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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개선하자 영양왕은 그의 투구에 꽃을 꽂아주고 금은보화를 하사했다. 장군은 모든 영광을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의 귀한 백성이요, 그들의 아들이자 남편인 고구려 청년들을 수없이 전사시키고 얻은 승리를 저 개인의 공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여기 살아온 제가 아니라 산야에 쓰러져 돌아오지 못하는 용사들입니다.”

한산도대첩이 끝난 후 이순신 장군은 비통한 심정으로 붓을 잡았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였지만 장군의 마음은 죽은 병사 19명에 있었다. “본영 제2선의 진무 순천 수군 김봉수, 방답 제1선의 별군 광양 김두산, 사도 제1선의 갑사 배중지, 본영 거북선의 지방병사 사노 김말손, 흥양 격군 사노 상좌, 절의 노비 귀세, 절의 노비 말련….” 장군은 왕에게 올리는 장계에 최하층 노비의 이름과 직책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다. 나라에 목숨 바친 이들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뜻이었다.

성군 세종도 여진족 정벌에서 대승을 거두자 전사자부터 챙겼다. 나흘간의 전투에서 아군 전사자가 4명에 그친 반면 여진은 400여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세종은 그 4명을 위해 직접 제문을 짓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가족에게 편지 쓰기였다. 대개 참모들이 쓴 편지에 총리가 자필 서명하는 게 관례였으나 대처는 그러지 않았다. 여름휴가까지 반납한 채 256명의 유가족 전원에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의 마음으로 편지를 썼다.

북한 어뢰 공격으로 우리 해군 46명이 숨진 천안함 폭침사건이 터진 지 11년이 지났지만 유족의 아픔을 진심을 다해 어루만진 국가지도자는 아직 없다. 외려 유족의 가슴을 후비는 모략만 횡행한다. 한때 ‘천안함의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법석을 떨던 대통령 직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천안함의 이름까지 거북했던지 ‘○○○ 외 45명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놓인 대통령 조화는 추모 행사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치워졌다. 대한민국의 안보 현주소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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