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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무대에서 되살려낸 청년의 삶과 목소리, 음악극 ‘태일’

입력 : 2021-04-05 03:00:00 수정 : 2021-04-04 10: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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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태일’은 맑고 향기로운 작품이다. 소박한 나무 책·걸상이 놓인 무대에서 단 두 명의 배우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극적 구성을 위한 한 줌의 보탬도 뺌도 없이 온전히 그가 남긴 수기(手記)와 주변 증언만으로 전태일이 누구였고, 그가 왜 자신을 스스로 불살랐는지 보여주며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주인공 태일과 그 외 모든 역을 맡는 두 명의 배우가 전부인 극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의 고단했던 삶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어려운 가정 형편은 결국 어린 소년을 서울 길거리에서 떠돌게 하였다. 그나마 동대문 평화시장 의류 공장촌에서 태일은 비로소 한 사람의 노동자로 자리 잡게 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음악극 ‘태일’. 주인공 태일과 그 외 모든 역을 맡는 두 명의 배우가 전부이나 잊혀가던 전태일 열사의 삶과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플레이더상상 제공

평면적일 수 있는 전개는 실감 나는 대사로 생동감을 만들어낸다. “서울역 뒤에서 동대문까지 리어카 뒤를 밀어주면 30원을 받습니다. 이걸 ‘뒤밀이’라고 합니다. 늦여름 새벽비를 맞으며 뒤밀이를 하면 춥기는커녕 덥습니다. 일을 마치고 노점 구루마 포장을 들추고 들어가,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보리밥에 양배추를 집어넣고 쓴맛밖에 없는 벌건 고추장을 한 숟갈 넣어 비빕니다. 씹을 새도 없이 한 끼를 삼키면 이게 15원입니다. 다시 덕수궁에서 구두를 닦고 저녁에는 신문을 팔고, 밤이 되면 조선호텔서부터 명동 뒷골목을 쓸며 담배꽁초를 주워 팝니다.”

 

60, 70년대 도시 빈민의 하루가 마치 지금의 일처럼 눈앞에서 떠오른다. 기거할 곳 없던 태일과 모친이 지인 집 마루 밑에 가마니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 모습은 연기하는 배우나 보는 관객 모두 슬픈 상념에 빠지게 한다. 인간 전태일 면모가 드러나는 또 다른 장면은 제작진이 고민해 만들었을 법한 봉제공장 사장 처제와 저녁 식사. ‘시다-재봉보조-재봉사-재단사’라는 수직구조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재단사까지 올라간 전태일에게 사장은 처제가 저녁을 챙겨주도록 한다. 22세에 삶을 마친 전태일이 만약 남을 위한 삶 대신 자신의 소박한 행복을 선택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게 한다. 청년이 ‘현실에 충실하라’며 설레는 이를 향한 마음을 애써 잘라내는 장면은 보는 이 마음도 시리게 한다.

극은 배우들 내레이션과 대화, 그리고 노래로 진행된다. 배우 진선규·박정원·강기둥·이봉준이 ‘태일’의 목소리 역, 정운선·한보라·김국희·백은혜가 ‘태일 외’ 목소리 역으로 출연한다. 바쁘게 연기하는 내내 배우들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작은 희망을 담아 ‘촛불’을 켜고 또 켠다.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서 극 끝 무렵 무대는 일렁이는 촛불로 가득 찬다.

 

‘근로기준법’은 또 다른 주요 소품이다. 노동자 삶이 처한 현실에 눈뜨면서 태일은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법이 작동하리라는 태일의 믿음이 깨지는 과정은 과연 지금 우리는 그때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음악극으로서 ‘태일’은 ‘소년의 의문’부터 ‘내일이 되면’, ‘청옥이 좋아’, ‘마루 밑에서’,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잘했다’, ‘바보회’, ‘그렇지만’까지 모두 아홉곡을 담고 있는데 어느 하나 낭비 없이 인간 전태일 목소리 그대로 귀에 들어온다. 담백하다가 때로는 격정적으로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청년 내면을 보여준다. 이선영 작곡가는 “그분이 쓰신 글을 직접 가사로 인용하면서 오히려 내 음악이 그의 본심을 가리게 될까 걱정되었다. 먼저 그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해야만 음악을 쓸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작 곡을 쓰는 시간보다 그전에 인물에 대해 조사하고 알아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작품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7화음조차 멋 부리는 것 처럼 느껴질까 봐 조심하면서 만들어갔다”고 밝혔다. 

이처럼 ‘태일’은 창작자가 역사를 어떤 마음으로 다뤄야 하는지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발부터 산업화된 기존 공연 제작시스템에서 벗어나 보려던 작은 시도였다. ‘신뢰하는 최소한이 모여 직접 자유롭게 공연을 만들자’는 취지로 박소영 연출·이선영 작곡가·장우성 작가가 모인 창작집단 ‘목소리 프로젝트’ 첫 번째 프로젝트로 시작됐다. 2017년 서울문화재단 최초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된 후 세 차례의 소규모 공연을 거쳐 지난 2월 말부터 첫 장기공연이 시작됐다. 창작진은 “전태일의 목소리가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자칫 계몽극으로 비칠까, 또 다른 장삿속으로 변질하고 고인을 욕보이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고 한다. 다행히 상업극도 아닌 작은 촛불같은 이 작품은 ‘감동적’이란 입소문을 타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공연계가 혹독한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도  장기공연까지 하게 됐다. 덕분에 우리는 지난해 50주기를 맞은 가운데 노동운동의 영웅으로 박제돼 서서히 잊혀가던 전태일 열사의 삶과 그의 목소리를 한 번 더 생생하게 기억할 기회를 갖게 됐다. 서울 대학로 TOM2관에서 5월 2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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