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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건너는데 우회전車 ‘불쑥’… 보행자 안전 ‘빨간불’ [밀착취재]

입력 : 2021-04-08 07:00:00 수정 : 2021-04-08 03: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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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정지 의무화’ 강화 방안 실효성 의구심
사람들 길 건널 때 진입 불가에도
10번 중 8번 차량들 멋대로 통과
정부 ‘건너려 할 때도’ 정지 추진
전문가 “지금도 잘 안 지키는데…
캠페인 등 통해 인식 개선 나서야”
지난달 31일 서울 은평구 새절역 사거리에서 한 시민이 보행신호에 따라 길을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를 한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이지안 기자

지난달 31일 오전 9시 서울 은평구 새절역 사거리. 보행자 4명이 보행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지만 마을버스는 잠시 서는 기색도 없이 바로 우회전하며 이들 앞을 스쳐 지나갔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 보행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행 신호가 한참 남아 있고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음에도 우회전하는 차량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의 ‘보행자 보호 의무 준수 단속’ 현장을 동행 취재해보니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도 우회전 차량이 멈추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보행자들은 아슬아슬하게 차량을 ‘피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7일 경찰에 따르면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는 운전자는 도로교통법에 따라 횡단보도에 사람이 없을 경우엔 서행하며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보행자가 길을 건너고 있을 때는 횡단보도에 진입할 수 없다. 만약 이를 어기고 보행자와 사고가 날 경우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의 12대 중과실(보행자 보호의무 위반)에 해당된다.

정부는 보행자 보호를 위해 우회전 차량의 정지 의무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올해 말까지 도로교통법 시행 규칙을 개정해 우회전 때도 횡단보도 앞에서 무조건 일시정지하는 의무를 부과할 계획이다. 현행법상 ‘보행자를 주의하라’는 규정의 구속력이 부족한 데다 단속도 어려워 아예 일시정지를 의무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도로에서 확인한 결과 보행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있는데도 정지의무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은평구 새절역 앞 교차로에서 신호 열 번이 바뀌는 동안 우회전 차들이 보행자를 보고 멈추는 경우는 두번에 그쳤다. 대부분 차량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보고도 거리낌 없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인근의 또 다른 교차로 상황도 비슷했다. 보행 신호에 3∼4대가 연달아 횡단보도를 지나가면서 길을 건너던 사람들이 차를 피해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끊이지 않는 우회전 차량 행렬에 아예 길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교차로에서 만난 김모(46)씨는 “이곳에서 길을 건널 때마다 우회전 차량 때문에 항상 긴장한다. 부딪힐 뻔한 적도 여러 번”이라며 “아이들에게도 항상 조심하라고 말한다”고 토로했다. 경찰 관계자는 “우리 운전 문화 자체가 차량 흐름을 중시하는 경향이 크다. 우회전 시 보행자 보호의무를 지키는 차가 있으면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기 일쑤”라며 “횡단보도에서도 보행자를 배려하는 문화가 부족하다”고 전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의 경우 현행법은 ‘보행자가 건너고 있을 때’만 정지의무가 있지만, 정부는 상반기 안에 ‘보행자가 건너려고 할 때’도 일시정지 의무를 부과하는 등 전반적으로 운전자의 정지 규정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현재 규정조차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규정만 강화할 경우 실효성이 없을 것이란 목소리도 높다. 전문가들은 규정 강화에 앞서 인식 개선 캠페인 등을 통해 운전자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신호등이 없어도 운전자들이 정지 표지판이 보이면 무조건 멈추도록 체득하게 한다”며 “우리나라는 일시 정지 문화를 체득시키기보다 신호등만 남발해 운전자 사이에서 신호 체계가 불합리하다고 인식한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운전자들이 오히려 신호등을 무시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일시 정지 의무 법규만 강화하면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며 “법 개정만 밀어붙일 게 아니라 대대적으로 대국민 캠페인 등을 벌여 인식 개선부터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지원·이지안 기자 g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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