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에 이어 올해 극장가의 키워드는 여성 서사다. 지난해 ‘82년생 김지영’과 ‘벌새’, ‘겨울왕국 2’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버즈 오브 프레이’와 ‘작은 아씨들’, ‘블랙 위도우’ 등이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스타 의사인 안주연(43) 마인드맨션 원장은 이 같은 현상이 “미투(Me too) 운동의 영향”이라고 진단한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마인드맨션에서 만난 안 원장은 “미투는 ‘나도 당했다’가 아니라 ‘나도 말할 수 있다’, ‘나도 말하겠다’는 의미”라며 “할리우드뿐 아니라 한국영화계에서도 미투 운동이 있었는데 여성 창작자들이 연대감을 느끼면서 자기 이야기, 여성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 가을,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 추문 의혹이 폭로되며 세계적인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안 원장은 말하기의 힘을 강조했다.
“트라우마 치료법 중 ‘내러티브 노출 치료’란 게 있어요.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데, 이를 하나의 내러티브, 이야기로 구성해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회복할 수 있다는 거죠. 미투 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말하기의 힘을 느낀 게 아닐까요? 용기를 낸 피해자들이 나와서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거나 ‘가해자가 처벌을 받아야 한다’,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는 게 어떤 힘을 주는 부분이 있잖아요. 서로의 이야기들이 힘이 되는 거죠. 지난해 여성 서사 영화가 많았던 게 아니라 그 전에 너무 없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나올 수밖에 없겠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그가 처음부터 사회에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그는 “현대인의 정신 건강, 사회정신의학에 관심이 많은데, 우울이나 불안, 스트레스의 사회적 요인은 물론 환자들이 회복되고 사회에 돌아가는 데에도 어떤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더라”며 “10년 넘게 환자들과 대화하면서 거꾸로 사회화된 케이스”라고 웃어 보였다. 이어 “영화는 사람들 이야기처럼 서사이고 유사성이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안 원장은 지난해 최고의 영화로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꼽으면서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주인공 은희가 오빠에게 폭력을 당하는데 부모님은 모른 척하고, 학교에서도 폭력이 있고, 또 영지 선생님을 잃고 상처를 받잖아요. 내 잘못이 아니고, 이제 지났다는 애도와 안정화 과정을 거쳐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모습을 잘 그려 준 것 같아요.”
‘벌새’가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데 대해서는 “고도 성장기란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다루면서도 여성이 폭력에 노출되고 이 세계를 어떻게 견뎌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 보편성을 갖는 게 아닌가 싶다”며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 미래를 보여 주지 않는 것도 다 폭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한국 사회는 폭력은 물론 서열주의가 심해 세대 간 소통도, 사람을 사귀기도 어렵다”면서 ‘연결감’을 강조하고 나섰다.
“한국은 친구가 되기 어려운 나라예요. 친구의 범위가 너무 좁거든요. 같은 나이에 같은 성별의 사람만 친구가 될 수 있죠. 연결감은 어떻게 보면 소속감과 비슷한데, 한 개인으로 동등하게 서로 존중하면서 느슨하고 안전하게 연결돼 갖게 되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라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드니까 각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고 정신 건강, 정서적 환기에는 타인이 필요합니다.”
이는 2018년 스튜디오 마인드맨션이란 정신 건강 콘텐츠 연구소와 협업해 ‘연결감 워크숍’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것으로 출발했다. 지금은 번아웃(Burnout) 증후군 위기에 있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다.
안 원장은 “예술인은 인생의 괴로움이나 인간의 고통스러운 감정에 민감하고 솔직한 존재들이란 점에서 사회의 카나리아”라며 “예술인이 살기 힘든 사회는 모두가 고통스러운 사회이고, 예술인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성들에게 도전하는 한 해를 보내라고 조언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힘을 내서 뭔가 좀 해 보는 한 해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여성들이 도전하는 걸 어려워해요. 그렇게 키워지기도 했고, 완벽주의적 성향도 많죠. 여성 창작자들이 여성 서사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뭐든지 시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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