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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폐족이다.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이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못되겠느냐.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 되어 세련된 교양이 없으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폐족은 조상이 큰 죄를 지어 자손이 벼슬을 할 수 없는 집안이다.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정약용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학에 빠져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고, 정조가 숨진 뒤 폐족으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자식들에게 글 공부와 수양에 힘쓰라고 채찍질한 것이다. 자신 때문에 출세길이 막힌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이 왜 없었겠는가.

 

‘사화’로 일컬어지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는 폐족이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병연의 가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홍경래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반란군에 항복한 죄로 그 후손은 벼슬길이 막혔다. 유배생활을 한 정약용과 방랑생활을 한 김병연이 명저와 명시를 남긴 건 그만큼 폐족의 한이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 정치권에 폐족이란 말을 소환한 건 안희정 전 충남지사다. “친노라고 표현되어온 우리는 폐족입니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그는 2007년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민주개혁세력으로 자처해온 친노가 분열과 개혁 실패로 대선에서 참패한 데 대해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비운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친노를 부활시켰다.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인 문재인을 청와대로 입성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며 정권의 주류세력이 됐다.

 

김영환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그제 광주민주화운동증서를 반납하며 폐족이란 말을 꺼냈다. 그는 “지금 민주화의 퇴행, 특권과 반칙의 부활을 지켜보면서 과거 동지들의 위선과 변신에 대해 깊은 분노와 연민을 느낀다”며 “이제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예우나 지원이 국민의 짐이 되고 있다. 문재인정부가 운동권 세력을 폐족시킨 것”이라고 했다. 운동권 세력은 얼마나 큰 실망감을 국민에게 안겨줬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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