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김정일 위원장에게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은 단순히 북한에 대항해서만이 아니라 통일된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를 만나 5개월 전 평양에서 만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2000년 11월24일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한 자리에서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미·일·중·러 4대국에 둘러싸인 유일한 나라로, 청일·러일 두 번의 전쟁에 휘말린 후 결국은 일본에 병합된 역사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미군이 있어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한반도의 안정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에도 긴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나토가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도 세력균형을 위해 존속하는 것 아니냐고도 했다. 김정일은 이에 “대통령께서는 어쩌면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라며 “러시아와 중국, 일본 등 대국을 견제하기 위해선 미군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고 김 전 대통령은 전했다.
세력균형 와해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오랜 우려대로, 냉전으로 희미해졌던 지정학이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다시 부활하고 있다. 더구나 과학기술의 발달과 정보화 등으로 이른바 ‘하이브리드 지정학(hybrid geopolitics)’으로 확장하는 모양새다. 하이브리드 지정학은 경쟁이 더욱 치열하고 전략적인 방정식 역시 복잡하다. 문제는 하이브리드 지정학의 경향이 올해 한반도를 중심으로 더욱 강화할 전망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중국은 미국과 전방위적으로 전략 경쟁을 벌이며 자신의 구심력 속에 주변국을 끌어들이려 하는 등 하이브리드 지정학을 제대로 보여준다. 탈냉전 이후 영향력이 줄어든 러시아도 터키 등과 손잡고 중동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하는 한편 중국의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반면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인도·태평양전략을 추진하면서도 양자주의를 구사하고 있고, 유럽연합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해 구심력이 약화할 조짐이다.
아산정책연구원도 최근 이슈 브리프 ‘2020신지정학’에서 이같이 전망한 뒤 “하이브리드 지정학의 적용 영역은 더욱 다변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했다. 브리프는 그래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더 힘들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2020년 한국은 모호성의 이점을 상실할 수 있으며, 오히려 다중적 압력에 직면할 우려가 더 커질 것이다.” 즉 과거에는 세계적 차원의 경쟁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이르는 게 갈등의 진행 양상이었다면 이제는 “한반도 혹은 동북아가 광역 갈등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2020년엔 그 가능성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는 취지에서다.
다층적인 전략 방정식이 필요한 하이브리드 지정학 시대를 한국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궁극적으로 국력을 키워야겠지만 현실에선 역시 외교가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 진정한 ‘외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외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침체되기 시작했고 제2차 대전 이후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모겐소는 저서 ‘국가 간의 정치(Politics Among Nations)’에서 그 이유로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비밀 외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대신, 공개 회의식 외교가 각광 받았으며 냉전체제에서 미국과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모겐소는 국가 간에 전쟁을 할 게 아니라면 결국 외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설득하고 협상하면서 상대방에게 압력을 행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외교적 절차에 참여해야 하고, 그것을 개발하면서 그에 의존해야 한다.” 하이브리드 지정학의 시대, 지금이야말로 외교가 진가를 발휘할 때다.
김용출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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