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고 채현국 “세상은 잠시 빌려 사는 곳”

입력 : 2021-04-08 03:00:00 수정 : 2021-04-08 11:39:5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건달 할배’ 채현국 이사장을 추모하며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부자의 삶

1. 1985년 봄

 

철학은 배우기도 어렵지만, 배운 대로 살기도 참 곤란한 학문이다. 대학 입학 후, 서울 성북구 정릉의 한 허름한 단독주택에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대선배를 처음 만났다. 입학 동기가 바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녹슨 페인트가 푸른곰팡이처럼 돋아난 철제 대문을 열고, 잡초가 엉킨 마당을 지나 군데군데 판화가 걸린 고택 거실에서 대선배가 건넨 첫 마디는 “담배 있으신가?”였다. 안경 너머로 책을 보던 한 중년 사내가 아들 친구에게 던진 초면 인사다. 머뭇거리자 날아오는 독설, “거지 놈들, 담배도 없이 남의 집에 오다니...”

 

그 시절 친구 아버지와의 맞담배질은 금기에 가까웠지만, ‘건달 아저씨’ 앞에서 우스울 만큼 허무하게 깨졌다. 술을 마실 때, 고개를 돌리는 식의 형식적인 예의조차 곧 사라졌다. 50년대 학번, 30년 선배와 격의 없는 술자리를 가졌지만, 대화를 섞을수록 조심스러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동서양의 고전과 역사서, 예술 이야기가 줄줄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새내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언변이 아니었다. 흔히 철학과 초년생이 입버릇처럼 되뇌는 ‘진리’, ‘본질’, ‘옳고 그름’ 따위의 단어를 ‘개수작’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문인이나 교수, 예술가 등이 입담에 오르고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그들’이 아니고,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그놈’이어서 의아스러웠다.

 

대화는 한국을 떠나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를 오갔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이분법을 혐오했지만, 군사독재는 끔찍하게 미워했다. 눈을 돌려 둘러본 계단은 온통 물건이 쌓여 제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계단을 켜켜이 채워놓은 것은 먼지가 아니라, 먼지처럼 쌓인 책들의 향연이었다. 인문, 사회, 역사, 예술, 과학 등 계단 한 칸에 쌓아 놓은 책이 내가 그때까지 읽은 책보다 많다는 느낌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아마 2층 다락의 서재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퉁기쳐 나온 책들일 것이다. 군데군데 한발 정도 디딜 공간은 용케 남아있어 그 사이사이로 걸어 다닐 수는 있었다.

 

대학 시절, 친구 집을 오가면서 건달 아저씨에게 받은 인상은 선친에게 물려받은 연탄공장 정도를 운영하다, 철학과 출신답게 순식간에 말아먹은 백수에 가까웠다. 철학 못지않게 석탄에 대한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 욕심과 독서량이 많은 고학력 백수, 타고난 언변에 독서량이 더해져 듣는 이의 두뇌 처리 용량을 뛰어넘는 언어를 순식간에 뱉어내는 달변가, 그리고 젊은 철학도의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는 ‘소크라테스’였다. 더구나 신문에서 주워들은 유명 인사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이놈 저놈’ 평가를 해댈 때에는, ‘방안 여포’라는 의심마저 들락날락했다. 군사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발행된 창작과 비평 영인본을 할부로 사던 대학생이, 맞담배를 피며 앞에 앉은 아저씨가 설마 창비 설립 초기에 출판 비용을 조달했으며, 기라성 같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대부(代父)라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

 

2. 2015년 봄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많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며, 아이를 키우고 나도 중년이 되었다. 사람은 자신이 태어날 사회를 고를 수 없지만, 사회는 사람을 걸러낸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걸러지지 않기 위해 숨 가쁘게 뛰다보니 중년을 훌쩍 넘어섰다.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을 한다고 해서 구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그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학시절 배운, ‘존재’, ‘실존’, ‘결단’, 이따위 단어들은 루저 인생을 가르키는 이정표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카프카는 소설 ‘변신’에서 루저를 벌레로 형상화했을까.

 

이 시기에 대학 동기의 밴드에 뉴스가 올랐다. 후속 기사의 형식을 띈 풍운아 채현국, ‘건달 할배’ 이야기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왜 그동안 보지 못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많은 기사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일간지에서 뽑은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는 제목을 보고, 그 화법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분명히 ‘늙은 놈들이 저 따위’라고 말했을 텐데, 순화한 표현이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기사를 보면서 많은 오해가 풀렸고, 친구 놈 입이 참 무겁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연탄공장을 말아 먹은 것이 아니라, 한때 탄광을 운영하면서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지만, 다 퍼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친구처럼 이놈 저놈 하던 사람들은 창비의 문인과 해직기자, 유신시절의 수배자였다. 시골구석 서당이라던 효암학원은 검색해보니 경남 양산의 대표적인 명문 중고교였다. 다만, 효암고 정문의 깨진 돌에 쓰인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말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단 맛만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실수로 철학과를 갈 수는 있지만, 철학과를 나와서도 철학책을 읽지는 않는다. 학교에서 작업복을 입고 다닌다는 사실도 새롭지 않았다. 그 아들인 친구를 통해 이미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백수라는 사실은 그제나 이제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어두운 시절을 지켜온 ‘하얀 손’이라는 사실을 처음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3. 2019년 봄

 

첫 역사서를 기획하면서 남해안을 돌다 친구와 함께 효암고 이사장 숙소를 들러 인사를 드렸다. 과거 등사실로 쓰이던 작업실에 칸막이를 쳐 두 칸으로 나눈 탓에 좁다란 숙직실을 연상시킨다. 한 칸에는 여지없이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앉은뱅이 책상과 담요가 놓여있다. 서가에는 고대 역사서가 가득 꽂혀 있었다. 다른 한 방이 이사장의 숙소였다. 그리고 이 때 아들 채윤하가 효암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자신의 기억력이 깜박깜박해서 업무 처리에 실수가 있을까, 두렵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동북 공정에 대한 날선 비판과, 벽초 홍명희의 임거정,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대해서도 역시 달변을 쏟아 내었다. 임거정에 나오는 등장인물 캐릭터를 줄줄이 꿰면서, 민중의 삶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건달 할배’는 건재했고, 30년전 정릉에서 들었던 삶의 가치관 또한 흔들림이 없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했지만, 지난 30년이 공허하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새롭게 효암학원이사장에 오른 채윤하이사장 또한 동기들 사이에서 ‘탈구조적인 인물’로 통한다. 쉽게 말해 돈벌이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영국 서섹스 대학에서 제3세계 민족 정책을 전공하고 필리핀 현지 연구원까지 거쳐 박사과정을 수료했지만, 어쩐 일인지 학위를 받지 않고 귀국했다. 이런저런 남모를 사연이 있겠지만, 해박한 지식과 활자 중독에 가까운 독서벽, 그리고 달변은 전임 이사장을 빼닮았다. 지리와 역사 지식에 정통해서 두 권의 역사서를 쓰는 과정에서 매번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팬이라고 솔직하게 토로한다. 철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자, 대뜸 ‘그딴 걸 머하러 공부하려 하느냐’면서도 얼굴에 스쳐간 흡족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눈시울을 붉힌다. 그와 가족에게 편한 아버지였지만, 결코 쉬운 아버지는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그 쉽지 않은 가르침 때문인지, 학위와 재산, 자본주의 구조에 참으로 무심하다는 면에서 부전자전(父傳子傳)이다. 이사회를 열기 위해 양산에 내려갈 때 터미널에서 산 ‘1+1 햄버거’ 하나를 아껴 들고, 허름한 이사장 숙소로 향하는 유형이다.

 

효암고에서 수십억 예산으로 기숙사를 짓던 시기, 현장 책임을 맡았던 채이사장의 형은 래미콘 한 대와 벽돌 한 장도 장부에 기록하면서 원칙대로 처리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원칙에 충실할수록 이곳저곳의 견제가 심했다고 토로했다. 부친을 닮아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건설업을 하는 다른 친구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나 혼자 짐작해 보았다. 공사비를 한 푼 에누리 없이 공사에만 쏟아 부으면, 시공 업자가 다른 건물을 지을 때 이곳저곳 비교되면서 무척 부담이 된다고 귀띔했다. 교통법규대로 운전하면 다른 운전자들이 눈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얘기다. 여하튼 무사히 공사를 마치고 효암고의 명물인 최신식 기숙사가 우뚝 서게 되었다. 전산 실습실에는 당시 최고 사양의 매킨토시가 갖추어졌다. 이사장은 배터리 수명이 다해, 전원을 빼면 화면도 꺼지는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족 미학 회원들이 발인에 앞서 진혼굿을 펼치고 있다.

 

4. 2021년 봄

 

4월 2일 오후, 친구에게 부음이 날아든다. 옛 친구들과 만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모두 중년을 넘어 희끗희끗한 백발이 무성하다. 종종 경조사에서나 안부를 전하는 나이, 자연스레 선배 채현국 이사장의 삶이 중심 화제로 떠오른다. 전대협 남북청년회담 남측대표를 맡았던 한 친구는 “가슴에서 쿵하는 소리가 난다”는 장문의 글을 올린다. 그런데 적지 않은 친구들이 부음기사를 접한 뒤에야 ‘건달 할배’가 채이사장의 부친이고, 남다른 삶을 살아온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놀란다.

 

5일 오후 충북 음성군 금왕읍 한마음 광명선원, 40여 년 전에 만난 대선배가 마지막 가는 길, 이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던 거인의 유골이 작은 오동나무 상자에 담겨졌다. 그의 말대로 세상은 잠시 빌려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곧 자신이 좋아하던 바다를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한 비구니가 “이사장님과의 소중한 인연이 고맙다”면서 나무로 만든 거북을 석탑 아래 살며시 내려놓는다. 몰래 담배 한가치를 탑 주변에 놓으며, 세상살이에 구애받지 않은 달관의 시인 천상병의 소릉조를 떠올린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는 구절이다.

 

“이승에서 베푼 모든 것이, 선배님의 저승 여비가 아니겠습니까!”

 

조진태, 난중일기 - 종군기자의 시각으로 쓴 이순신의 7년 전쟁, 저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