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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평한 글에서 재미난 비평을 읽었다. 설국열차를 보고 마르크스주의자는 기차가 얼음을 뚫고 앞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라고 말하고, 신화학자는 기차가 지구를 순환하면서 1년에 한 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말하며, 프로이트주의자는 기차가 절정의 순간에 폭발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고 해서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왜들 이렇게 해석이 다르고 다양한 것일까. 카프카의 경우에도 작품이 많지 않아도 해석은 수없이 많다.

미국의 문화비평가 수전 손태그는 ‘해석에 반대한다’라는 에세이를 통해 예술에 관한 해석의 과잉상태를 비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이것저것 파고들면서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고 내용에 가치나 철학을 덧붙인다. 그래서 작품 하나에 온갖 의미가 붙어 해석이 늘어난다. 이렇게 해석이 늘어난 데에는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본 고대 예술론도 한몫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예술은 현실의 모방인데 현실조차 본질(이데아)을 모방한 것이니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본질을 찾자면 작품을 분해하고 핵심 요소를 뽑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럼, 수전 손태그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녀는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인식하고 경험할 것을 요구했다.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식과 논리가 아니라 예술을 그 자체로 인식하는 감수성이다. 예술은 원래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인데 해석자는 예술을 쉽고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해석보다 예술의 반짝임을 그 자체에서 경험하는 것, 예술에 관한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전 손태그가 형식과 내용을 초월한 ‘스타일’을 강조하는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어려운 현대 미술이나 전위 작품을 만날 때 우리가 이런 감수성을 발현할 수가 있을까.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에서 보듯 현대 예술은 보는 사람에게는 난해하고 어렵다. ‘샘’만 보더라도 남성용 변기에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일상 제품 자체가 예술적 오브제로 사용되는 지금, 예술에 관한 새로운 개념, 새로운 정체성이 범람한다. 지금 우리가 쉽게 작품을 향유하기에는 감수성이 무디거나, 아니면 작품이 너무 어렵다. 수전 손태그는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라고 했지만 가끔 우리는 그런 복수를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정희모 연세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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