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검사 회당 500만원…치료비 한 명당 최고 수억원
3000억 기부, 문제 해결 보탬 되겠다는 유족들 희망 반영
의료계 “어린이 환자들에 대한 지원·기부 확산 계기 될 것”

“5살, 6살 어린이들이 생활할 텐데 가구 모서리가 각이 져서는 안된다. 하루 급식의 칼로리가 얼마나 되느냐?”
1989년 어린이집 건설 현장을 찾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이렇게 어린이에 대한 살뜰한 정을 드러냈다. 이런 이 회장의 생전 유지가 유족들의 소아암·희귀질환 환아와 그 가족들의 어려움을 돕는 3000억원 기부 결정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이 회장 유족의 지원 방안 중 핵심은 치료 방법이 있으나 고가의 진단·치료비로 인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숨지는 환아들에 대해서는 실질적 비용 지원을 해주고, 나아가 치료제 개발 연구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28일 이런 결정이 전해진 뒤 의료계에서는 정부 정책과 예산만으로는 소아암·희귀질환 환아에 대한 지원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민간의 동참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이번 삼성가의 기부는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의료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에서도 고액의 진단비와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매년 수백명의 소아암·희귀질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한해 소아암에 걸리는 어린이가 약 1300명에 달하고,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어린이가 약 400명으로 추산된다.
또한 약 8만명의 어린이가 희귀질환을 앓고 있고, 매년 약 200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소아암의 경우 10만명당 16명이 발생하며, 국내 어린이 질병사망 원인 1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소아암·희귀질환 환아에 대한 복지 시스템은 충분하지 않아 빈곤층은 물론 중산층도 경제적 부담과 함께 간병에 수반되는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 등으로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아암 환자들의 통합 유전자 검사는 회당 500만원에 달하며, 유전자 치료나 골수 이식 등 희귀질환 치료비는 한 명당 최고 수억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중증 소아암·희귀질환 환아에 대한 전문적인 치료가 가능한 국내 어린이 병원은 전국에 43개가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11개 대형병원(서울 5개)이 환아의 80%를 치료하고 있으며, 이들 병원이 확보하고 있는 소아암·희귀질환 전문의는 약 100명에 불과할 정도로 치료 인력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그나마 국내 최대 규모(315병상)의 어린이 병원인 서울대어린이병원의 경우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상당수 병원은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중증 환아 치료를 위한 거점병원 지정을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소아암·희귀질환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연구개발(R&D) 투자가 필수적이나 진료 대상이 소수라는 한계로 재원 확보와 인프라 구축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내에는 민간 학회인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가 사실상 유일한 인프라일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관련 R&D 활동은 진행되지 않고 있다. 국가 지원으로 희귀질환 분야의 임상 연구가 진행되는 대만이나 국립보건원(NIH) 산하에 희귀질환 관련 중앙·지역 센터가 설치돼 연구 인프라를 확보한 미국과 대비되는 현실이다.
이 회장 유족이 소아암(13종, 약 1만2000명)·희귀질환(14종, 약 5000명)의 진단과 치료에 2100억원,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지원 등에 900억원을 기부하기로 한 것은 이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겠다는 유족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소아암의 경우 치료 종결 후 생존율이 75~80%로 높은 편이어서 조기에 발견해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의료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 유족들의 기부로 소아암·희귀질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의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이 환자들에 대한 민간 차원의 지원·기부가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기천 기자 n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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