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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 남현정
그림 = 조미형 작가

그때 나는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누군가 내 몸을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중심을 잃은 채 곧 절벽 아래로 떨어질 상태였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나는 이 절벽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러나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몸의 중심을 잃으면 나는 죽을 것이다. 저기 까마득한 바닥으로 퍽. 내 몸은 찢기고 터져서 형체를 잃고 말겠지. 그런 최후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하다. 침착하자. 천천히 한 발자국만.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될 것인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몸이 떨려왔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찢긴 육체뿐일 참혹한 미래. 그것은 공포였으므로 내 몸은 떨려왔고 절벽 위에서 떨려오는 몸을 어찌하지 못하는 이 상황 또한 공포였다. 공포로 몸이 떨리는 공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내 곁에는 까마득한 바닥과 그다음 절벽뿐이었다. 누군가 붙들어만 준다면 나는 그 손을 붙잡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설 수 있을 텐데. 한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다음 발자국은 얼마든지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일까. 그것은 나의 문제일까 나를 도와주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일까.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지만 탓할 사람이 없었다. 지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없는 장대를 기어오르는 머리없는 한 존재를 나는 저기 바라본다.

어디에서 들리는 걸까? 이 목소리는 환청일까?

산보하는 동안, 휴식을 취할까 하고, 비록 아무리 바라도 거기에 다다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그토록 다다르기 어려운 그 휴식의 밑바닥에 다다르려고 애를 쓰며 산보를 하는 동안, 나는 저기 바로 그를 알아본다.

아니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다. 나는 분명 이 목소리를 듣고 있다. 쏟아내듯 말을 뱉어내고 있는 이 목소리는 둔탁하고 차가웠다. 낯선 것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지치지 않고 오 아니다 그는 무겁게 지쳐있다 끊임없이 그는 기어오른다.

그 무시무시한 수직의 길을 기어올라간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나는 목소리의 말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이해하기에 내 상황은 너무 무시무시했고 나는 이미 흘러가버린 목소리의 느낌만을 겨우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나에게 말을 거는 저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저기 길은 있었다. 비명을 삼키며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 자세는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고 나는 네발로 기어서 절벽으로부터 벗어났다.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몇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머리없는/ 휴식/ 무겁게/ 지쳐 있다. 이 말들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정말 들은 것인지 이제 확신할 수 없다. 머리없는 휴식 무겁게 지쳐 있다.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공포도 불안도 참혹한 이미지도 없어졌다. 나는 자리에 누웠다. 뜨거운 햇빛이 온몸으로 쳐들어왔다. 이 햇빛이라면 계절은 여름일 것이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절벽 아래 까마득한 밑바닥과 아찔하게 떨리던 몸의 감각뿐이었다. 과거를 떠올려 보려는 나의 노력을 조롱하듯 졸음이 밀려왔다. 과거가 떠오르지 않는 건 순전히 이 터무니없는 졸음 때문일 것이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과거가 없는 인간이 있을 순 없잖은가. 없는 과거를 지어내볼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이 절벽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에 나는 졸음과 울음을 참고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나운 햇빛을 피해 저기 보이는 길로 어서 가자. 그리고 나의 이 고도를 낮추자. 나는 길을 향해 네발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던 가파른 경사가 어느 새 끝났다. 내 다리에 힘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쥐가 올라 뻣뻣해졌고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내 앞으로 완만한 길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절룩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빽빽한 나무들이 더위를 삼켜버린 듯했고 햇빛은 이 길 위를 침범하지 못했다. 시원하기보다 서늘했다. 나는 절벽으로부터 멀어지겠다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다음 목적은 없었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길 한가운데에서 빨간 세단 하나가 들썩들썩 움직이고 있었다. 이 빽빽한 숲에 자동차라니. 아무리 둘러봐도 자동차가 지나다닐 만한 길은 없었다. 또 내가 걷고 있는 이 길도 모든 것들의 통행을 허용할 만큼 넓은 곳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굴러 떨어졌을까? 어느 몰상식한 운전자의 몰상식한 운전으로 이곳까지 자동차가 쳐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저 몰상식한 빨간 세단은 나의 시선을 붙들려고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들썩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의 몰상식한 초대에 기꺼이 응하겠다는 듯 세단 앞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곳에선 두 사람의 몸이 뒤섞이고 있는, 말하자면 뜨거운 사랑의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사람이 가질 법한 죄책감 같은 게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보았다. 둘은 몸을 기계적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뜨거운 입김과 비릿한 냄새가 창문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어떤 목적이 있는 사람처럼 이들의 사랑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니 둘의 사랑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삐걱. 예고도 없이 문이 열렸다. 빨간 기계의 들썩임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열린 문으로 한 사람이 빠져나왔다. 나는 죄가 들통나기라도 한 듯 당혹감에 온몸이 화끈거려왔다. 그 사람은 헐떡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차분하고 무심하게 자동차의 문을 닫았다. 마치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처럼.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서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시선만 피하다 이 자와 결국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그때 나는 말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이 자는 사람이 아닌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늑대의 얼굴 같기도 했고 개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괴물일까. 차라리 머리없는 존재가 덜 흉측할지도 모른다. 이 자는 나만 보고 있었고 나는 이 자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자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언제 만난 적 있습니까?”

이 자의 목소리는 아주 평범했고 그것이 더 괴이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나는 속으로 말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당신처럼 흉측하게 생긴 사람을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만났겠습니까.

이런 혐오감을 면전에 대고 드러내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비밀스레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 이 자는 갑자기 내 몸의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비밀을 탐지하려는 개처럼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여기저기 계속 킁킁댔다. 나는 나의 내밀한 혐오감이 들킬까봐 내심 불안했다. 그러나 그것은 혐오감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정도였을 것이다. 이 자는 내 주위를 계속 빙글빙글 돌며 내 몸을 킁킁댔는데 얼마나 가까이 킁킁댔는지 가끔 이 자의 코와 손이 내 몸에 슬쩍슬쩍 닿았다. 그럴 때마다 혐오가 아닐 것이라는 조금 전의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 접촉으로 내 몸이 언젠가 무너지게 되리라는 불길한 확신마저 들었다.

“저는 지금 막 벌레 한 마리를 죽였습니다.”

이 자는 갑자기 멈춰서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빠르고 미끄러웠어요.”

“……”

“그것은 죽기 전 30초 정도 더 살았습니다.”

“……”

“그걸 죽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

“그러나 제가 죽이지 않았다면 그 벌레는 틀림없이 당신을 물었을 것입니다.”

“……”

“그 벌레에게는 독이 있어요.”

“……”

“그 독은 사람을 죽일 만큼 무서운 것이지요.”

“……”

“그런 점에서 당신은 제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렇다고 당신에게 무얼 바라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자는 말하고 멈췄다. 다시 말하고 멈추고 말하고 멈추고… 나의 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자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빨간 세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뻔뻔한 개 같으니.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이 자를 이제 거의 개로 인식하는 듯했다. 그때 이 자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아채다시피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감촉이라고는 전혀 없는, 메마르고 딱딱한 손. 나는 아주 기분이 나빠져서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었다. 과거만 잊어버린 게 아니라 말하는 방법마저 잊은 건 아닐까? 슬슬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는 건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매몰차게 이 자의 손을 뿌리쳤다. 메마른 손이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아무래도 나의 호의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나는 경멸의 눈빛으로 이 자를 한 번 노려보고는 앞으로 걸어나갔다. 오른 다리에 통증이 아직 남아있어서 나는 똑바로 걸을 수 없었다. 절룩절룩. 나는 내 행동이나 모습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면이 다 궁색하고 꾀죄죄했다. 이곳을 떠날 이유가 딱히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손도 뿌리치고 경멸의 눈빛으로 노려보기까지 했으니 이 자와 계속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행동이라고는 고작 앞으로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오래 절룩거리며 걷게 될 줄 몰랐다. 절름발이의 몸으로 이 산속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개의 얼굴을 한 자가 아직 내 뒤에 서 있을 것이므로 나는 계속 걸어야 했다. 휴식 없이 목적 없이 계속. 나는 이 자가 그렇게 끔찍히 싫었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자를 끔찍히 싫어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진심은 아니었다.

그 자가 나를 뒤쫓아오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개의 얼굴을 한 자를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어쩌면 저 자가 나를 뒤쫓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볼까 잠시 생각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정말 궁색하고 꾀죄죄한 행동이었고 나는 그래서 묵묵히 앞만 보며 걸어갔다. 쨍한 햇빛이 가끔씩 나무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름의 펄떡이는 냄새가 났다. 소리들은 계속 있었다. 나뭇잎들은 밟히고 있었고 돌멩이들은 구르고 있었다. 그 소리들은 크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몹시 소란스럽게 들렸다. 여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가 처한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여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으로 보이는 건 떼를 지어 늘어서 있는 나무들과 가끔씩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새의 무리, 조금 질퍽거리는 흙 그리고 절룩거리는 나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었다. 이 자연만으로는 나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

퍽.

그때 하늘에서 새가 떨어졌다. 그것은 붉은 머리에 매달린 동그란 몸과 꼬리가 없는 특이한 형상의 새였다. 붉은머리새는 몸에 달린 날개를 잠시 파닥거리다가 이내 머리를 몸속에 파묻고 죽었다. 그것은 꼭 하나의 공처럼 보였다. 붉은머리새의 최후의 파닥거림은 대략 30초 정도였다. 순간 개의 얼굴을 한 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은 죽기 전 30초 정도 더 살았습니다. 붉은머리새도 죽기 전 30초 정도 더 살았다. 개의 얼굴을 한 자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붉은머리새의 최후의 30초를 지켜보며 나는 그 말의 뉘앙스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삶은 죽음으로 쉽게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후의 30초가 있으므로 산 자는 죽은 자의 세계로 절대 쉽게 넘어갈 수 없다. 이 30초는 죽음 앞에 선 산 자의 모든 생이 집약된 시간이며 모든 생이 집약되는 불가능이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때 나는 붉은머리새의 죽음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땅에 널브러져 가여이 죽어 있는 이 붉은머리새를 푹신한 풀밭에라도 묻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의 사체를 집어 바지의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내 바지는 헐렁해서 붉은머리새를 담기에 충분했다. 붉은머리새의 묵직한 무게가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 무게가 오른발로 쏠렸고 그로 인해 내 몸은 오른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절룩거리고 있었다. 망가진 균형. 붉은머리새가 나의 망가진 균형을 더욱 망가뜨려 놓았다. 한 마리가 더 있었다면. 한 마리 더 하늘에서 떨어져도 좋을 일이었다. 한 마리 더 하늘에서 떨어지면 나는 그것을 바지의 왼쪽 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그럼 그것이 다시 나를 왼쪽으로 끌어당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의 망가진 균형은 조금이나마 회복되겠지. 그러나 이 바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균형을 위해 붉은머리새가 하늘에서 떨어져 죽기를 바라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후의 30초니 죽음의 경이로움이니 호들갑을 떨고 있지 않았던가. 나의 비인간성을 확인하는 이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나는 붉은머리새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깃털로 뒤덮여 있는 그것의 물컹한 살이 만져졌다. 끔찍한 기분으로 만져서인지 아니면 죽어있는 것의 살을 만지는 것이 본래 끔찍한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붉은머리새의 몸을 만지는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나는 그것을 있는 힘껏 멀리 던졌다. 붉은머리새는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저기 수풀 속으로 떨어졌다.

 

그림 = 조미형 작가

부스럭.

 

붉은머리새가 떨어진 자리에서 소리가 났다. 토끼였다.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붉은장밋빛처럼 보이기도 하는 토끼 한 마리가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붉은머리새를 입으로 물고 어디론가 재빨리 뛰어갔다.

 

나는 아직 절룩거리고 있었다. 이 절룩거림은 더는 오른발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통증은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왜 절룩거리고 있는가. 붉은머리새가 나를 바닥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통증도 없어졌는데 나는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절름발이가 되어 이 산속을 누빌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생각도 하기 싫다. 절름발이가 되느냐 아니냐 이건 지금으로선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토끼를 뒤쫓는 것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붉은머리새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것을 푹신한 풀밭에 묻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게 아주 찜찜했다. 토끼를 붙잡아야 했다. 토끼가 물고 간 붉은머리새를 찾아서 그것의 장례를 치러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찜찜함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이 나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토끼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절름발이의 몸으로 토끼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끼는 작은 몸집으로 민첩하게 요리조리 움직이며 나를 약올렸다. 내가 절룩거리며 토끼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가면 그것은 즉시 다른 방향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입에 붉은머리새를 물고 죽음을 물고 폴짝폴짝 나무 뒤로 숨었다가 바위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얄미운 궤적을 그리는 저 망할 토끼를 잡아야 하는데 이 몸으로 이 비참한 마음으로 느릿느릿 꾸물꾸물 몸만 비비꼬며 폴짝거리는 토끼만 쳐다보는 나는 무엇 하러 붉은머리새를 수풀 속으로 던져 버렸을까. 그곳으로 던지지만 않았더라면 토끼가 그걸 물고 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럼 내가 이런 우스운 꼴로 이 산속을 헤매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런 자기반성 대신, 차라리 붉은머리새의 장례를 포기하거나 그게 싫다면 토끼를 붙잡을 다른 묘안을 생각해내거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스락.

 

다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나무 아래 토끼가 있었다. 내가 찾고 있던 회색빛인지 장밋빛인지 모를 그 토끼는 나무 아래에서 발작적으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 미치광이 토끼의 입에는 아직 붉은머리새가 물려 있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붉은머리새의 몸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눈을 부릅뜨고 계속 쳐다보기에 그 장면은 너무 잔혹했다. 저 가여운 붉은머리새를 못된 토끼로부터 어서 구해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무서운 장면 속으로 선뜻 뛰어들지 못했다. 가여운 붉은머리새를 가여워하고만 있었고 못된 토끼의 잔혹함을 비난하고만 있었다. 이 못된 토끼가 피투성이 붉은머리새를 입에 물고 발작적으로 뛰어다니는 동안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무력하게 구경했다. 위장된 연민이었나. 차라리 먹어버려라. 그러다 미치광이 토끼는 갑자기 어떤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나무 아래 구멍 속으로 다이빙하듯 몸을 던져 들어갔다. 토끼가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나서 나는 그제서야 토끼가 발작하던 그 자리로 갔다. 구멍을 바라보며 저 미친 토끼가 빼앗은 붉은머리새의 평온한 죽음을 생각했다. 구멍 속에서 붉은머리새의 살점을 뜯어 먹을 토끼의 모습이 떠올랐다. 토끼의 입에 물려 처참히 폴짝거리던 붉은머리새의 형체도 눈 앞에 아른거렸다. 마음이 들끓었다. 나는 붉은머리새의 복수를 생각했다. 미치광이 토끼가 나의 장례를 망쳐놓았고 복수로라도 나의 애도하는 마음은 지켜져야 한다! 나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미치광이 토끼처럼 한참을 발작적으로 절룩거리며 폴짝거렸다. 그러면서 토끼에게 복수할 수 있는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해보다가 구멍을 막는 것이 최적의 복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깨닫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여러 개의 구멍이 눈 앞에 있었다. 나는 먼저 미치광이 토끼가 다이빙해 들어간 구멍을 바위로 막고 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또 다음 구멍으로 절룩거리며 걸어가 다시 그것을 바위로 막고 흙으로 덮었다. 눈 앞에 보이는 구멍을 다 막고 나면 다시 또 다른 구멍이 보였고 그렇게 구멍은 계속 나타났다. 나는 구멍이 보일 때마다 이 짓을 반복했고 이 무용한 짓을 진 빠지게 반복하다가 결국 이 짓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도 나는 계속 바위를 옮기고 흙을 덮어 구멍을 막고 있었는데 그때 저기 보이는 다른 구멍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회색빛으로도 보이고 장밋빛으로도 보이는 바로 그 미치광이 토끼였다. 그것은 나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저 멀리 폴짝폴짝 뛰어가 사라졌다. 나는 토끼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토끼가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구멍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이 짓의 목적을 잊은 상태였고 더구나 이 멍청하고 단순한 짓에 이상한 쾌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는 토끼가 사라진 후로 한참 동안 구멍을 막는 짓을 계속했고 구멍을 막아도 더는 아무런 기쁨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발견되는 구멍을 계속 막고 막고 막고 또 막았다.

 

나는 빈속이었다. 빈속으로 오래 걸었다. 이 허기를 계속 버틸 수는 없었다. 허기는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배가 고팠다. 이제 나는 이 산을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그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왼쪽 다리에는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를 통증이 퍼져 있었다. 내 몸은 거의 무너지는 꼴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불어대는 더위 없는 바람이 여름의 효력을 없애 버렸고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모두 빽빽한 나무들 뿐이었다. 그것들은 무섭게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다 별안간 이 나무들의 무리가 뭇매라도 때릴 것처럼 나를 향해 돌진했다. 나는 겁에 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설령 그것이 내가 모르는 죄라 하여도 무조건 사죄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만일 그때 내 손에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면 나에게 돌진하는 이 무서운 존재들을 향해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렀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뒤죽박죽이었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은 폭력일 것이고 나의 폭력이 정당할 순 없으나 나는 무고했고 나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몽둥이를 휘둘러야 하는가. 사방은 조용했다. 새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피 흘리던 붉은머리새가 떠올랐다. 나는 세상의 비정함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이길래 무너지는 이 꼴로 나를 여기 이 진창에 던져 놓았는가. 몸에 매달려있기만 하는 이 성가신 두 다리를 차라리 없애버릴 수 있다면. 나는 나쁜 격정에 휩싸였다. 무너져가는 몸으로 바닥에 누웠다. 빽빽한 나무들이 무자비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나뭇잎들의 야박한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하늘의 특색을 잃은, 아주 작은 구덩이처럼 보였다. 땅의 습기를 빨아먹는 새까만 벌레들이 내 몸 아래로 기어와 서늘하게 꿈틀거렸다. 그것들의 움직임은 불쾌했고 나의 짓누름 한 번이면 소리도 없이 죽고 살고 죽고 살고 끝날 운명일 존재들 죽을 운명이어야만 태어나게 되어 있는 그리하여 모든 죽음에는 생이 함축되고 이 미약한 벌레들을 손가락으로 아주 단순하게 짓이겨 죽이는 것은 이것들의 생의 의미마저 죽이는 것과 같으니 나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벌레들아 죽지도 못할 운명보다는 죽을 운명으로 태어나는 게 더 축복일까? 그것이 벌레의 생이라도?

 

라쉘휘 트히슽!

 

그때 나는 어디선가 터져나오는 둔탁하고 차가운 목소리를 또다시 들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는 이 목소리는 이곳저곳을 맴돌며 점점 커졌다.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 라쉘휘 트히슽은 소리날 때마다 매번 특정한 리듬을 발생시켰다. 그 리듬 속에서 음절의 날카로운 속성이 자연스럽게 마모되었고 그러자 그것은 점점 부드럽고 성스러운 소리로 탈바꿈되었다. 나는 그 소리를 외울 만한 여력이 있었다. 라쉘휘 트히슽. 나는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비록 그 말의 의미는 몰랐지만 그렇다고 성스러운 소리가 성스러워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정적은 소리의 성스러움을 더욱 드높였고 거대한 소리는 사방을 떠돌다 불쑥 형체를 갖추더니 점점 줄어들면서 마침내 하나의 지팡이로 축소되었다. 나는 그 지팡이를 꽉 붙잡았다.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문자가 적혀 있었다. La chair est triste!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는 그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섰다. La chair est triste!이라고 적힌 이 지팡이가 무너진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La chair est triste! 문자는 절대 불평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의 의미를 알아채는 것은 내가 아닌 세상에 널린 해석하는 자들의 몫이었으며 이 문자가 라쉘휘 트히슽이란 소리의 주인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게 계시였으므로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으니 목소리와 문자와 지팡이는 하나로 집약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고야 말았다. 이 고귀하고 신성한 지팡이가 내가 가야 할 길을 올바르게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이 피어났고 이 지팡이를 절대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것이라는 금기가 태어났다. 물론 이 믿음과 금기는 충분히 괴상했다. 그것이 괴상하다는 걸 모를 만큼 그때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팡이에 의존하여 걷는 것이 홀로 절룩거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므로 나는 이 괴상한 믿음을 당분간 이어가기로 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바닥에 찍어누르며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곧바로 왼발을 질질 끌기. 다시 지팡이에 내 몸의 무게를 싣고 바닥을 찍어누르며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기 그리고 곧바로 왼발을 질질 끌기. 질질 끌기 질질 끌려다니기. 지팡이에 질질 끌려다니며 마음만은 평온하게 여기 이 진창을 누비는 신세란!

 

진창 속에서 짐승들의 울음소리는 끝없이 메아리쳤다. 나는 정확한 절망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곳은 목숨을 내놓고 이동해야 하는 곳이었고 굶주린 포식자의 자비 없는 공격에 무력한 이방인인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지금으로선 없어 보였다. 몸을 숨길 만한 은신처도 알지 못했고 그렇다고 나를 공격하는 맹수를 공격할 만한 그럴싸한 무기가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제 곧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에 몸이 떨렸다. 짐승의 예고 없는 공격에 나는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그때 문득 지팡이를 두 손으로 꽉 붙잡고 라쉘휘 트히슽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외침으로 이 고약한 공포심이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한 믿음으로 나는 소리내어 외쳤다. 라쉘휘 트히슽! 잔혹한 맹수가 내 앞에 나타나 내 살점을 물어뜯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으리니. 진실로 진실로 그렇게 될지어다. 라쉘휘 트히슽!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라쉘휘 트히슽! 놀랍게도 마음이 조금씩 평온해지고 있었다. 나는 이 지팡이만 믿으면 되었고 내가 아무리 궁핍하고 저속한 꼴이라 하더라도 내가 믿기만 한다면 이 성스러운 지팡이는 나를 기필코 지켜낼 것이리라. 오 나의 지팡이여! 라쉘휘 트히슽!

 

이윽고 벤치가 나타났다. 이 깊고 깊은 산속에서 나타난 저 벤치는 마치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휴식, 그토록 다다르기 어려워보였던 휴식의 시간을 저 벤치에서 비로소 갖게 되리라. 이게 다 지팡이 덕분이었다. 라쉘휘 트히슽! 나는 벤치에 앉아 이것이 휴식이지 이것이 휴식이야 스스로 감탄하며 땀을 식혔다. 그리고 이 벤치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진심을 다해 기도했다. 무너져 버린 몸으로 내가 지치지 않고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지팡이의 인도하심 때문이며 라쉘휘 트히슽! 지팡이의 인도하심으로 이 거룩한 벤치에 안착함으로써 마침내 평화로운 휴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라쉘휘 트히슽! 보잘 것 없는 나를 여기 이 벤치에 앉게 하심은 존귀하신 지팡이의 크나큰 뜻이 있음이며 라쉘휘 트히슽! 그 거룩한 뜻을 받들어 지팡이의 영광이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라쉘휘 트히슽!

 

이 거룩한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중 가장 특별했던 것은 긴 장대를 기어오르는 머리없는 한 존재였다. 그 광경은 정말로 특이했지만 완전히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기시감마저 느껴졌는데 언젠가 들었던 말이 장면으로 완벽하게 구현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머리없는 존재가 무시무시한 수직의 장대를 기어오르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보니 그가 더 올라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머리없는 이 존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를 불안한 자세로 잠시 정지하는 듯하다가 다시 기어올랐고 그러다 다시 정지와 불안과 시작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오 아니다 그는 무겁게 지쳐 있었고 장대에 매달린 그의 괴이한 자세를 볼 때 이 곡예에 진절머리가 나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머리없는 이 존재의 가여운 곡예를 끝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게 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저 수직의 장대가 끝없이 이어지도록 그리하여 계속해서 그가 기어오를 수 있도록 비록 그곳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토록 다다르기 어려운 곳이라 하더라도 바라는 곳까지 기어코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곤 이 지팡이뿐이었고 이 지팡이가 저 장대를 더 길게 더 수직으로 만드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없는 존재가 낑낑 기어오르고 있는 저 무시무시한 장대를 향해 지팡이를 붙들고 질질 몸을 끌며 걸어갔다. 장대 앞에 기어이 도착한 나는 머리없는 존재가 매달려 있는 저기 저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목이 꺾여 현기증이 났다. 내가 이 장대로 올라가지 않는 한 내 지팡이를 저 머리없는 존재에게 건네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는 결국 이 장대에서 떨어질 것이고 그것이 이 지팡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쯤에서 그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머리없는 존재만 너무 오래 생각하고 있었고 머리없는 존재만 생각하기에는 나에게 생각할 거리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생각을 끝내기 위해 이 소중한 지팡이를 장대 옆에 박아두기로 했다. 그것은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그렇게 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내 지팡이가 머리없는 존재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으련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지팡이를 장대 옆에 박아두는 바람에 불행히도 내 몸은 다시 무너졌다. 지팡이에 기대 몸을 질질 끌며 겨우 걸어다녔던 나는 이제 지팡이 없이 네발로 땅을 기어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지팡이에 질질 끌려다니는 신세였지만 직립보행으로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했었던 나는 네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의 꼴로 산속을 누비며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전락이었다. 이 와중에 나는 빌어먹을 전락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성스러운 지팡이를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었는지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 지팡이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계시처럼 나타나 나를 진창에서 구원해 주었고 극도의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였으며 그리하여 나를 기적 같은 휴식의 시간으로 정확하게 인도해 주지 않았던가. 나의 믿음의 지팡이, 그토록 성스러운 지팡이를 나는 무엇에 홀렸길래 그리도 허망하게 버리고 말았는가.

 

믿음의 빈자리는 순식간에 공포심으로 다시 채워졌다. 거의 짐승처럼 기어다니고 있는 나를 굶주린 적은 언제든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더는 라쉘휘 트히슽!이라 외칠 자격이 없었고 라쉘휘 트히슽! 없이는 이 공포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내가 스스로 죽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은 완전하게 다른 문제였다. 나는 왜 이런 상태로 믿음을 잃고 휴식도 없이 짐승처럼 죽음과 함께 기어다니게 되었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믿음의 지팡이를 스스로 버렸고 그러므로 나는 이런 비참한 꼴로 전락하는 게 마땅한 것인가? 그럴 리가! 차라리 미쳐버릴까? 내가 미쳐버리면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될까? 그럴 리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갑게 경직되어 가는 이 몸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 배고픔도 내가 미쳐도 미치광이가 되어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섭게 정신을 차렸다.

 

허기를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먹어 치우면 그만이었다. 산 속에 널려있는 무수한 먹이들! 이렇게 네 발로 기어다니게 된 마당에 아무 것이나 먹어 치우지 못할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눈 앞에서 빨간 토마토가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의심스럽게 그것의 냄새를 맡으며 이 토마토가 먹을 수 있는 토마토인지 썩은 토마토인지 따지고 있었다. 그것은 썩은 토마토였고 나는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썩은 토마토라도 먹어야 했다. 나는 그만큼 최악이었다. 그때 나는 썩은 토마토에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최악인 내가 썩은 토마토를 먹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동종포식의 행위가 될 것이다. 썩은 토마토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최악이 최악이 되지 않을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나는 썩은 토마토를 먹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바에야 질 좋은 먹이만 먹겠다는, 아마도 최악일 결심을 하고 말았다.

 

그림 = 조미형 작가

가까운 곳에 못이 하나 있었다. 나는 목이라도 축이기 위해 가장 낮은 자세로 못까지 기어가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콧구멍으로 땅의 비린내를 들이마시면서 네발이 없는 것처럼 몸뚱이만 남은 것처럼 지렁이처럼 민달팽이처럼 천천히 천천히 온몸에 충격을 주며 고통스럽게 겨우겨우 앞으로 앞으로. 그건 의식과도 같았고 스스로 그런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앞으로의 무서운 불행들을 미연에 막아내리라는 헛소리.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어이 못 앞에 이르렀을 때 내 몸은 풀에 벤 상처와 약간의 피 그리고 작은 돌멩이와 흙, 벌레의 오물 따위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지경으로 이 못에 이르니 고작 이 못에 이르려고 이 지경이 된 것 같았고 그러니 지금의 이 참담한 꼴은 모두 이 못의 탓! 못이여 나는 너는 멀리할 테니 너도 저 멀리 꺼져버려라 멀리 멀리 아주 멀리. 그러나 나는 목이 너무 말랐고 어떻게든 목을 축이고 싶었다. 그래서 못으로 고개를 숙여 혀를 깊숙이 내밀었다. 물은 축축하고 미끌거렸다. 그것은 물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목이 너무 말랐고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나의 비참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이 물이든 물이 아니든 어떻게든 그것으로 목을 축이고 말겠다는 미련한 정신으로 정체 모를 그것을 혓바닥으로 날름날름 핥아 먹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번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핥아 먹는 동안 나는 그것의 맛과 감촉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이 고통이었는지 쾌락이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내 감각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나는 못 옆에서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말아 앉았다. 손바닥을 핥으며 나는 나의 비참을 체념했다. 시무룩한 마음으로 못만 쳐다보다가 무엇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하늘을 향해 위로 고개를 쳐들었는데 그때 개의 얼굴을 한 자가 약간의 걱정과 몽롱함이 배어있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자가 지금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매우 의아했지만 나는 나의 사태를 이미 체념한 상태였으므로 이 자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것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 자는 개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단단하고 딱딱한 밧줄로 아주 차분하게 내 목을 묶기 시작했다. 이 자가 지금 밧줄로 내 목을 묶고 있는 것이 매우 의아했지만 나는 나의 사태를 이미 체념한 상태였으므로 이 자의 밧줄이 내 목줄이 되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목줄에 묶인 채 나는 이 자가 이동하는 대로 끌려다녔다. 다행히 이 자는 무자비한 작자는 아니었다. 내가 조금 더디게 움직이거나 헥헥거리며 지친 낌새를 보이면 그 자리에 바로 멈춰 서서 나의 상태를 살폈다. 이 자의 이런 친절한 행동이 나에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이 자는 이 산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이 자에게 끌려다니는 길들은 이제껏 내가 기어다녔던 모든 길보다 수월했다. 이동하면서 가끔씩 목줄이 헐거워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 자는 나에게 다가와 목줄을 세게 조이고는 내 머리에 대고 달콤한 말들을 퍼붓곤 했다. 이 자의 흉측한 외모는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언제 그런 마음을 품은 적 있었냐는 듯 어느 새 혐오 없이 경멸 없이 아마도 경외의 마음으로 이 자의 모든 말과 행동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개의 얼굴을 한 자가 나를 끌고 도착한 곳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숲이었다. 저기 빨간 세단이 보였다. 이 자는 내 목줄을 나무 기둥에 묶어두고 빨간 세단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고 어둑한 나무들 틈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왔다. 나에게 이제 계절과 날씨는 무엇보다 중요해졌지만 그것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목줄에 묶여 네발로 기어다니는 나의 상태를 믿어야 했고 그건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삐걱. 빨간 세단에서 개의 얼굴을 한 자가 빠져나왔다. 이 자는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으며 성큼성큼 나에게 걸어오더니 손에 들린 빨간 토마토 한 알과 갈색빛이 도는 술잔을 친절하게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내 머리에 대고 이건 브랜디이고 토마토는 보다시피 잘 익었으며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말했다. 개의 얼굴을 한 자 이 개 같은 자는 내 목줄을 세게 조이고는 내 뺨을 한 번 쓰다듬더니 다시 세단 쪽으로 걸어갔다. 개 같은 자의 뒷모습에서 일종의 서정성이 느껴졌고 하나의 완벽한 그림처럼 보이는 개 같은 자의 그림자를 노려보며 나는 브랜디를 혓바닥으로 날름날름 핥아 먹었다. 향기로운 갈색의 액체가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몸이 활활 타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것은 고통보다는 쾌락에 가까웠다. 그때 내 앞으로 지나가는 악어 한 마리! 이 기분으로 이 정신으로 나는 악어에게 주머니에 들어있던 돌멩이를 던져 보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번 몇 번이나 돌멩이로 얻어맞고 기지개를 켜는 듯 하품을 하는 듯 악어는 나른하게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러고는 저 멀리 언덕 위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새끼에게로 기어갔다. 내 몸의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끄럽고 횡횡하게 웃어젖히며 조심해, 악어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는 이 목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이 목소리는 나의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최초의 말도 내뱉지 못했다. 나는 내 목줄을 더 꽉 졸라매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믿기로 했다. 여기 이 빨간 세단과 언덕 위의 악어와 악어 새끼, 또 개 같은 자와 브랜디와 썩지 않은 토마토를 나는 믿어야 했다. 산속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품 속 목소리로 표현된 부분은 다음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 앙리 미쇼, 김현 역, 「끝없는 장대에」

2. 스테판 말라르메, 「Brise marine」

3. 앙리 미쇼, 김현 역,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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