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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 [신춘문예 - 문학평론]

입력 : 2020-01-03 05:00:00 수정 : 2020-01-02 21: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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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 김정빈 / 심사평 - 김주연 문학평론가

1. 너무 먼 슬픔

 

아주 오랫동안 문학은 슬픔을 다루었다. 최초의 서사는 비극이었고 문학은 슬픔에 기반한 모든 종류의 감정을 다뤘다. 슬픔에 빠진 이들은 점점 감정을 잃고 둔해진다. 슬픔에 빠진 소설 또한 그렇다. 인물들은 가만하고 둔해졌다. 한낮처럼 나른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인물이 어떻게 많은 사건을 지나가겠는가. 자연스럽게 서사가 해체되었다. 인물들에게 절정을 향해 박차고 오를 힘이 없기 때문에.

 

거대한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내가 했던 일은 그저 누워 있기였다. 그 어떤 생각도 하기 싫어서 페이스북 피드를 무한히 내리며 빠르게 이미지와 영상을 스쳐 보냈다. 형광빛 피가 튀기는 외계인 학살 애니메이션도 즐겨 보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신없음을 수용하며, 내 머릿속 모든 감정과 생각도 해체되기를 바랐다.

 

의욕 없음이 디폴트가 된 이들은 슬픔을 마주할 수 없다. 곧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부른 상황을 수습해야 하고 슬픔을 극복해야 하며, 그 이후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 이들의 최선은 슬픔을 방치하는 것이다. 그대로 말라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다. 간신히 일상을 영위하는 시늉만 보이며 시간을 흘려보내야 한다. 그들에게 슬픔은 소화하기 너무 버거운 무엇이다. 슬픔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고들고, 슬픔을 정통한 글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잔혹하게도 그들은 슬픔을 들고 기다릴 여유가 없다. 너무 슬퍼도 아침 7시에 일어나 9시까지 출근해야 한다. 여유를 가져라, 1~2주 정도 쉬고 오라, 말하는 상사도 없다. 현대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울증약 처방을 받으며 지금 당장 슬픔을 퇴치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해 가능한 만큼의 슬픔만 건져서 해결하거나 슬픔을 대체할 수 있는 손쉬운 쾌감을 찾아 나선다.

 

그림=조미형(화가)

2. 이해 가능한 만큼의 슬픔 : 신 도서류

 

어떤 부류는 슬픔을 어떻게든 소화하고자 쉽고 가벼운 글을 찾는다. 일상적이고, 소소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찾는다. 시도 소설도 친절하고 다정한 문장을 갖추길 바란다. 단순하고 따뜻한 글이 팔린다. 모든 인생이 어떻다는 식의 진리를 알려주는 어렵고 딱딱한 문장은 사절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공감 가능한 이야기,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슬픔이 필요하다. 자연히 에세이의 시대가 도래했다.

 

문학의 최대 난제는 문학이 난제라는 것이었다. 문단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대중문학이라 칭하며 적극적으로 집단에서 배제했다. 문학다운 문학은 문단 내에서 심의를 거친 수상작을 일컬었다. 수상작의 선정 과정에서는 독자가 반영되지 않는다. 폐쇄된 집단에서 집요하게 담론을 파고드니, 독자와 문단의 간극이 생겼다. 문단에서 배제된, 즉 문단에 편입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시는 무슨 말인지 모를 일이었고 소설은 좀처럼 진전이 없다가 끝나는 꼴이었다. 문학이 독자와 대중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상하게도 대중이 문학에 충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소설 자체보다는 ‘책’에 대한 열망을 기저로 한다. 책을 읽는 행위는 지적인 행위처럼 여겨졌고, 덕분에 사람들은 책이 지루하고 재미없어도 읽고자 노력했다. 매년 억지로 독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무슨 책을 읽을지 모르겠지만 책은 읽고 싶으니, 대단하다고 공인된 책을 읽었다. 문학상, 또는 평론은 공인된 책 추천이라는 점에서 중요해졌다.

 

그해 경주

 

어느 커다란 무덤 앞에서

당신이 내 손바닥을 펴더니

손끝을 세워 몇 개의 글자를 적어 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손바닥을 접어주었다.

나는 무엇이 적힌 줄도 모르면서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박준. 운다고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그해 경주)

 

에세이 돌풍은 문학에게 꽤 당혹스러운 일이다. 난제가 되어버린 문학에 대한 새로운 도전장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독서하는, 그러니까 지적이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기 위해서는 문학의 난제에 골머리를 앓으며 투쟁해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쁜 표지의 책만으로도 독서의 이미지를 손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사진을 SNS에 올리면 손쉽게 감성인이 되었다. 술술 읽힐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글을 한데 모아 ‘에세이’라고 명명했다. 시인지 산문인지 sns의 게시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글들이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그해 경주」는 언뜻 보면 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산문집이라는 이름 아래 묶였다.

 

모든 책 구매는 충동구매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내용물에 대해 모르는 채 제목, 표지에 적힌 문구, 첫 문단 정도로 구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의 내용을 전부 알고 구매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관객은 명작 영화만 찾는 것이 아니다. 가벼운 킬링타임용의 영화도 충분히 흥행한다. 영화 보는 행위가 팝콘, 암막, 화면으로 구성된 시공간의 종합체로서 자리 잡았을 때, 영화의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보고 나서 불평이야 하겠지만 사실상 영화 내용보다는 팝콘을 먹으며 암막 속에서 화면을 보는 행위를 구매하는 것이다. 도서 또한 마찬가지다. 독서하는 이미지를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은 문학이나 지식을 사려는 것이 아니다. 책은 한 권의 물성에 기반한다. 곧 책을 구매하는 행위는 책을 소유하고 들고 다니며 책장에 꽂아두는 행위를 통틀어서 구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 한 권이 표지, 판형, 내부 레이아웃을 거쳐 훌륭한 물성을 타고나면 그 안의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디퓨저나 책갈피, 문구 세트와 경쟁하는 ‘물성 미디어’라는 신 도서류가 탄생했다.

 

에세이집은 훌륭한 물성을 갖춘 후, 독서 행위에 압박감을 지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행갈이를 자주 하거나 여백을 늘려서 가독성을 높였고, 현학적이지 않은 문체와 일상의 소소한 공감을 주제로 삼으며 읽기 수월한 책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모든 에세이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읽기 수월한 에세이라고 해서 깊이 있는 사유를 동반하지 않았거나, 순간의 말장난으로 도배된 것도 아니다. 단지 신도서류는 이전보다 도서 자체의 물성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는 경향을 띠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명 캐릭터를 내세운 “○○○, ~해도 괜찮아” 시리즈의 책이 있다. 한동안 서점가에 비슷한 제목을 단 책이 유행하자 온라인상에서는 책 표지를 합성하며 이를 유머로 삼았다. 이 유머는 이례적인데, 책이 웃음거리가 된 것은 책이 나오기 위해 수고한 모든 이들의 노력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일이지만 책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적어도 그 유머를 소비하고 있는 집단 내에서는 도서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세이집의 부흥은 읽는 행위의 부흥으로서 책이라는 매체에 대한 매력을 충분히 보였다.

 

에세이 돌풍 시대에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라는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에세이라는 이름을 택하는 일이다. 정교하게 짜인 시인의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이해 가능한 만큼만 건져서 읽는 일이다. 책의 물성이 가진 이미지와 온도를 감각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시가 에세이라는 이름을 택할 수는 없다. 다소 불친절한 시는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시대의 독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3. 시에 대해 말하는 발칙한 방식

 

슬픔을 대체할 수 있는 손쉬운 쾌감을 원한다. 너무 무거운 슬픔은 어떻게 다룰 힘조차 들이기 싫으며, 그저 외면하고 싶다. 대신 그 자리에 쾌감을 초대한다. 특히 정신없는 이야기를 초대하면 눈 내린 날 강아지처럼 자리를 어지럽히고 슬픔을 어떤 형태로든 해체해 준다. 마치 신을 불러오기 전에 무당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방방 뛰며 난장판을 만드는 것과 같다. 신은 원시의 우주에서 질서를 세웠으니까, 일단 잘못된 세계를 전부 부숴 원시의 우주로 돌려놓으면 난장판은 비로소 성역이 된다. 극단적으로 속되면 성스러워 보이기도 하니까, 극단적으로 슬프면 쾌감에 중독되기 쉽다. 시원하게 모든 걸 폭파하는 액션 영화, 아주 조금씩 맛이 간 사람들이 등장하는 코미디. 이런 이야기들은 일종의 ‘엑스터시’가 되어서 모든 상념을 내려놓게 만든다.

 

나의 경우에는 애니메이션 <어드벤처타임>이 그 역할을 했다. ‘이걸 애들이 본다고?’ 할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 이야기였다. 거기에는 힙합을 좋아하는 ‘파티 갓’이라는 캐릭터가 가끔 등장하는데, 캡 모자를 걸친 채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늑대다. 이름처럼 파티를 열기 바쁘다. 파티에 도착하는 이들은, 핀이라는 인간과 몸이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노란색 강아지 제이크, 도끼 모양 기타를 연주하는 뱀파이어, 한국어를 하는 유니콘 정도가 있다. 천재 과학자 버블검 공주는 생명체를 만들어 캔디 왕국을 꾸렸는데, 그중 레몬그랩은 불완전해서, 자신의 뜻이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다른 레몬들을 착취한다. 무엇보다도 <어드밴처타임>의 배경은 핵 전쟁으로 인한 지구 종말 이후의 ‘우랜드’이다. 온갖 종류의 괴물을 물리치고, 별난 모험을 겪는 이들이 우스우면서 동시에 공포스럽다.

 

초전자포에 맞고 울프가 죽었다. 그는 우리 행성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는데.

동료를 구하다가 죽어버렸다.

 

먼 친척들 장례식엔 몇 번 갔는데. 친구가 죽은 건 처음이거든? 친구가 죽으니까 너무 슬프다……

눈물이 막 쏟아지는데. 이상하게 딴 애들은 울지를 않고 나만 엉엉 울고 있었다.

 

죽었으면 살리면 되지. 나더러 그것도 모르냐면서 친구들이 울프한테 뭘 뿌렸고.

콜록, 콜록, 울프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조심해야 돼. 이 약은 한 번만 살려주니까. 또 죽으면 그땐 도리가 없어.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나는 울프를 얼싸안았다. 울프야, 너는 일단 쉬고 있어라. 우린 아직 한 번도 안 죽었잖아?

죽을 때까지 싸우고 올게.

(방법이 있어. 김승일. <에듀케이션> 133p.문학과지성사.2012)

 

나는 점잖게 이해하는 방법을 잊어서, 난장판을 만들어야 간신히 몇 가지 생각을 건질 수 있다. 초전자포에 맞고 죽은 울프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우랜드가 펼쳐졌다. 죽은 늑대를 발밑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살리면 되지’라고 말해본다. 그래 때로는 이렇게 회피할 줄도 알아야지. 죽음이라는 삶의 중대한 문제를 눈앞에 두고도 태연해야지. 약을 뿌려 살린 울프는 난치병에 걸려서 다시 죽어버렸지만.

 

얘들아 잠깐만 진정 좀 해봐. 어쩌면 울프를 살릴 수 있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살릴 수 있어. 아주 위험한 방법이지만……

박사가 입을 열었다.

 

박사야, 위험해도 그렇게 하자. 그러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어느 청소 시간이었다.

책걸상을 뒤로 다 밀어놓고 친구들은 청소를 하고 있는데. 나 혼자 책상에 앉아 있었다.

 

너 왜 울고 있니? 걸레질을 하던 애가 나한테 왔다. 고향별이 폭발했거든. 친구들이 모두 죽어버렸어. 사실을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냥 운다고 했다.

(위의 책. 134p.)

 

화자는 청소 시간에 혼자 엎드려 울고 있다. 나에게 닥친 상황은 너무한데. 행성 영웅 울프는 두 번 죽었다가 장렬하게 폭발했고 나 혼자 살아남았는데. 이 거대한 슬픔을 떠안고도 화자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냥 운다고 말했다. ‘그냥 운다’는 발화는 지금껏 태연하던 화자가 무너지는 순간이자, 여전히 태연한 척 유지하는 순간이다. ‘친구가 죽은 건 처음’이니, 너무 슬픈 상황도 처음이다. 슬픔을 다루는 데 능하지 못할 게 뻔해서, 정체 모를 약으로 얼렁뚱땅 넘긴다. 그 후로 울프를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이 슬프지 않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서 치열하게 살았지만, 방치해 두었던 슬픔은 난치병에 걸려서 죽어 있었다. 슬픔을 극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남아 있는 울프를 되살리는 방법, 즉 슬픔을 퇴치하는 법은 행성을 폭파시키는 것뿐이다. 고향별을 삭제하고 교실이라는 일상적 공간과 청소 시간으로 재편입되는 방법뿐이다.

 

이 시는 울프와 초전자포와 행성이 등장하는 잡종 판타지 이미지를 빌려서 정신을 쏙 빼놓으며 슬픔을 해체시키고 있다. 이런 맥락으로 나는 이 시를 아끼게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 시를 추천할 때 솔직하게 ‘<어드벤처타임> 같지 않아? 우당탕탕 정신없어서 좋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좋다고 할 테다. (현실에선 친구에게 시를 추천해 줄 일이 없다.)

 

모든 독자가 구체적인 언어로 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시를 읽는 순간 떠올린 이미지와 알 수 없는 직관으로 시를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랄까. 그런데 유독 시는 그렇게 즐기면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나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좋다. 파편처럼 남은 단어를 좇으며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일이 즐거워 시를 읽었지만, 어디 가서 시에 대해 떠들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은 갖췄다. 시에 대해 말하려면 꼭 10년 즈음은 진득하게 연구한 학자이거나, 파도 같은 감수성으로 눈물 한 방울쯤 찔끔 흘릴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예로부터 문학은 학문의 일종이었고 책은 지식과 사유의 산물이었으니까. 그에 맞게 대접해 드려야 예의이니까.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너무도 견고해, 새로운 장르의 독법을 살짝 빌려볼까 한다.

 

그림=조미형(화가)

4. 문학 공간으로서의 힙합

 

시가 신성성을 획득하고 성역을 갖추는 동안, 누군가는 힙합 가사를 썼다. 시에 쓰이는 모든 리듬, 라임, 언어유희는 힙합 가사를 쓰는 데 기본이 된다. 권위를 탈피한 힙합은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토론하는 문학장이 되었다. 랩을 뱉는 래퍼와 이를 관심 있게 듣는 리스너는 펀치라인이라고 부르는 언어 조립에 주목하고, 스토리텔링이 잘된 가사를 꼽아 칭찬한다. 메이저로의 진출은 험난하지만,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자신의 노래와 가사를 공유하는 것은 자유롭다. 이러한 자유로운 교류에 힘입어 언어실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시프트 삼 인생은 원래 원래 혼자

시프트 사 너 땜에 남아도는 거

시프트 오 널 다시 만날 수는 몇

시프트 육 육 이거 하려고 내가 이 짓 하는 거야

시프트 칠까진 갈 수 없으니까

팔베개를 하고 별을 바라보던 우린

9, 0처럼 그저 괄호 속 안에 묶인

(기리보이 Giriboy-키보드 Prod. By Hansen. 2018)

 

매일같이 키보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시프트 삼이라는 구절을 보고,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을 떠올릴 것이다. 시프트 사는 당연히 $, 시프트 오는 %, 시프트 육 육은 ^^가 될 것이다. 키보드 자판을 활용해 기호와 의미를 넘나들면서도 특유의 리듬을 구축하고 있다. 이외에도 힙합 가사는 마땅히 제한을 두지 않고 외국어의 발음, 유행어, 당대의 이슈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다양한 실험을 펼치고 있다. 실험적 시도가 가능한 이유는 힙합 가사가 단순히 래퍼로부터의 리스너를 향한 외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래라는 것이 얼마든지 또 누구든지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노래 가사는 자연히 창작자와 수용자의 공동 소유물이 된다. 가장 훌륭한 곡은 공연장에서 팬과 가수가 동시에 부르기 마련이다.

 

시적인 실험은 자칫 잘못하면 겉멋 들었다고 지적받기 쉽다. 새로운 시도를 발명, 발견이 아닌 실험이라 부르는 이유는 독자들의 반응, 즉 결괏값이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시는 시인이 고도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글이어야만 하는데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음에도 실험을 시에 싣는 것은 누군가에겐 과도한 자신감이자 허세로 보인다. 시적인 실험을 하고 싶다면 사유의 부족으로 보일 위험 부담을 이고 가야 한다.

 

힙합 가사의 창작자는 가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가사에서 자유롭게 겉멋과 허세를 부리는 것도 허용된다. 수용자가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 수용자 스스로도 겉멋과 허세를 답습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래퍼의 flex는 동시에 팬들의 flex가 된다. 아재개그와 펀치라인은 한 끗 차이다. 아재개그는 ‘아재’의 특성을 가진 발화자에게는 우습지만 듣는 이에게는 우습지 않다. 처음 들었을 때는 코웃음도 안 치다가, 꼭 문득 떠올라 스스로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하고 싶어지는 농담이 아재개그다. 아재개그는 발화자에게만 적용되는, 배타적인 개그다. 펀치라인은 듣는 이(리스너)가 잠재적 발화자이므로, 조금 더 너그러운 태도로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단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 속에서 시기적절하게 등장하니 무안함도 덜하다. 힙합 가사에서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계는 언제나 일대 다수로 이루어져 있다. 창작자는 자신 개인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공동 소유자인 수용자를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용자의 감성을 날것 그대로 포착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속이 울렁거려서 빨리 화장실로 난 뛰었어

시원해 속 시원해 속 시원해 속 시원해 속 시원해 속

넌 날 변기 위에서 울리고 넌 날 하루 종일 굶기고 있어

넌 날 시간 뒤에 숨기고 있어 어어어어 이건 너무 계획적인걸

(기리보이 Giriboy-계획적인 여자 feat. Gganmo & Zino of Block B. 2014)

 

변기 위에서 우는 일만큼 이별에 대해서 잘 드러내는 상황이 있을까. 이별은 생각보다 구질구질하다. 서로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기보다 일방적으로 거절당할 확률이 더 높다. 또는 일방적으로 거절한 척을 하기에 바쁘거나. 어떤 척을 할 때 힙합은 참으로 유용하다.

 

너가 멋있어

이렇게 멋진 날 차버린 너가 멋있어

나 사실은 혼자인게 무서워서

여기저기 친구들 다 불러서

힙합 뮤비처럼 앉아 있어

(기리보이-2000/90. 2015)

 

힙합은 뮤비처럼 폼을 잡고 앉아 있으면, 세상에 쿨한, 어떤 멋있는 사람이 된 양 착각에 빠지기 쉽다. 힙합은 겉멋과 허세를 통해 ‘멋진 날’ 만들어 주었지만, 허세라는 말은 ‘나’의 본질이 어쩔 수 없이 찌질이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멋진 척을 하는 나보다 현실 속의 네가 당연하다는 듯이 더 멋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현실을 잊기 위해 얇은 착각을 행하는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 힙합이라는 장르는 사회적 약자였던 이들이 성공이라는 승리를 쟁취하는 서사를 품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이미 성공을 이룬 양 과장하고, 자랑하다 보니 진짜로 성공을 얻는 모양새가 되었다. 철저히 ?척의 문화가 되어 구질구질함을 아주 세련되게 감추는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멋진 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멋있는 이로 정체화하지만, 사실 그 본질은 구질구질한 찌질이임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척의 정체화는 패션에서도 나타난다.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겠다는 목적 아래 래퍼들은 정체 모를 패션을 적극적으로 내보인다. 여름엔 덥게, 겨울엔 춥게(기리보이. Kid Milli. NO:EL, 스윙스-flex. 2018) 입거나 주머니가 너무 많은 옷을 입으면서.

 

힙합은 국민의 노래 힙합은 패션의 노예 ACRONYM 148

내 몸에 주머니 너무 많아 짤짤이 현금이 마구 나와

어서 와 이런 거 처음이지 등산객 아저씨까지 너무 stylish

(기리보이 -acrnm. 2018)

 

‘힙합은 패션의 노예’라고 한다. 평이한 패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다가 등산객 아저씨와 같은 옷을 입게 되는 기이한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멋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등산객 아저씨와 몸에 주머니가 너무 많은 래퍼는 단 한 끗 차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멋짐을 퍼포밍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아저씨마저 스타일리시하다면서 다른 이를 칭찬해 주는 뻔뻔함이 더해지면서 수준 높은, 고도의 ‘퍼포밍’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옷을 걸치지 않은 내 몸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겹의 옷과 필요 이상의 주머니를 몸에 두르며 ‘진짜 나’라고 외치는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적 자아를 적극적으로 투영시키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온몸으로 ‘척’하고 있는 것이다.

 

ACRONYM은 스키, 보드복 등 아웃도어 스포츠 웨어의 기술을 일상복에 녹여낸 만큼 고가의 옷이다. 일상복에서 가장 필요한 기능은 수납력이라는 철학 아래 고도의 계산으로 주머니를 설계했다. 이런 옷을 걸치는 것은 옷의 가치로 자신의 몸을 가리는 행위이다. 이렇게 멋진 옷을 등산복이라고 비하함과 동시에 그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를 다시 칭찬함으로써 3번의 전복을 일구었다. 3겹의 혼란으로 얇은 착각은 견고한 착각이 되어, 이상적 자아와 본래의 자아를 혼합시키는 데 성공한 듯 보인다.

 

5. 해체의 언어학 : 리듬과 이미지

 

시는 한 번 읽은 후에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때 의미가 탄생한다고 한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 곧 시의 매력이지만, 그 함축적 매력은 문학을 어렵게 하는 데 한몫했다. 시는 다 읽어도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 영역이 되었다. 한 번 읽어서는 모를, 그렇다고 두 번 읽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닌 미지와 난해의 세계로 빠지게 된 것이다. 자랑과 전복의 방식으로 혼란을 야기하여 멋과 멋없음의 구분을 흐려놓았을 때, 혼란이 가중된 가사를 수용자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의 독법을 빌리면 시의 독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냥 좋아 다 좋아

우원재가 부탁하면 다 좋아

그냥 가사 그냥 녹음

도움 되면 두 배로 더 좋아

비트 안 듣고 가사 먼저 써

그냥 정신줄을 놓아 노는 게 좋아

노는 게 좋아 뽀로로야

옷이 너무 좋아 안감

음악 너무 좋아 장난

고민 없이 그냥 마감 땡

(호불호 -feat 기리보이-우원재. 2019)

 

‘비트를 받고 20분 만에 썼다’는 사실에 주목을 받은 가사이다. 우원재의 「호불호」라는 노래의 피처링으로 들어간 짧은 파트인데, 노래의 전체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다. 호불호가 없으며 자신 있는 선택이 불가능한 데 대한 고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에 삽입된 가사는 아무 고민 없어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가사가 향유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대게 이 가사는 유머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이 가사에 큰 의미가 없음’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펀치라인을 살려 위트 있는 가사도 있지만, 그저 듣기 좋은 발음과 독특한 랩 메이킹에만 집중한 노래도 있다. 가사를 쓴 사람이야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리스너들은 의미 없는 ?없어 보이는- 가사를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발음과 리듬을 즐길 뿐이다. 이렇게 소리 자체를 즐기면 외국어로 된 가사까지 두루두루 즐기게 된다. 순간 가사는 도구가 되고 노래가 이루는 분위기를 즐기게 된다. 래퍼가 내는 소리 자체를 즐기고, 집중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 어느 날 문득 가사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노래를 즐겨 들어야 생기는 일이다.

 

시 또한 의미 없음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쓰는 이가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쓴다면 읽는 이도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한 구절 한 문장만이라도 마음에 들면 사람들은 그 시를 두고두고 읽는다.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두기 위해 의미를 해체해두는 것이라면 의미는 해체된 채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시는 노래가 아니므로 특이하게 발음하거나 갑자기 음정을 바꿈으로써 재미를 줄 수 없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를 줄 수 있고 이에 따른 실험도 잇따를 수 있다. 시가 만드는 리듬은 갈수록 미묘해지고 있고, 시의 이미지 또한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실험 -그것이 형태주의적인 것이든, 새로운 퍼포먼스와 접합하든- 은 특별한 의미를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딱히 의미랄 것이 없는 상태, 의미를 발굴해 내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다다라서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어.”가 가능해진다. 글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 시 전체가 이루고 있는 이미지, 리듬, 분위기를 독자가 체화한다면, 머리를 써서 풀지 않아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가장 철저한 해체가 가장 고도의 설계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날 시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시를 읽는 것은 깊이 있는 사유가 따르는 것이 미덕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를 읽을 자격이 없다는 오명을. 시 해석에 정답이 있고 이를 멋있게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오명 속에 시는 대중과 멀어졌다. 그러나 시의 창작자도, 문단에 소속된 사람도 아닌 개인으로서의 독자는 대중 속에 있다. 시의 오명을 벗겨내고 더 많은 이들이 시를 향유하고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시의 의미를 이해 가능한 만큼만 향유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그대로 두고 향유하자. 그러면 우당탕탕 애니메이션을 빌려 이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를 접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독자층이 다시 생겨날 것이다.

 

〈끝〉

 

◆김정빈 “문학 사랑하는 청년들 많아… 아끼는 것 담아 쓸 것”

 

당선 소감은 평생 남는 것이니까 멋있게 써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오래도록 멋지게 써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딱 한 가지 사실만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 덕분입니다. 기꺼이 제 삶에 들어와 준 모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제나 저를 사랑해 준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마음껏 엉뚱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경희대학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귤 하나씩 나눠 주고, 좁은 방에 초대해도 기꺼이 모여 앉은 친구들, 초코과자를 함께 먹은 학회 친구들. 모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 많이 길들여지지 못한 글의 손을 잡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조금씩 부족했던 저에게 신춘문예가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블로그마저도 유튜브 영상에 밀리는 시대에, 아직도 문학을 사랑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마땅히 이룬 것이 없다는 죄책감과 조바심 속에서도 끊임없이 쓰고, 열심히 갈망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하겠습니다. 좋아하고 아끼는 것을 담아서 쓰겠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감사하며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엄마, 엄마한테 보여주고 싶은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98년 대전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재학

 

◆김주연 문학평론가 “젊은 시가 보여주는 해체와 근원적 슬픔 분석 새로워”

 

18편의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양과 질 양면에서 모두 부진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느낌은 단순한 우연의 현상이라기보다 어떤 전환기적 변화와 닿아 있다고 보아야 적절하다. 이 전환기적 현상을 예리한 감수성과 문체로 파악하여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이 시대의 독법-팔리는 문학에 대한 고찰’이 당선작으로 선정된 배경에도 이 변화가 있다.

 

문학사회학적 접근이 가미된 이 작품이 문학평론 당선작이 되는 일은 아마도 상당한 파격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경쟁작들, 예컨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있다고 말하는 몸-이영광론’(김사은), ‘사물의 의지, <물류창고>를 중심으로―이수명론’(박민아) 등에 비추어 상대적 우위를 가진 점도 평가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대의 독법-’은 ‘문학공간으로서의 힙합’을 중심으로 최근의 젊은 시(시인)가 보여주는 해체와 그 근원으로서의 슬픔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특히 그것에 대한 사회적 반응을 연결해 주는 안목과 필치가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다만, 글의 범위와 깊이가 어딘가 쓰다가 만 것 같은 미완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쉽다. 좋은 재능을 더욱 신중하게 심화시켜 나가기 바란다. 젊고 새로운 평론가의 등장으로 모바일시대 문학의 혼융합 현상을 설명하고 방어하는 문학기제의 출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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