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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반환 도운 ‘용감한 형제’ “한지의 우수성 세계에 알려야죠”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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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3-01 10:00:00 수정 : 2020-02-29 17: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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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종이’ 김성중·김민중 이사 / 佛서 우주공학 전문가 꿈꾸던 민중씨 / 와인학교 졸업 유통사업 하던 성중씨 / 반환 공신 박병선 박사와 만나 전환점 / ‘미래에서 온 종이’ 설립 우수성 전파 / 2019년 11월 두번째 한지 컨퍼런스 개최 / 루브르 보존硏과 동·서양의 종이 연구 / 최적 복원용 종이 찾기 프로젝트 진행 / 문화재 복원학교 설립해 인력 양성 꿈

2011년 타계한 재불 학자 박병선 박사. 그는 1972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직지심경)의 존재를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린 인물로 ‘직지 대모’로 불린다. 그는 또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의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1979년 처음 밝혀냈다. 평생을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앞장선 노력은 2011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297권이 145년 만에 반환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의궤를 돌려받기 위한 연구의 핵심은 약탈 당시 프랑스 함대를 이끈 극동함대 로즈 제독이 프랑스 총리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분석하는 일. 반환 당위성이 바로 그 편지 안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까지 박사를 도운 숨은 젊은 연구자가 두 명 있었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능력을 발휘해 고문서를 번역하고 분석한 김성중(38), 김민중(33)씨 형제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우주공학 전문가를 꿈꾸던 민중씨와 프랑스 와인학교를 졸업하고 와인 유통사업을 하던 성중씨는 박 박사와의 만남 뒤 우리 문화의 우수성에 매료, 사단법인 ‘미래에서 온 종이’를 만들어 루브르 박물관과 협업하며 복원재료로써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전 세계 박물관에 알리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만에 한국을 찾은 형제를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 만났다.

#프랑스에 홀로 남겨진 소년 문화재 복원사 되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두 사람. 멀리서도 한눈에 형제임을 알겠다. 키는 다르지만 얼굴이 붕어빵처럼 닮았다. 동생 민중씨는 조기 유학파.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다. 중학교 2년 때 프랑스 파리 여행인 줄로만 알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선교사의 집에 홀로 남겨졌다.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니 어머니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편지 한 장만 남았더군요.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어머니는 한국행 비행기 안에 있을 것이고 저는 앞으로 파리에 남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너무 깜짝 놀랐고 눈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하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일까.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선교사와의 생활은 금세 익숙해졌다. 에펠탑을 너무도 보고 싶을 정도로 프랑스 문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파리생활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주공학 전문가를 꿈꿔 파리12대학 공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둬야 했다. 부모님이 공대 전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상황에서 외환위기가 터져 유로당 1000원이던 환율이 2100원까지 치솟자 생활비 지원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가 형이 알던 교수님을 통해 2007년 박 박사님과 일하게 됐죠. 직지문화연구소 연구원이 돼 외규장각 관련 고문서들을 번역하는 일을 형과 함께 도왔어요. 4년 정도 함께 작업했는데 의궤가 반환되자 너무 뿌듯했답니다.”

박 박사와의 만남은 민중씨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직지심체요절을 통해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게 됐고 결국 문화재 복원가로 진로를 확 틀었다. 파리1대학 보존복원학과와 INP보존연구소는 프랑스 문화재 보존복원 전문가를 키워내는 양대 산맥. 하지만 1년에 두 곳에서 각각 3∼4명씩만 뽑으니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INP보존연구소에 지원했다 떨어진 민중씨는 1년을 더 준비해 파리10대학 예술사 전공에 합격했다. 이곳에서 3년 과정을 마쳐 자격을 갖춘 민중씨는 바늘구멍을 뚫고 파리1대학(소르본대학) 미술품 보존복원학과에 합격했다. 민중씨는 4년 과정을 모두 마친 뒤 꿈에 그리던 루브르 박물관 복원실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급 인턴으로 취업했다.

#루브르, 전통 한지의 우수성에 눈을 뜨다

파리1대학에서 문화재 복원재료 연구에 심취해 있던 민중씨가 쓴 석사 논문은 한국·일본·중국의 전통 종이를 비교하는 내용. 이 논문을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오는 모든 복원 재료를 심사하는 아리안 드 라 샤펠 보존복원연구소장이 읽으면서 전통 한지의 우수성이 루브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전공을 살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복무했는데 전역 두 달 뒤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형 사건’이 벌어진다. 2017년 11월 24일 한지 콘퍼런스가 개최돼 전통 한지를 이용해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2세의 책상을 복원한 사례 등이 발표됐다. “전 세계 박물관의 복원 소재는 99%가 일본 화지예요. 전통 한지의 존재조차 모르던 박물관 관계자들이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알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겁니다.”

두번째 한지 콘퍼런스가 성중·민중씨 형제가 세운 ‘미래에서 온 종이’의 주도로 지난해 11월 1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렸다. 루브르 박물관 안드레 르프라트 복원실장의 사회로 열린 콘퍼런스는 250명 수용 강당에 500명이 몰릴 정도로 큰 관심을 불러 모았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9세기에 만든 쿠란을 한지로 복원한 사례를 발표했습니다. 복원에 직접 참여했는데 굉장히 질긴 쿠란의 양피지를 강하게 잡아줄 종이가 필요했고 화지보다 훨씬 강도가 높아 웬만해서는 찢어지지 않는 한지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는데 좋은 성과를 이뤘습니다. 제작 때 세로로만 뜨는 일본 화지는 섬유 자체가 한쪽 방향으로 잘 찢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전통 한지는 가로와 세로로 동시에 뜨기 때문에 양쪽 방향 모두 다 질깁니다. 복원은 영구성이 가장 중요하고 전통 한지가 이런 복원에 합당한 소재로 인정받은 겁니다.”

콘퍼런스에서는 일제 강점기 반출된 한국 병풍과 가구, 프랑스 화가 앙투안 장 그로의 스케치북 복원에 성공적으로 전통 한지를 사용한 사례도 발표됐다. “전 세계 모든 박물관은 복원 소재로 일본 화지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루브르도 전통 한지의 존재를 안 지 얼마 안 돼요. 맏형 격인 루브르가 전통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다른 박물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될 겁니다.” 콘퍼런스를 계기로 루브르 박물관은 전통 한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루이 14세의 궁정화가로 베르사유 궁전 내부 장식을 지휘한 샤를 르 뵝, 라파엘로 그림 등의 복원에도 전통 한지를 쓸 계획이다.

사단법인 ‘미래에서 온 종이’를 설립해 고미술품 복원 소재로 전통한지의 우수성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등에 알리고 있는 김성중(오른쪽)·민중 형제가 22일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현태 선임기자

#와인 팔아 동생의 꿈에 투자하다

사단법인 ‘미래에서 온 종이’는 형 성중씨가 주도했다. 그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엄친아’ 격인 민중씨와 달리 성중씨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바텐더와 소믈리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4살이던 2006년 와인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떠난 그는 와인유통 비즈니스에 눈을 떴다. 경매를 통해 구입한 프랑스 보르도와 부르고뉴 와인을 가격이 오르면 팔아 이익을 남기는 사업이었다. 한때 많을 때는 고가의 와인 5000병을 보유했고 덕분에 돈도 꽤 모았단다. 파리4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익힌 뒤 와인을 좀 더 깊게 파고들기 위해 2008년 디종의 유명한 와인교육대학원 ‘ESC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2년 동안 와인마케팅을 공부한 성중씨는 와인유통회사 ‘아베크뱅’을 차려 한국에 유명 샴페인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소믈리에조차 샴페인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 자크 셀로스, 다비드 레클라파, 엠마뉴엘 브로셰, 조지 라발 등이 그의 손을 거쳐 한국에 알려졌다. 또 2015년 와인 투어 회사를 설립, 샹파뉴와 부르고뉴 와이너리를 방문하고 미식을 맛보는 여행 사업을 시작했는데 한국의 많은 연예인, 기업 대표들이 그를 찾아왔다. 소유진이 출연하는 EBS 아틀라스 와인여행도 성중씨가 일주일 동안 함께 다니며 코디네이션한 작품이다.

이렇게 버는 돈은 이제 전통 한지 홍보에 쏟아붓고 있다. 성중씨는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지난해 11월 문화계와 기업 관계자 5명을 설득해 ‘미래에서 온 종이’를 설립했고 형제는 이사로 활동 중이다. 대표는 민경식 베이징 이로제 건축 소장이 맡았다. 법인은 이사들의 개인 돈으로 운영된다.

성중씨는 사재로는 한계가 있어 정부 기관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루브르 박물관 복원실장 등이 직접 한국까지 와서 콘퍼런스를 열었지만 정부 기관들은 도와주는 곳이 전혀 없더군요. 전주시가 조금 지원하고 대부분의 비용은 이사들의 사재로 충당해 행사를 진행했어요.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일인데 전혀 나 몰라라 하니 답답하네요.”

이처럼 어려운 상황이지만 형제는 개인 돈을 써가며 루브르 박물관 보존복원연구소와 10년짜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한국, 일본, 중국은 물론, 중동과 서양의 모든 전통 종이를 연구해 미술품 복원에 어떤 종이가 가장 적합한지 찾는 프로젝트로 2025년까지 진행된다. 민중씨는 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방법을 심도 있게 연구 중이다. 또 루브르 박물관은 2021년 5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종이 전시회를 여는데 민중씨는 전통 한지 쪽을 맡아 국내 한지 장인들과 함께 전시회를 준비 중이다.

앞으로 형제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민중씨는 문화재 복원학교를 설립해 전통 한지로 문화재를 복원하는 인력들을 양성하고 싶단다. “국내 복원 전문가들이 있지만 대부분 일본에서 화지로 복원하는 방법을 배웠고 우리나라 문화재마저 화지로 복원하는 실정이랍니다. 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방법을 아는 인력은 거의 없죠. 전통 한지를 사용하는 복원 전문가가 많이 생기면 전 세계 박물관들의 전통 한지 사용비율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성중씨는 와인 사업을 계속해 동생의 꿈에 투자할 계획이다. “와인과 전통 한지는 굉장히 닮아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한지도, 와인도 좋아지기 때문이죠. 시간이 지난 한지는 섬유질이 더 단단해져 값도 오르죠. 5년 정도 지난 종이가 더 좋답니다. 와인은 서양중심 문화이고 한지는 동양중심 문화죠. 동양 한지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와인을 한국에 소개하는 게 저의 천직인 것 같네요. 하하.”

 

글·사진=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김성중 이사는 △1982년 서울 출생 △잠실고-파리4대학 프랑스어 전공 △디종 ESC고등상업학교 와인마케팅 전공 △2010년 샴페인 유통 전문 아베크뱅 설립 △2015년 와인투어 전문 김성중소믈리에와인투어 설립△2019년 사단법인 미래에서 온 종이 창립

김민중 이사는 △1987년 서울 출생 △루이 아르망고-파리12대학 공학 전공-파리10대학 고고예술사 전공-파리1대학(소르본대) 미술품 보존복원학 석사 △2007∼ 2011년 청주 박병선 직지문화연구소 연구원 △2012∼2014년 국립 프랑스 도서관(BNF) 보존복원 인턴십 △2013∼2015년 루브르 박물관 보존복원 인턴쉽(로스차일드 컬렉션), 루브르 박물관 보존복원연구소 한지 연구 프로젝트 참여 △2017년 루브르 박물관 한지 국제컨퍼런스 ‘내일을 위한 어제의 종이’ 한국측 주최위원장 △2019년 법인 미래에서 온 종이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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