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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만취 블랙아웃’ 성추행 피해자, 심신상실 여부 고려해야”

입력 : 2021-02-22 06:00:00 수정 : 2021-02-22 02: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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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강제추행 혐의 2심서 무죄 받은 A씨,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대법 “제반 사정 고려 없이 ‘블랙아웃’ 이유로
‘성적 관계 동의 가능성 인정’ 타당치 않아”
‘충분한 심리 통한 심신상실 여부 판단’ 강조

성추행 피해자가 술에 취해 기억을 잃는 ‘알코올 블랙아웃’으로 범행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전후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심신상실 상태였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준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1일 밝혔다. A씨(사건 당시 28세)는 2017년 2월 새벽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우연히 만난 10대 B양을 모텔로 데려가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재판부는 “피해자와 A씨의 관계, 함께 숙박업소에 간 경위 등에 비춰볼 때 피해자가 A씨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동의했다고 볼 정황을 확인할 수 없다”면서 “이러한 제반 사정에 대한 고려 없이 블랙아웃이 발생해 피해자가 기억을 못 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건 당시 B양은 A씨를 만나기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한 시간 새 소주 2병을 마신 상태였으며, 바닥에 눕거나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등 만취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B양은 A씨를 처음 만나 2∼3분간 대화를 했고, 이들의 만남은 술자리로 이어졌다. 이후 A씨는 B양을 숙박업소에 데려간 뒤 범행을 저질렀다. 

 

B양은 A씨를 만나기 전 화장실에서 구토한 뒤 급격하게 술기운이 올라와 그 이후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반면, A씨는 B양이 숙박업소로 가는 것을 동의했다고 주장해왔다. 

 

A씨의 혐의는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됐지만, 항소심에선 1심과는 정반대로 무죄 판결이 나왔다. 

 

앞서 1심 재판부는 A씨의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B양이 사건 당시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봤다. 하지만 A씨는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기사회생했다. 당시 B양이 준강제추행의 성립 요건인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는 게 그가 무죄를 선고받은 이유였다. 모텔 폐쇄회로(CC)TV 상 B양이 비틀대거나 부축을 받는 모습 없이 자발적으로 이동한 점과 모텔 직원의 “두 사람이 모텔로 편안히 들어갔다”는 진술 등이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1∼2심을 거치며 유무죄가 뒤바뀐 이번 사건을 두고, 대법원은 일부 정황만으로 알코올 블랙아웃을 겪은 피해자가 당시 의식이 있었다고 봐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연령, 피고인과의 관계, 만나게 된 경위 등을 근거로 B양의 심신상실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이 사건 당시 짧은 시간 동안 다량의 술을 마셔 자신의 일행이나 소지품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라며 “처음 만난 A씨와 함께 숙박업소에 가서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추행을 당할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당시 B양 친구의 실종 신고를 받은 경찰이 모텔방으로 찾아온 것을 알면서도 다시 B양이 옷을 벗은 상태로 잠든 점도 언급하며 “판단 능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상태”라고 했다.

 

다만 재판부는 ‘필름이 끊겼다’는 진술만으로 알코올 블랙아웃의 가능성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면서 충분한 심리로 심신상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단은 알코올 블랙아웃으로 기억을 잃은 성추행 피해자의 심신상실 여부에 관한 판단 기준을 새롭게 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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