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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걸쳐 1200만 흑인노예 처참한 삶… 가해국은 사과·배상 거부 [세상을 보는 창]

입력 : 2020-07-08 06:00:00 수정 : 2020-07-07 20: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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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차별의 뿌리 대서양 노예무역 / 아메리카 신대륙 노동력 확보 목적 / 16세기 초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지속 / 포르투갈 시작 英·佛 등 뛰어들어 /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이 중심지 / 백인 노예상과 결탁한 흑인 부족장 / 다른 부족 총으로 위협 팔아 넘겨 / 아프리카·아메리카·유럽 간 삼각무역 /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이익 안겨줘 / 英의 자금원으로서 산업혁명에 기여 / 가해국들 130여년간 과거청산 외면 / 자메이카 등 카리브 공동체 15개국 / “배상 없이 사과로만 끝나선 안돼” / 해적들 북아프리카 항구도시 거점 / 150만∼200만 유럽인 납치해 팔아 / 유럽국들 노예 몸값 제공 등 유화책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도화선이 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영국, 프랑스 등 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인종차별 역사 관련 인물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그들의 동상까지 수난을 겪는다.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흑인 노예를 둔 농장주였다는 이유로 동상이 훼손됐고 영국에서는 17세기 대표적인 노예 무역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을 시위대가 밧줄을 걸고 끌어내려 짓밟은 뒤 강으로 내던졌다. 노예제는 인류사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다. 서아프리카 중심의 대서양 노예무역은 흑백 인종차별의 뿌리다. 하지만 가해국들의 사과와 피해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진정한 과거 청산은 요원하기만 하다.

◆흑인 노예 150만명 신대륙 항해 중 사망

16세기 초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메리카 신대륙 경영을 위한 노동력 확보가 목적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처음에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 등에 인디오 원주민과 아일랜드인 계약하인을 동원했으나 중노동과 전염병으로 사망률이 급증하자 아프리카 흑인에 눈을 돌렸다. 흑인은 이들보다 전염병에 강하고 일을 잘했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노예무역에 뛰어들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중심지는 황금해안, 노예해안 등으로 불리는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이었다. 백인 노예상들은 자신들과 결탁한 흑인 부족장들이 다른 부족을 총으로 위협해 납치해 오면 총이나 면직물, 럼주, 유리구슬 등을 주고 사 배에 싣고 아메리카로 향했다.

노예무역선은 정원을 한참 초과했기에 한 사람에게 주어진 공간의 너비는 고작 40cm 정도였다. 손목과 발목, 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졌다. 숨 막힐 듯 다닥다닥 누워 있었던 노예들은 관 속의 시체와 다름없었다. 노예선은 한마디로 ‘떠다니는 지하 감옥’이었다. 짧게는 50일,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는 항해 기간에 10% 이상의 노예가 목숨을 잃었다. 비위생적인 환경과 질병, 학대, 자살, 폭동 등이 사망률을 높였다. 4세기에 걸쳐 대서양 노예무역선에 강제로 태워진 1200만명 중 150만명이 항해 도중 숨졌다. 얼마나 많은 노예가 바다에 버려졌는지 노예선이 뜨기만 하면 상어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인류가 저지른 죄악 가운데 이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을 것이다.

1050만명의 생존노예들은 브라질(400만명)을 비롯한 중남미와 서인도 제도, 미국(50만명)으로 유입됐다.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혹사당하는 노예들의 삶은 비참했다. 하루 17시간 이상의 극한노동에 시달렸고 툭하면 채찍질 세례를 받았다. 설탕을 ‘악마의 창조물’이라고 부른 이유다. 1833년 영국 의회가 최초로 노예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1848년 프랑스, 1863년 미국, 1888년에는 브라질이 마지막으로 노예무역을 중지했다. 인도적인 이유가 컸지만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는 바람에 노동력의 필요성이 감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노예들의 피, 땀으로 꽃핀 산업혁명

노예무역은 삼각무역으로 진행됐다. 총, 면직물 등 유럽 공산품이 아프리카로, 아프리카 노예는 아메리카로, 설탕, 담배 등 아메리카 농업 생산물은 유럽으로 이동했다. 삼각무역은 유럽 국가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수익률이 30%, 많게는 100%까지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영국 산업혁명에도 큰 기여를 했다. 에릭 윌리엄스는 저서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에서 “삼각무역과 식민지와 직접 무역으로 얻은 이윤이 영국 자본축적의 주요 자금원이었고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금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17세기 영국자본 형성의 3분의 1이 노예무역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우선 앙골라를 비롯한 상당수 국가들의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프리카를 불신사회로 만든 점이다. 노예를 잡아오면 총과 생필품을 살 수 있었으므로 부족 간 인간 사냥이 만연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언제 누가 자신들을 노예로 잡아갈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신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오늘날까지 부족·국가 간 갈등과 전쟁이 잦은 배경이다. 네이선 넌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 등은 2011년 400년간 지속된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회적 신뢰가 낮아졌고 경제성장률 저하로 이어졌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과·보상 없어… 요원한 과거 청산

노예무역의 진정한 과거 청산은 가해국들의 사과와 피해 보상이다. 하지만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미국 등 가해국들은 노예제가 폐지된 지 130년이 넘도록 이를 거부하고 있다. 노예무역의 최대 수혜국인 영국부터가 그렇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2007년 흑인 노예들의 고통에 대해 “심히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자성의 목소리를 낸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배상 소송의 우려 탓에 직접적인 사과를 피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도 2006년 노예제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일을 지켜나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미국은 상원과 하원이 2008년과 2009년에 각각 노예제 사과 결의안을 채택하고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사과는 기약이 없다.

자메이카를 비롯한 카리브 공동체(CARICOM·카리콤) 15개 회원국은 유럽 국가들의 노예 가혹행위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요구한다. 카리콤 배상위원회의 힐러리 베클스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노예를 통해 금전적인 이득을 취한 이들의 과거 청산 노력은 사과로 끝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발언은 영국의 유명 펍 체인 그린 킹과 보험 업체인 로이즈가 지난달 17일 노예무역 과거에 대해 사과한 뒤 나왔다. 그린 킹의 설립자는 카리브해에 노예를 거느린 농장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로이즈는 노예 무역선에 해양 보험을 판매해 큰 부를 쌓았다. 베클스 위원장은 “영국 회사들은 카리브해 지역의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라”고 촉구했다. 배상 없이는 전 세계 흑인사회와 화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슬람 국가선 ‘새하얀 금’ 백인 노예들 신음

 

흑인들만 노예무역의 상품이 된 건 아니었다. 16~19세기 유럽 국가들이 흑인노예무역에 집중하고 있을 때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와 오스만 제국 내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등에선 백인 노예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해적들이 백인 노예 공급처 역할을 했다. 북아프리카 항구도시를 거점으로 한 바르바리 해적은 150만~200만명의 유럽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겼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선박 수천 척과 해안 마을 주민들이 해적들의 먹잇감이 됐다. 해적들은 1554년 이탈리아 남부 비스테를 공격해 주민 7000명을 노예로 잡아가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이 그들을 해군으로 하청해 서유럽을 견제했기에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슬람교도 해적들에게 기독교도 노예 사냥은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비쳐졌다. 남자가 2~3배 많았던 대서양의 흑인 노예무역과 달리 아랍의 백인 노예 매매는 여자가 더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이슬람 국가 남성들이 백인 첩을 많이 원했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은 해적 피해가 심각했지만 백인 노예의 몸값을 제공하는 등 유화책을 썼다. 내전과 종교전쟁,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 시달린 탓에 해적 퇴치에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일스 밀턴의 저서 ‘화이트 골드’에는 영국 출신 11세 소년이 1716년 선원 51명과 함께 해적들에게 끌려가 모로코 술탄의 노예로 갖은 고초를 겪다 23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백인 노예 무역은 1816년 영국, 네덜란드 연합 함대가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인 알제를 포격으로 초토화시키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김환기 논설위원 kgk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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