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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예술가들이 바라본 80년대, 그리고 오늘의 모습은

입력 : 2020-07-03 02:00:00 수정 : 2020-07-02 20: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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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발언’ 동인 16인 ‘그림과 말 2020’ 전 / 심정수·신경호 등 회화·판화·설치 작품 106점 선봬 / 발언·미술의 자유 없던 시대의 한 작품에 담겨 / ‘진행형 프로젝트룸’ 설치, 관객과 직접 대면도
‘현실과 발언’ 초창기인 1982년 줄서기 포즈를 취한 회원들. 왼쪽부터 김정헌, 성완경, 노원희, 이태호, 김건희, 최민, 윤범모, 김용태, 임옥상, 강요배.

당장 맨발로 거리에 뛰쳐나갈 것 같은, 각각 저마다 당차게 생동하는 작품들이 서울 종로구 소격동 갤러리 학고재 안에 ‘가둬져’ 관람객을 만난다. 팔팔한 청년 정신으로 후끈한 그곳은 지난 1일 개막한 ‘그림과 말 2020’전이다.

주인공들은 ‘현실과 발언’(현발) 동인 16인. 강요배, 김건희, 김정헌, 노원희, 민정기, 박불똥, 박재동, 성완경, 손장섭, 신경호, 심정수, 안규철, 이태호, 임옥상, 정동석, 주재환이 회화와 판화, 설치, 사진 등 작품 106점을 내놓았다. 현발 활동을 하던 청년기와 최근 활동, 두 범주에서 각각 작품을 골라냈다.

현발은 말을 금지당했던 유신시대에 모여 말할 자유, 미술의 자유를 고민하다 1980년 창립해 10년간 활동한 단체다. 박재동은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모든 그림은 말을 한다. 속삭임으로든 침묵으로든. 그러나 할 수 없는 말이 있었다.(중략)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의 아픔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범죄였다.” 이들은 해산한 지 20년이 됐던 2010년에 현발 30주년 기념 전시를 했고 이후 10년 만인 올해, 다시 모였다.

현발의 ‘그림과 말 2020’ 홍보 포스터. 왼쪽부터 손장섭, 주재환, 심정수, 성완경, 김건희, 김정헌, 노원희, 정동석, 민정기, 신경호, 임옥상, 이태호, 강요배, 박재동, 안규철, 박불똥.

40주년이라는 부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참여 작가 박불똥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내놓은 ‘작가의 말’에서 “현발 40년, ‘40주년에 상당할 만큼의 사전준비가 충분히 된 건 아니니 그 수식어를 내걸진 말자’, 언론에 ‘어언 60대, 70대, 80대 노년기로 접어든 동인 선후배들 간 정담이나 새삼 나누는 소박한 자축연 자리 정도로 언급되게 하자’ 하였으되 이번 행사가 미술계에 과연 그렇게만 비치고 말까” 하고 걱정한다. 이어 “현발 40주년 타령은 당연히 나올 테고 개중에는 눈을 흘기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필시 있을 것”이라며 “외면 않고 응시”하자고, 동인들에게 제안한다.

심정수 ‘사슬을 끊고’

이에 심정수는 1980년대 한 청년이 억압의 사슬과 장벽을 끊어내려 문을 열고 나오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작품 ‘사슬을 끊고’를 꺼냈다. 이와 함께, 천둥 치는 하늘과 날아가는 새, 노 젓는 사람을 순환하는 원 안에 표현한 최근작 ‘새가 있는 풍경’을 내놓았다. 그는 “사람의 따뜻한 정신과 애절함, 연민의 정, 인간성을 찾고 싶다”는 작가 노트를 남겼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

신경호는 1980년, 5·18 직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기와지붕 위 망자의 붉은 옷이 나부끼는 모습을 그린 ‘넋이라도 있고 없고-초혼’을 내놓았다. 이 그림은 전두환 정권 당시 “붉은 치마 나부끼는 모양이 빨갱이 단체의 상징 깃발 같다”는 이유로 불온작품으로 분류, 국가에 압류당했다 20여년 만에 돌려받은 작품이다. 함께 내놓은 작품은 2014년 ‘넋이라도 있고 없고-칼보다 강한 그대에게’다. 단단한 돌덩이에 연약한 붓이 꽂혀 있고 옳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뒤 구슬피 우는 청개구리가 뉘여 있다. “척박한 현실에도 옳은 소리를 했던 언론이 있었기에 지은 이름”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청년 현발과 노년 현발을 비교하며 들여다보는 재미에도 빠져들게 된다. 성에를 지우며 신문을 읽는 듯한 장면이 마치 진실을 닦아가며 볼 것을 요구하는 청년 임옥상의 작품(‘신문 땅굴’)과 이제는 세상을 캔버스 삼아 대지에서 작업하겠다며 흙으로 펼친 노년 임옥상의 작품(‘흙’)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민정기 ’1939년’

민정기의 ‘1939’를 보면 현발 40년 세월에도, 이들은 할 말이 더 많아진 것처럼 보인다. 절정의 색채를 뽐내는 바위산 인왕산에 ‘천황폐하 만세 조선총독부교무국’이 새겨졌다. 캔버스 위에 실제 음각으로도 표현된 문자의 주변은 사람 피부에 긁어버린 상처처럼 불그스름하게 표현됐다. 일제 만행으로 인한 통증까지 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야심 찬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바로 ‘진행형 프로젝트 룸’이다.

프로젝트 룸은 전시가 진행되는 한 달 내내 작가들이 오고 가며 작품활동을 실시간으로 진행하기로 한 공간이다. 작가들이 동시다발로 프로젝트 룸에 출몰해 자기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동인은 앞사람 작업을 이어갈 수도 있고, 재해석할 수도, 파괴할 수도 있다. 각자 자기 일이나 할지도 모른다. 김지연 큐레이터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어떤 날의 관람객은 이 거장 반골 여러 명을 현장에서 만나 작품을 지켜보거나 제작에 참여할 수 있다. 어떤 날의 관람객은 아무도 만나지 못할 수 있다. 일단 전시장이 문을 연 1일에 벌어진 일이 힌트다. 이날 박불똥은 이젤과 붓 빠는 걸레, 의자, 방석을 놓고 화실을 꾸몄다. 초상화 그릴 준비였다고 한다. 현장에 출몰한 동인을 그릴지, 관람객을 그릴지는 미정이다.

성완경은 프로젝트 룸에 붙일 사진을 고르려 바닥에 펼쳐두기 시작했는데, 생각이 많은 탓에 과연 마지막 날까지 고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태호는 아마도 판화로 포스터를 계속 생산하고 벽에 붙여나갈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주인공은 김수영 시인이거나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일 수 있다. 프로젝트 룸은 백발에 장발을 한 할아버지, 백발에 쇼트커트를 한 할머니의 몸에 갇힌 청년들이 박제된 예술이고 싶지 않아서 심장 소리를 쿵쾅대는 방이 될 전망이다. 한 달 뒤 전시가 끝나면 현발 동인 16명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할지 기대된다.

이태호 ‘그대의 헌신, 우리의 감사’

전시는 오는 31일까지다. 전시 기간 부대 행사로 토론회가 두 번 열린다. 11일에 ‘1980의 발언과 2020의 발언’을 주제로, 25일에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미술’을 다룬다. 학고재는 각 토론 일주일 전에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로 참가 신청 방법을 안내할 예정이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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