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집안일은 여성 몫 아니라면서 현실은… 79% “여자가 하는 일” [심층기획 - 코로나 시대 '가사노동'의 가치]

, 세계뉴스룸

입력 : 2021-03-02 06:00:00 수정 : 2021-03-10 11:36:1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집콕’·재택근무 늘어나 노동시간 증가
男 가사 참여 ↑ 심리적 부담 줄었지만
女 51% “부담”… 男보다 2배 이상 높아
83.5% “집안일, 노동 아냐” 인식 여전
“부부가 가사노동 공평하게 분배하고
경제적 가치 제대로 평가돼야” 목소리

“진짜 속상한 게 뭔지 알아? 의사 선생님이 밥은 밥통이 해 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는데, 왜 아픈 거냐고 되레 묻잖아. 내가 요즘 별 게 다 속상해. 이상해.”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지영은 가사로 인한 우울증으로 병원을 다녀온 이야기를 남편에게 조심스레 털어놓는다. 쓰레기를 버리고 아이를 돌보는 게 자신의 인생 전부가 되어버린 김지영의 하루. 집안일을 하다 보면 아파트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남편이 퇴근한다. 자신의 삶이 가사가 되어버린 지영은 삶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경력단절과 육아 및 가사 스트레스로 끝내 그녀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가사로 인한 부부의 스트레스는 비단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중견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김소정씨는 최근 재택근무를 하며 남편과 가사분담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집에서 근무하지만 여전히 남편의 가사 참여가 부족해서다. 김씨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났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집안일을 혼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재택근무로 출퇴근 시간과 약속 시간 등이 줄어든 만큼 남편도 적극적으로 가사 생활에 참여해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코로나시대 더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면서 새삼 가사 노동의 중요성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가사 노동’은 하찮은 일이고 여성의 몫이라는 오래된 인식을 새롭게 바꿀 기회다.

◆코로나19로 늘어난 가사 “이제 가사노동은 공평하게”

“재택근무 전에는 아내가 이렇게 집안일을 많이 하는지 몰랐어요.”

대기업 과장 3년차인 이모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재택근무에 들어가면서 최근 아내의 가사 노동을 새롭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집안일은 밖에서 나가 일하는 근무보다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했는데 밥하고 설거지하는 것만 해도 큰 노동인 것 같다”며 “앞으로 가사에 적극 동참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결혼 2년차인 김모씨는 최근 아내와 가사를 두고 크게 다퉜다. 함께 재택근무를 하다 아내가 출퇴근을 시작하면서 김씨에게 가사가 몰렸기 때문이다. 김씨는 “설거지와 쓰레기 분리수거 정도를 했는데 이제는 저녁식사까지 챙기라는 아내의 이야기에 크게 화가 났다”고 말했다.

실제 5일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사 노동’ 인식조사 결과 예전에 비해서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가사 노동을 여성의 몫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시선이 강해진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여성이 느끼는 가사 노동의 부담감은 높은 것으로 조사돼 남성의 가사 참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남성보다는 여성의 ‘가사 노동’ 분담 비중이 높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확인해볼 수 있다. 평소 가정 내 가사 노동의 분담 비중을 살펴본 결과, 남성은 자신의 가사 노동 비중(42.7%)보다는 부모와 배우자 등 타인의 가사 노동 비중(57.3%)을 높게 평가한 반면 여성은 스스로의 가사 노동 비중이 더 높다(본인 비중 62.7%, 타인 비중 37.3%)고 바라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정 내 가사 노동의 분담 비중은 ‘성별에 관계 없이’ 공평하게(31.5%) 또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52.2%)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고, 대부분의 사람들(93.5%)이 이제는 더 이상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 아니라는 데 공감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여성이 짊어진 가사 노동의 짐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전체 응답자의 79.4%는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사 노동을 여성이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가사노동 부담된다 아내는 50% VS 남편은 20%

재택근무 중인 중견기업 박모 부장은 “당연히 집안일은 아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며 “집안일은 여성이 중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당연히 과거에 비해 남편의 가사는 중요하지만 남편은 가끔 도와주는 정도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 부장의 사례처럼 최근 들어 남성들의 가사 참여가 높아지면서 심리적 부담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가사의 여성 부담은 높다. 가사 노동 참여자 중에서 가사 노동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하는 응답자는 지난해 44.2%에서 올해 35.4로 줄어들었다. 다만 여성이 느끼는 가사 노동의 심리적 부담감(부담되는 편 50.9%, 부담되지 않는 편 48.3%)은 남성(부담되는 편 19.7%, 부담되지 않는 편 77.8%)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가사 노동 참여도가 더 높은 여성의 경우에는 여전히 말 못할 고충과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결혼 30년차 중년부부인 정모씨는 여전히 가사를 하찮은 일로 보는 남편 때문에 최근 크게 싸웠다. “최소한 주말만이라도 설거지를 해줄 수 없느냐”고 남편에게 이야기한 게 화근이었다. 정씨는 “맞벌이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가사를 책임지며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남편은 집에 있는 게 무슨 큰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사회가 변했다곤 하지만 개개인의 인식과는 달리 여전히 한국 사회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적이 많다. 조사자 전체 83.5%가 우리 사회는 가사 노동을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비판은 여성의 93.2%가, 남성의 73.8%가 응답해 남녀의 인식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가사 노동을 노동으로 대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이 지난해 83.8%에서 올해 83.5%라는 점에서,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가 하루아침에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것처럼 가사 노동은 아무리 해도 잘 티가 나지 않는 활동이다. 자연스럽게 가사 노동의 ‘경제적 가치’가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셀 수밖에 없었다.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자신의 책 '세탁기의 배신'에서 “맞벌이 부부라고 하더라도 아내는 남편보다 여전히 더 많은 시간을 가정을 유지하고 아이를 돌보는 데 사용하고 있다”며 “현실적 해결책으로 남편과 아내가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사노동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전지원 서울대 국제이주와포용사회센터 연구원은 “가사노동의 가치 평가는 여성들의 지위 향상뿐 아니라 해당 분야의 공공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