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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잃은 슬픔에 ‘사회적 낙인’까지… 고통에 갇힌 남은 자들 [연중기획-피로사회 리포트]

입력 : 2020-11-15 10:00:00 수정 : 2020-11-13 20: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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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위험 내몰리는 ‘자살 유족'

“죽음 막지 못했다” 심한 자책감·죄의식
가족에 책임 묻는 따가운 시선 견뎌야해
유족들 자살 위험 일반인보다 7~9배 높아

정부, 찾아가는 ‘원스톱 서비스' 시범추진
심리 안정부터 법률·행정처리 등 지원
이용 꺼리면 실효성 떨어져… 홍보 관건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가 없었어요.”

강명수(58)씨의 어머니는 강씨가 스무살이던 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0년 이상 우울증을 겪었던 어머니는 약물치료와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정작 주변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당시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던 탓에 누구에게 쉽게 털어놓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강씨가 어머니의 죽음을 직시한 것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뒤였다. 마흔이 넘어 심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을 감추고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에 대해 복합적인 감정이 억눌려 있던 것이다.

이후 심리상담사가 된 강씨는 과거의 자신처럼 가족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자살 유가족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카페에도 가입했다. 카페 운영진이 된 그는 한 달에 한 번 유가족 자조모임도 열고 있다. 강씨는 “자살에 대한 애도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다. 남편이 죽으면 며느리에게, 딸이 죽으면 사위에게, 아이가 죽으면 부모에게 비난의 눈초리가 간다”며 “자살로 인한 사별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것과 마찬가지로 공감과 위로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의 불명예를 이어가는 가운데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의 유가족이 처한 어려움과 사회적 편견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자살 예방과 함께 유가족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바로잡히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하다는 분석이다.

◆매년 발생하는 자살 유가족 10만여명

서울에 사는 임모(39)씨는 4년 전 남편을 잃었다. 임씨의 남편은 우울증과 분노조절장애를 겪어 병원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그러던 중 재산 문제로 가족과 다툼이 생기면서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의 사망은 임씨에게도 치명적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사별로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임씨는 “다들 잘 지내는데 나만 혼자라고 생각된다. 남편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며 “사실 자살 유가족은 아주 위험하다”고 말했다.

가족의 극단적인 선택은 임씨와 같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낳는다.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망자는 1만3799명으로 하루 평균 37.8명 수준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 사람의 자살이 최소 5~10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는데, 이를 토대로 국내에서만 매년 8만~13만명의 유가족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가족들은 가족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이나 징후를 알고도 말리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유가족에게 책임을 묻는 주변의 시선으로 유가족은 슬픔이나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이들 역시 자살이나 우울장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한 국내외 연구 결과에서도 유가족들은 일반인보다 자살의 위험이 7~9배 높고, 유가족의 88.4%가 사별 후 일상생활에 부정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유족에 직접 찾아가 심리안정·법률·행정 지원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자살 유가족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지만,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 및 자살예방센터에 등록돼 도움을 받는 대상은 지난해 기준 1000여명에 불과하다.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경찰이나 소방당국이 자살 유가족에 대한 정보를 관계 기관에 제공하기 어렵고, 자살 유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으로 인해 유가족들도 지원 요청을 꺼려왔다.

이에 정부는 자살 사고 발생 시 먼저 유가족을 찾아가 서비스를 안내하고 개인정보 및 서비스 제공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원스톱서비스’ 모형을 개발해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보건복지부와 중앙심리부검센터는 자살 사건 발생 시 유가족의 초기 심리안정부터 법률·행정 처리 및 임시 주거 등 지속적인 사후관리를 돕는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현재는 광주시와 인천시,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시범 운영 중이며 점차 전국으로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서지혜 중앙심리부검센터 유가족지원팀장은 “자살 유가족은 사별로 인한 충격을 수습하기도 전에 고인의 부채나 법률·행정적인 부분을 떠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정신 건강의 위험뿐 아니라 삶 전반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큰 이유”라며 “제도를 알지 못하거나 찾아가기를 꺼리는 경우를 고려해 전문가가 직접 유가족에게 찾아가 안내를 돕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자살 유족에 대한 부정적 시선 사라져야”

정부는 자살 예방과 더불어 유가족에 대한 지원 정책도 보완해 나가고 있지만, 당사자를 상대로 한 홍보나 주변의 편견 해소가 선결 과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복지부의 관련 조사에서도 자살 유가족들은 ‘이용 방법을 알지 못한다’거나 ‘자살에 대한 편견’ 등이 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고 답했다.

서지혜 팀장도 “지원책이 개선돼도 유가족이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찾아가기를 꺼린다면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가족의 사망이 본인의 책임이 아니고 다른 죽음과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애도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사회적 편견과 이를 내면화한 유가족의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홍현주 한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여전히 정신과 진료 자체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경우가 많고,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고 인지하는 경우도 적다. 자살 유족은 여기에 주변의 시선까지 더해진다”며 “애도는 참는다고 해결되지 않고, 적절한 표현과 감정에 대한 지지를 통해서 상실의 고통에서 서서히 회복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로의 아픔 공유… 삶의 의지 찾아갑니다”

 

“함께 슬픔을 공유하니까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고, 다른 분들이 견디고 열심히 사는 걸 보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나도 해야겠구나’하는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참여자 A씨)

 

“상실감과 우울감이 많이 줄었어요. 많이 우울했는데 지금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굉장히 유쾌해요.”(참여자 B씨)

 

자살로 가족을 떠나보낸 유가족 자조모임(같은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도움을 얻는 모임)을 연구한 논문에 실린 경험담이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는 모임을 통해 유족들은 처지를 공감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6일 중앙심리부검센터가 집계한 현황에 따르면 자살 유가족이 참여하는 자조모임은 전국에 57개가 있다. 서울시자살예방센터의 ‘자작나무’ 모임과 같이 각 지역 자살예방센터가 운영하는 모임뿐 아니라 시민단체나 종교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모임도 각지에 있다.

 

유가족 자조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주기로 모여 애도 과정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한다. 참여자들은 서로에 대한 지지와 격려로 변화를 체험하고 자기를 표현할 기회를 갖는다.

 

보건복지부의 ‘자살유가족 지원체계 확립을 위한 기초연구’에 따르면 자살 유가족이 상처를 회복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받는 곳은 유가족 모임인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대상인 유가족 72명 중 52명(72.2%)이 유가족 모임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 답했다. 이어 가족·친척(59.7%), 자살예방센터(59.7%), 정신건강복지센터(55.6%) 순이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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