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남북 간의 모든 연락채널을 차단하면서 2018년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와 북한 대표팀의 평창동계올림픽 참석 이후 모처럼 열렸던 남북 간의 ‘데탕트’가 멀어지고 대립관계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북한이 ‘대적사업’으로 규정하고 연락채널 차단을 행동계획의 ‘1단계’로 예고하면서 향후 연락사무소 폐쇄, 개성공단 완전 철거, 9·19 남북군사합의 파기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10일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경우에 따라서 2018년 이전으로 남북관계가 회귀할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상황변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조언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정세 속에서 남북관계는 변화 모멘텀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야”

먼저 북한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야 이에 맞춰 대응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런 상황을 맞을 때마다 우리 방식으로 문제를 해석하면 해결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남북, 북·미 대화 국면에서 누적된 실망과 좌절을 맛본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라는 얘기다.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나온 발언을 종합하면 북한은 영변핵시설 폐기 제안이 굉장히 큰 포기였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제안에 미국이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도 이날 통일연구원 주최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반도 정세와 평화프로세스’ 토론회에서 “북한의 의도를 읽는 데서 한국은 상당 부분 패착을 거듭했다”고 지적했다. 금강산 관광지구 철거 요구를 관광협력을 원하는 신호로 해석하고 개별관광 허용으로 대응하거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국면에서 방역협력, 교류협력법 개정과 같은 지엽적 문제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과감한 프레임 전환 필요”
전문가들은 과감한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여러 ‘프레임 전환’의 예를 제시했다. 홍 실장은 “남북관계를 북·미관계나 비핵화에 종속된 위상으로 보지 않고 남북한 사이의 상호안전보장이란 차원에서 접근하는 과감한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핵화 문제가 아니면 남북관계에 아예 진입하지 못하는 단선적 접근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홍 실장은 2018년 남북 간 합의했던 군사회담의 틀이 지난 2년간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북·미 교착의 근본 원인은 제재와 비핵화에 대한 인식차다. 김준형 원장은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분법적 접근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문제와 관련해 보건협력의 경우 현 제재 체계가 허락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건드리는 시도를 할 수 있어야 북한의 호응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김 원장은 병원 건설, 의료용품 지원 등은 제재 항목이지만 인도적 지원 명분으로 이를 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너무 복잡하게 볼 것이 아니라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대북전단 살포를 남북 합의의 불이행으로 이해하는 만큼, 합의 이행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해법을 보여줘서 북한의 ‘다음 단계’에 대한 명분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북한이 ‘적대행위로의 태도 전환’을 포기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개성공단 완전 철거, 군사합의 위반 등의 2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판은 될 수 있다는 것이 양 교수의 생각이다. 양 교수는 “그렇더라도 전단 살포 금지가 북한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안전과 대법원 판례와의 조화를 위한 조치임을 명확히 대내외에 밝힐 필요가 있다”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세현 수석부의장도 이날 회고록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정부가 대북전단 살포를 제한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김여정 담화에 놀라서 추진하자는 게 아니라, 원래 판문점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로 정한 내용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행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수석부의장은 “북한의 국내외 정세가 변하고 남측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면 언제든지 (통신선이) 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통일연구원 토론회에서 “최고위급 특사를 파견해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며 “북한의 두번째 조치가 나오기 전에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형식과 의제를 불문하고 과감하고 파격적인 정상회담으로 남북한 사이 신뢰관계를 형성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인내 전략도 필요”
아무리 새로운 시도와 과감한 프레임 전환을 하려고 해도 근본적으로 북한과 미국의 인식차가 계속되는 한 상황은 쉽지 않다. 일단은 상황을 보면서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정부가 남북관계를 앞세워 북·미관계를 추동하도록 한다고 했지만 결국 북한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며 “일단은 위기관리를 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북한이 이미 ‘적대관계’를 선언한 이상 한·미가 다른 목소리를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단순히 대북전단 살포만으로 북한이 지금 이 같은 행보를 보인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뭔가 하려고 하기보다 상황을 주시하면서 인내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라고 밝혔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는 얘기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도 “남북관계는 언제든지 상황이 바뀌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주변 정세를 보면서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 센터장은 “중국이 북한을 얼마나 지원하는지에 따라 하반기 정도에 심화하는 북한의 경제난 속에서 한국정부의 인도적 지원으로 모멘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의 태도 변화에 일희일비하다가는 새 요구에 끌려다닐 수 있다”며 “우리의 원칙을 갖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주형·백소용 기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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