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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계곡의 봄, 연두로 물들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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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5-09 10:00:00 수정 : 2020-05-11 21: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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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머금은 영롱한 물빛...마음의 쉼표를 찍다/구룡계곡 나뭇가지마다 파릇한 새순들의 합창/용의 전설 품은 구룡소엔 하늘과 뭉게구름 투영/신선이 노닌 듯한 풍경에 웅크렸던 마음 활짝∼/이끼로 덮인 바위틈 시원한 계속 물소리/황장목숲길 푹신푹신 피톤치드 온몸 감싸

 

에메랄드빛 ‘연못’에 파장을 그리며 작은 폭포가 쏟아진다. 신선이 노닐었나. 이토록 신비로울 수가. 작은 돌멩이까지 보이는 투명한 물속으로 당장 ‘풍덩’ 뛰어들고 싶다. 치악산 구룡소 물가에는 겨우내 쌓인 갈색 낙엽이 여전하다. 하지만 나뭇가지는 새순이 올라 마치 아가의 뽀송뽀송한 피부처럼 연두색을 수줍게 내보인다. 그리고 연못에 담기는 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 예쁜 봄의 색들이 저마다 매력을 뽐내며 어우러지니 이제 코로나19의 오랜 억압에서 벗어난 듯하다. 두 팔을 활짝 펴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켠다.

 

구룡소 흔들다리
구룡소
황장목숲길 입구

#치악산 구룡계곡, 연두로 물들다

 

강원도 원주 치악산 구룡계곡에 봄이 왔다. 나뭇가지마다 새로 돋은 잎들이 점점 커지며 여름의 울창한 녹음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는 중이다. 힐링의 숲을 꾸민 나무들에 감사하며 1400년 천년 고찰 구룡사를 향해 느리게 걸음을 옮긴다.

 

매표소를 지나 구룡교를 건너면 왼쪽이 황장목숲길이다. 오른쪽은 일주문을 지나 구룡사로 오르는 길. 양쪽 모두 구룡사 앞에서 합쳐져 구룡소로 이어지니 어느 길로 가도 괜찮다. 하지만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탐방거리두기’를 해달라는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의 안내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오를 때는 왼쪽 황장목숲길, 돌아올 때는 오른쪽 일주문길로 일방통행을 만들어 탐방객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

 

황장목숲길

황장목숲길로 들어선다. 흙길은 푹신푹신하고 산책로는 새들의 지저귐이 가득해 마치 고향에 온 듯 정겹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소나무들 사이에 서니 늠름하게 도열한 백전노장들의 인사를 받는 왕이 된 기분이다. 흙에서 올라오는 봄내음과 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온몸을 감싸니 걷는 것만으로 힐링이다. 코로나19가 앗아간 봄을 드디어 되찾았나 보다. 한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불안감과 답답함은 이내 사라진다.

 

황장목숲길

치악산은 수령 100~200년 된 금강소나무 7만5000그루가 빽빽하다. 매표소에서 구룡사까지는 1.1km 남짓이지만 키가 20∼30m에 달하는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으며 고즈넉한 숲길을 만들어 놓았다. 국내 최대 금강소나무 군락지인 경북 울진 소광리 일대에 버금갈 정도다. 2013년 6월 치악산 북쪽 자락인 구룡지구에 금강소나무숲길이 열렸고 지금은 황장목숲길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곳의 금강소나무가 나무 안쪽 색깔이 누렇고 단단해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는 ‘황장목(黃腸木)’으로 지정됐던 역사 때문이다.

 

매표소 부근 황장금표

당시 전국에는 황장목 보호림이 30여곳에 달했는데 ‘황장금표(黃腸禁標)’를 세워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철저하게 숲을 보호했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에 나타나는 바위에 황장금표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뤄 여기서부터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미지의 숲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후손들은 훼손되지 않은 원형의 자연경관을 품게 됐다. 일상의 번잡함을 벗어나 마음에 쉼표를 찍을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

 

구룡계곡
구룡계곡 전망대

#용이 살아 더 신비로운 구룡소의 봄

 

치악산은 사계절 모두 아름다워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원래 ‘적악산(赤嶽山)’으로 불렸을 정도로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하지만 봄에는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고 진달래와 철쭉꽃이 지천으로 핀다. 여름의 울창한 금강소나무숲, 겨울의 미로봉을 수놓는 눈꽃도 절경이다. 특히 봄이면 기암괴석이 산수화를 그려놓은 계곡을 따라 나무가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은 생명을 잉태하는 신비로움을 담는다.

 

구룡사로 오르는 구룡계곡은 대부분 통제됐지만 몇 곳 개방돼 있기에 아래로 내려가 본다. 시원한 계곡 물소리, 이끼로 덮인 바위,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다 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중간 데크길에는 넓은 전망대도 마련돼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계곡을 감상하기 좋다.

 

구룡소

계곡의 백미는 구룡소. 구룡사에서 세렴폭포 쪽으로 500m 정도 걷다 보면 흔들다리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깊숙한 틈에서 폭포가 쏟아져 나오며 구룡소를 만들고 있다. 아홉 마리 용과 구룡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도술 시합을 벌인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진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던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6년(666년)에 명산인 치악산에 큰 절을 세우려고 구령골로 접어든다. 그런데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는 연못. 이에 의상대사는 연못을 메우려다 그곳에 사는 아홉 마리 용과 실랑이가 벌어졌고 내기에서 이긴 쪽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용은 재주를 부려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게 했지만 미리 예상한 의상대사는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매어 놓고 태연하게 낮잠을 즐겼다. 이번에는 의상대사 차례. 부적을 그려 연못에 던지자 물이 뜨겁게 끓어올랐고 결국 견디지 못한 용들은 하늘로 도망쳤다.

 

구룡소
구룡소

눈이 먼 용 한 마리는 달아나지 못해 근처 연못으로 숨어들었는데 바로 구룡소다. 용은 이곳에서 500년을 살다 거북이의 등에 업혀 5리를 더 올라가 폭포에 몸을 씻은 뒤 몸과 마음의 눈을 떠 승천했단다. 바로 마음의 잡념을 씻어준다는 세렴폭포다. 폭포가 만들어내는 구룡소의 물빛이 아주 영롱한데 방금까지 용이 머물고 있었던 듯 신비로워 한참을 바라본다.

 

구룡계곡 야생화

#구룡사 거북바위를 찾아라

 

출렁다리를 건너 더 오르면 곳곳에 이름 모를 예쁜 야생화들이 계곡을 수놓고 있다. 한꺼번에 모아놓은 것보다 붓으로 꾹꾹 누른 듯, 띄엄띄엄 존재감을 드러내니 여백의 미가 더 돋보인다. 세렴폭포까지는 1.7km, 비로봉까지는 4.4km를 올라야 하는데 출렁다리 인근까지만 걸어도 구룡계곡의 아름다운 봄을 만끽하기 충분하다.

 

구룡사 입구
구룡사 보광루

돌아 나오는 길에 구룡사로 향한다. 사천왕문과 구도의 계단을 오르고 ‘치악산 구룡사’ 현판이 달린 보광루 아래를 통과해야 대웅전이 나타난다. 마침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많은 이들이 소원 담긴 쪽지를 연등에 매다느라 분주하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가만히 눈을 감고 소원 하나를 빌어본다.

 

대웅전을 뒤로 두고 앞산을 바라보니 ‘용’들의 흔적이 보인다. 대웅전 자리 연못에서 달아나던 여덟 마리 용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로 쪼개버렸는데 세어보니 신기하게도 능선이 8개다. 아홉 마리 용의 설화가 담겼지만 구룡사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거북이다. 구룡교 입구에서 용머리와 거북이를 만나고, 구룡사 사천왕문에 도달하면 왼쪽에도 거북이 조각이다. 왜 거북이일까. 구룡사(龜龍寺)는 아홉 ‘구(九)’ 대신 거북 ‘구(龜)’ 자를 쓰는데 설화가 전해진다.

 

구룡다리 입구 거북이 조형물
구룡사 앞산 능선
구룡사 대웅전
구룡사 연화당

구룡사는 한때 농민들이 수확한 치악산의 산나물을 궁궐에 납품하는 일을 관리할 정도로 번성했다. 하지만 농민들에게서 뇌물을 받으면서 수양도장의 모습을 저버리고 정신적인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날 한 스님이 찾아와 “절 입구 거북바위를 쪼개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해 이를 따랐지만 절은 더욱 쇠락해 갔다. 이번에는 도승이 찾았는데 “절운을 지키던 거북바위를 두 동강으로 잘라 혈맥이 끊어져 운이 막혔다”고 진단했고 이에 훼손된 거북바위를 되살리기 위해 거북 ‘구’ 자를 써 구룡사로 이름을 바꿔 달았단다.

 

구룡사 입구 거북바위
거북바위 등에 새겨진 龜龍洞天

설화 속 거북바위를 보기 위해 구룡사 근처를 아무리 뒤져봐도 눈에 띄지 않는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일행 한 명이 “여기 거북바위가 있다”고 외친다. 구룡사 입구 산책로 눈에 잘 띄는 곳에 방치된 커다란 바위 하나. 간단한 안내 표지판도 없는 바위는 거뭇거뭇한 이끼로 덮여 있다. 오랜 세월을 한자리에서 버텼나 보다. 가만히 보니 목이 잘려나간 영락없는 거북바위로 구룡사를 향해 몸을 쳐들고 있다. 등에는 ‘龜龍洞天(구룡동천)’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동천’은 신선이 사는 절경을 말한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뜻도 담겼는데 이곳이 과거 치악산에서 가장 아름다워 많은 이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나는 커다란 거북바위를 왜 못 찾았을까. 세렴폭포에 올라 마음의 때와 잡념을 더 닦아야 하나 보다. 

 

원주=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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