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함인희의세상보기] 묘비에 투영된 가족의 ‘웃픈’ 자화상

관련이슈 함인희의 세상보기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20-10-27 00:36:26 수정 : 2020-10-27 00:36:25

인쇄 메일 url 공유 - +

묘비 뒷면에 새겨진 가족 사항
요즘 세대에겐 낯설게 느껴져
매장 관행도 화장·수목장 대세
가족 의례 변화상 준비할 필요

지난 주말, 집안 어르신 기일(忌日)을 맞아 추풍령 가까이 있는 공원묘원을 다녀왔다. 코로나19 거리두기 상황에서도 어느새 다녀갔는지 대부분의 산소 자리 앞엔 형형색색 고운 빛깔의 조화(造花)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론 후손들 방문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듯, 빛바랜 조화가 초라하게 꽂혀 있는 산소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조상님들께 절을 올리며 가족들 안부도 전해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불현듯 묘비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묘비 앞면에는 부부의 본(本)과 함자(銜字)가 적혀 있었고 뒷면을 보니 가족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첫 줄과 둘째 줄에는 산소에 묻히신 분의 부모님 생신이 적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분이 같은 해에 이틀 간격으로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두 분이 동갑내기셨나 보네요” 여쭈었더니 그게 아니라 한다. 후손 중에 부모님의 부모님 생신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없어 편의상 그렇게 적어 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기야 1890년대 출생하신 분들 생신을 정확히 기억하는 후손이 없었음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아래로는 당사자 두 분의 가족 사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왼편에 세로로 아들 이름이 먼저 나오고 뒤를 이어 딸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오른편 옆으로 며느리와 사위 이름이 있었다. 다시 그 아래로 친손자 친손녀 이름과 그들의 배우자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아들딸 이름을 태어난 순서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아들 먼저 적고 출가외인(出嫁外人)인 딸을 아들 뒤에 적는 것이 예전 기준으로는 매우 자연스러운 관행이었을 것이다.

반면 요즘 세대의 시선에서는 출생 순위 무시하고 아들·며느리 다음에 딸·사위를 적는 당시의 관행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을 법하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왜 엄마 이름이 작은 아빠보다 더 아래에 있나요?”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한데 묘비에는 아들딸 이름 적는 순서보다 더욱 미묘하면서도 민망한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혼하는 부부도 빠르게 늘고 있고 재혼하는 커플도 부쩍 증가하는 상황이고 보니, 일찍이 이혼해서 남남이 된 사위 이름이 그대로 새겨져 있는가 하면, 얼마 전 재혼했다는 소식이 들리던 며느리 이름도 아직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빈번해졌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듯하다. 돌아가신 분들 입장에서는 살아생전에 분명 사위요 며느리였을 테니 묘비에 그대로 두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입장도 있고, 묘비도 살아있는 가족들 보라고 있는 것이니 고통스러운 기억 되살리기보다는 현재의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여 수정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도 있다. 실제로 요즘엔 묘비 뒤에 새겨진 가족 사항에 변동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이를 수정하는 것이 전혀 흉잡힐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 의례 가운데 가장 늦게 무엇보다 천천히 변화하는 것이 장례(葬禮)라는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 세태는 장례를 둘러싸고도 눈부신 변화를 경험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매장을 당연시해오던 관행이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건만, 지금은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시거나 수목장을 하는 것이 대세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혹실드의 ‘나를 빌려드립니다’에는 배우자 선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족 의례 전반이 상품화되거나 아웃소싱되어 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일종의 장례용 패키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데, 조금 더 값비싼 상품을 구입하면 장의사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유골을 뿌리고 하얀 국화를 띄워주는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제 70대 중반에 들어선 집안 어르신 생각에는, 지금처럼 조상님께 예를 갖추는 형식은 길게 보아 당신 자녀 대까지 가까스로 지속될 것 같고, 당신 손자녀 대에 이르면 제사는 거의 사라질 것 같다 신다. 결혼은 한다 해도 출산은 기피하는 커플이 증가하는 상황이고 보니, 돌아가신 조상님을 향해 예를 갖출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가족에 관한 한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가를 둘러싼 규범이 보다 정교하게 발달되어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묘비 뒷면에 가족사항을 어떻게 새겨야 할 것인지를 두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면 그 변화는 앞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당사자들이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것이 순리일 듯싶다.

최근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치를 것을 자녀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동시에, 누구누구에게 알릴 것인지, 수의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부의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세세히 적어 유언으로 남기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다. 나의 묘비에 무엇을 새겨 넣을 것인지도 미리 준비해두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으면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윤아 '청순 미모'
  • 윤아 '청순 미모'
  • 최예나 '눈부신 미모'
  • 있지 유나 '반가운 손인사'
  • 에스파 카리나 '민낮도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