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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대구, 중세 유럽 세력판도 바꾸다

입력 : 2020-05-23 03:00:00 수정 : 2020-05-22 18: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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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기독교 성욕억제 식량으로 이용 / 엄청난 생선 수요 창출 거대시장 등장 / 네덜란드, 최대 어업강국으로 급부상 / 신항로 개척시대 거대한 대구떼 발견 / 美 초기 이민자들 생존에 절대적 영향 / 독립 쟁취에도 한몫… 자유의 상징으로

책 제목에서 보듯 인류의 중요한 식량자원인 물고기가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했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저자는 주저 없이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류가 번성하고 번영하기는커녕 생존하는 일 자체가 녹록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이룩해낸 찬란한 문명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적어도 13~17세기 ‘청어’와 ‘대구’는 유럽 국가들의 부의 원천이자 중요한 전략 자원이었으며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였다는 것이다. 책은 어떻게 청어가 유럽 세력 판도를 바꾸고, 대구 떼가 신항로 개척시대의 역사를 돌렸는지, 미국 독립혁명 당시 ‘자유’의 상징이 됐는지 등에 관해 설명한다.

1895년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미국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 ‘자유’ 상징으로 걸려 있는 대구 조형물. 사람과나무사이 제공

중세시대엔 성욕을 억제하기 위한 식량이자 도구로 기독교가 청어를 사용했는데 이 청어가 결국 경제 판도를 바꾸고 유럽사와 세계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해서 엄격히 금지했다. 마음속에 성욕이 불같이 일어나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이유다. 특히 기독교는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1년 중 거의 절반이나 되는 기간을 ‘단식일’로 정해 엄격히 지켰다. 그렇지만 1년의 절반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식일에도 적은 양이나마 뭔가를 반드시 먹어야 했는데, 그 대안이 생선이었다. 생선은 ‘차가운 고기’라 하여 성욕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후 단식일에도 생선만은 먹는 것이 허용됐다. 한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식일에 단지 생선 먹는 일을 허용하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생선 먹는 날’로 변화해 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단식일이 ‘피시 데이’로 바뀌고 엄격히 시행됐다. 이렇게 되자 중세 기독교가 만든 피시 데이 관습은 엄청난 생선 수요를 창출했고 거대한 시장 형성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업이 발달했으며 어업 장려 운동도 일어났다. 복합적 경제 시스템이 구축됐고, 그 시스템을 장악한 상인연합세력 한자동맹(Hanseatic League)과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 네덜란드가 등장했다.

청어의 이동 경로 변화는 13~17세기 유럽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어놓았다. 13세기 초반 무렵 발트해 연안의 도시 뤼베크 근해에서 어부들이 거대한 청어 떼를 발견했다. 곧이어 인근 도시 어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청어잡이에 나서면서 청어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청어 시장 규모가 급속히 커짐에 따라 발트해 연안 도시의 상인들이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동맹을 결성했다. 1241년의 뤼베크와 함부르크 간 동맹 결성이 시초였는데 이는 유명한 한자동맹의 원류가 됐다. 한자동맹은 점점 규모가 점점 커지더니 얼마 후 수십 개의 도시가 참여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바야흐로 한자동맹은 유럽의 경제적 패권을 장악했으며 그 패권은 200년 가까이 이어졌다.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오치 도시유키/서수지/사람과 나무사이/1만7000원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한자동맹의 경제적 패권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결정적 원인은 청어 떼가 갑작스럽게 산란 장소와 회유 경로를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꾼 데 있었다. 이 작지만 큰 변화 하나로 한자동맹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통을 북해 연안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가 이어받았다. 이로써 그전까지 강대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며 존재감이 전혀 없던 나라 네덜란드가 족쇄를 벗어던지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했다. 네덜란드가 청어를 중심으로 유럽 최대 어업 강국이 되고, 더 나아가 17세기 헤게모니 국가로 발돋움하여 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빌럼 벤켈소어라는 어부가 개발한 ‘소금에 절인 청어’가 큰 몫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책은 ‘대구떼’가 신항로 개척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설명한다. 베네치아 시민이었던 존 캐벗은 1496년 3월 헨리 7세에게 특허를 얻어 브리스틀에서 서쪽을 향해 출항했다. 서쪽으로 도는 아시아 항로, 즉 당시 황금의 섬 ‘지팡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일본으로 가는 항로였다. 존 캐벗은 목적지 지팡구에 도달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배가 도착한 곳은 북아메리카대륙 인근 어느 섬의 어느 항구였다. 항해 도중 일어난 실수로 항로가 바뀐 탓이었다. 그의 배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 상륙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뉴펀들랜드섬의 보나비스타(Bonavista)항으로 추정하는 학자가 많다. 그는 손에 넣고 싶어 했던 금·은 보석과 향신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그에 못지않은, 훨씬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해수면이 불룩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대구 떼였다. 존 캐벗이 이끄는 선박이 원래 가고자 했던 항로를 벗어나 실수로 다다른 뉴펀들랜드섬 연안에서 발견한 거대한 대구 떼가 이후 신항로 개척시대의 물줄기를 돌렸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는 ‘대구 상’이 걸려 있어 본회의가 진행될 때마다 빠짐없이 지켜본다. 이 대구 상은 1895년 의회당 이전 때 예전에 걸려 있던 것을 정중히 국기로 감싼 다음 함대에 실어 수많은 사람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새 의회당에 옮겨놓은 것이다. 이 대구상은 지역 일간지 ‘보스턴글로브’에서 ‘성스러운 대구(Sacred Cod)’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고 세상에 알려졌다.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 몇 백 년 동안이나 대구 상이 걸리고 성스러운 대구라는 존경과 찬사가 담긴 별칭까지 얻게 된 이유는 뭘까. 첫째 잉글랜드를 떠나 북아메리카 서안에 도착한 초기 이민자들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 번영을 이루기까지 대구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둘째 대구는 신생국 아메리카가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자유정신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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