은 1점뿐이다. 이마저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아 아쉬움이 컸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제대로 된 고려불화가 없다는 ‘수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중박에는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기증품 2만1600여 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지정문화재는 국내외 전시를 통한 활용 폭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중박은 분청사기, 목가구에 일단 주목하고 있다. 중박 윤성용 학예연구실장은 “국내외 전시에서 수요가 많았지만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는데, 이번 기증으로 활용 폭이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기증의 의미는 이건희 컬렉션을 소장, 관리한 리움미술관이 최근 몇 년간 특히 고미술 분야에서 이전에 비해 크게 활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활용, 연구를 재차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서원대 이광표 교수는 “최근 리움미술관은 기본적인 전시만 진행해 대중과의 소통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었던 게 사실”이라며 “국립박물관이 민간기관에 비해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관련 전시, 연구가 보다 활발해 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중섭·박수근 등 작품 ‘작가 고향’ 간다
삼성측이 28일 발표한 사회환원 내역 가운데 미술품은 서울과 대구, 광주, 전남, 강원, 제주로 분산돼 기부된다.
이날 삼성 발표에 따르면, 기부 미술품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나룻배’ 등 한국 근대미술의 대표작과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등이 포함됐으며, 드로잉 등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 총 1600여점이다.

이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에 가장 많은 1226건(1400여 점)이 기증된다. 세부적으로는 김환기, 나혜석, 박수근, 이인성, 이중섭 등 한국 대표 근대미술품 460여 점이다. 세계적인 서양 거장 작품은 모네와 고갱, 르누아르, 피사로, 샤갈, 달리의 회화 작품과 피카소의 도자 작품 112점 등 총 119점이다. 한국 현대작품들이 720여 점이다.
미술관 측은 “회화 이외에도 판화, 소묘, 공예, 조각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근현대미술사를 망라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규모는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 이래 이번 기증품을 포함해 현재까지 총 1만200여 점의 작품을 수집했고, 이 중 5400여 점이 기증품이다. 역대 기증품 중 26%가 이번 한 번에 마련된 셈이다.

미술관 측은 “그동안 희소가치가 높고 수집조차 어려웠던 근대미술작품을 보강하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 근대미술사 전시와 연구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지역 박물관에 약 20점씩 기부된다. 삼성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이 처음으로 삼성을 일궜던 대구를 비롯해 작가 출신지별로 기부가 이뤄졌다. 최근 문을 연 신생 미술관인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제주도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에 이중섭 작품이, 강원도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는 박수근 작품이 간다.
전남도립미술관의 이지호 관장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예산도 예산이지만, 이런 우수작은 시중에 나오지 않아 더 귀하고,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사는 건 정말 힘들다”며 “지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정작업만 2∼3개월… 삼성, 작품 운반차량도 직접 준비
“굉장히 깔끔했다.”
국립중앙박물관(중박) 관계자가 이건희 컬렉션 중 고미술품 2만1600여 점을 기증받는 과정에서 삼성 측의 태도를 평가하며 한 말이다. 기증에 따른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않았고, 기증품 운반 차량까지 직접 준비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삼성 측에서 중박에 기증 의사를 처음 전달한 것은 올해 초라고 한다. 삼성문화재단 고위관계자를 통해서였다. 외부로 공표되진 않더라도 기증자는 독립 전시실 마련, 특별전 개최, 연구서 발간 등의 조건을 내거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번에는 전혀 없었다. 삼성 측이 요구한 단 한 가지는 “우리가 발표할 때까지 보안을 유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삼성과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한 이후 한동안 중박은 관장, 학예연구실장, 유물관리부장 정도만이 이런 사실을 공유했다. 또 기증될 것이란 사실이 알려진 후 언론의 문의가 빗발쳤지만 “아는 게 없다” 혹은 “공식적인 협의는 없었다” 등으로 ‘모르쇠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협의 과정에서 중박도 삼성에 특별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일종의 거간을 자처한 문화재계 인사가 찾아와 “기증을 바라는 유물을 말해주면 삼성에 전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고, 기증품을 선정하는 데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기증품 선정에 지나치게 관여해서) 국가가 삼성에 기증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 “국가기관인 중박이 삼성에 특정 유물을 간청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런 방침에 따라 삼성이 정한 기증품을 정하고, 그 목록을 보낸 뒤에야 중박 직원들이 실사에 나섰다. 다만 “널리 알려진 유물이 포함되지 않을 경우 기증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는 판단은 전했다고 한다. 국보, 보물 60점이 포함된 전례없는 기증이 이루어진 것은 중박의 이런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증 사실은 28일 공표되었지만, 기증품이 중박 수장고로 운반이 시작된 건 지난 20일 즈음부터였다. 이런 일정은 운반 차량 섭외 어려움 등의 중박이 준비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으나 삼성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해결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은 이번 기증 업무 전반을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에 맡겼다. 감정 작업은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는 보안각서를 쓴 전문가에 의해 이뤄졌다. 철저한 보안을 지키려 했으나 소문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감정 작업은 전문단체가 세 곳이나 나섰음에도 수장고를 전부 도는 데 두세 달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미술계 일부에선 이건희 컬렉션이 결국 쪼개져 기부되는 것에 “컬렉션 완성도가 훼손됐다”며 아쉬움도 나타낸다.
◆‘이건희 컬렉션’ 6월부터 일반 공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8일 “한국 문화예술계 발전을 위해 평생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을 기증해주신 고 이건희 회장 유족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사상 최대 규모의 문화재·미술품 국가기증이 이뤄진 이날 황 장관은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관련 브리핑을 열어 이같이 밝혔다. 황 장관은 “이번 기증은 국내 문화자산의 안정적인 보존과 국민의 문화 향유권 제고, 지역의 박물관·미술관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다양한 문화 관련 사업 기획과 추진에 있어 상승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막대한 컬렉션을 기증받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6월부터 이를 순차적으로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6월에 대표 기증품을 선별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문화재 특별공개전’(가제)을 열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8월 서울관에서 ‘고 이건희 회장 소장 명품전’(〃) 개최를 시작으로, 9월에 과천, 내년 청주 등에서 특별 전시와 상설 전시를 통해 작품을 공개한다.
방대한 기증품을 먼저 연구, 조사한 후에야 일반 전시가 가능한 만큼 우선 이 같은 특별전으로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국민 관심을 충족시킨 후 점차적으로 가장 많은 발길이 닿는 일반 상설 전시관에 중요 작품을 전시한다는 계획이다. 또 정부는 중장기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을 ‘이건희 컬렉션’이란 브랜드로 묶어 국가문화자산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황 장관은 “(이건희 컬렉션을 소장하게 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삼성 출연재단은 하나의 패키지로 봐야 한다. 국내외 전시에서 공동 마케팅을 할 수도 있고 소장품을 모아 한군데서 전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기증을 계기로 가뜩이나 부족한 전시공간과 수장고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미술관 내지 전시관 건립 가능성도 제기된다. 황 장관은 “수장고도 부족하고 미술관도 건립을 검토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그 과정에서 근현대 미술관으로 구성할지 기증자 컬렉션 중심으로 묶을 것인지는 즉답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쳐 고인의 훌륭한 뜻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과 연계 가능성에 대해선 “이건희 회장의 훌륭한 정신을 유족이 실현한다는 차원에서 순수하게 받아줬으면 좋겠다. 사면은 별개의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강구열·김예진·박성준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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