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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위안부 증언 담은 첫 다큐… 영화의 펀딩 제작 가능성 열어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1-19 06:00:00 수정 : 2019-11-19 1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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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 국내 ‘기생관광’ 취재하던 변 감독 / 日 위안부 출신인 어머니 부양 위해 / 日 관광객 상대하던 접대부 만나며 / 기구한 ‘역사의 역설’ 시작된 영화 /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 힘입어 / 주류 언론들은 침묵하던 문제 제기 / 무겁지만 담담히 할머니들 삶 그려 / 日선 우파들 상영 방해로 화제 모아 / 韓·日서 일 위안부 논의 필요성 환기 / 3편까지 제작 사회적 공감 이끌어
‘낮은 목소리’의 첫 장면으로, 1993년 제100회 수요 집회의 모습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윤정옥(맨 앞줄 왼쪽) 공동 대표와 현재 정의기억연대 윤미향(맨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이사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역사의 역설

“1991년 저는 기생 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요정에서 일하는 한 여성을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 그 여성이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매매춘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1993년 저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현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변영주(53) 감독의 영화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2’(1995)의 도입부다.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어머니와 그녀를 위해 일본 관광객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딸, 모녀의 기구한 사연이자 한국 역사의 숨겨진 역설에서 출발한다.

‘낮은 목소리 2’ 포스터는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영화 제작 과정에 개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국가의 외면과 침묵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주류 언론에 대항해 등장한다. 1980년대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행하던 주류 언론에 반해,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 사회의 은폐되고 다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현장 중심으로 담아내기 시작한다. 1995년 제작된 ‘낮은 목소리’는 한국사에서 은폐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을 담은 첫 다큐멘터리 영화다. 해방 이후 국가는 학도병, 강제 징용, 심지어 문화재 수탈까지 집계함에도, 일본에 동원되고 끌려간 정신대와 위안부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정신대와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의 생존 여부나 귀환 여부는 물론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에 대한 일본의 완고한 침묵 속에서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차원이 아닌 존재 증명, 그 자체였다. 사건의 부당함 이전에 사건 자체가 있었음부터 증명해 내야 하는 역설적이고도 지난한 피해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낮은 목소리’는 과감하게 생존 여성의 현재 삶을 담는다. 역사가 침묵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 다루는 영화이지만, 과거사를 파헤쳐 고발하거나 사건을 재현해 알리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 할머니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영화는 어느새 100회를 맞은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에서 시작한다. 집회에 참여한 할머니들과 활동가들은 추위 속에 모여 100회의 의미를 되새기며 “책임자를 처벌하라”를 외친다. 이어 영화는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나눔의 집의 일상생활로 들어간다. 식사 준비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서로 안마하고, 화투를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할머니들의 삶은 일상적이지만 존재 자체가 사건인 것이다.

영화는 그 일상 속에서 할머니들의 자기 고백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만히 담는다. 영화의 놀라운 점은 할머니들이 꺼내기 힘든 말을 진심으로 담아낸다는 것이다. 1년 이상 할머니들과 생활을 함께하면서 영화는 신뢰를 기반으로 카메라를 켜고, 마음을 연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한다. 기존까지 과거사를 복원하기 위한 구술이나 증거를 위한 기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삶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는 개인의 말하기 힘든 체험담이자 한국사의 숨겨진 뼈아픈 역사적 증언, 잊지 말아야 할 진실이다. 무엇보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다. 현재의 일상 속에서 들려지는 속삭임이자 중얼거림(영문 제목이 The Murmuring이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과거 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삶과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일깨운다.

영화는 이어 중국 우한을 방문한다. 중일전쟁 당시 위안소가 존재했던 지역으로, 일본은 패전 후 여성들을 그곳에 버려둔다. 남아 있던 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반은 유명을 달리하고, 반은 소녀에서 할머니가 됐다. 영화는 그들을 만나 현재까지 삶을 경청해 듣는다. 할머니들은 모국어,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잊었어도 당시 기억은 생생하다. 제작진이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신을 버린 고국에 가고 싶다고 간곡히 요청하며 한국 노래를 부른다. 나라는 그들을 잊었는데 할머니들의 간절한 그리움은 영화 도입부에 언급한 모녀만큼이나 역사의 역설을 마주하게 한다.

‘낮은 목소리 2’에서 변영주 감독(왼쪽)이 울산에 가 윤두리 할머니(오른쪽)를 만나고 있는 장면. 강덕경 할머니의 임종 전 선물이었다. 윤 할머니와 함께 등장하는 변 감독의 모습으로 인해 영화는 관계의 영화가 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에서 영화 운동으로

‘낮은 목소리’는 정식 극장 개봉을 한 최초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작 지원은커녕 배급 지원도 부재했던 영화는 ‘100피트 회원’ 모집 운동을 최초로 시도한다. 지금의 크라우드 펀딩에 가까운 방식으로, 촬영할 16㎜ 필름을 1피트씩 사서 기부할 회원을 100명 모집한다. 이를 통해 영화의 자발적 후원회를 구축하고, 영화 제작 배급비를 충당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린다. 영화와 운동, 보다 구체적으로 제작-배급-운동의 일석삼조 전략인 셈이다.

영화는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 후 약 4500명의 관객과 만났고, 한 달여간 상영하는 동안 관객과의 대화를 할머니들과 매번 함께 진행했다. 영화는 국가와 사회의 외면 때문에, 철저히 개인의 수치로 여기며 살아온 할머니들을 카메라 앞으로 초대한 후 다시 화면 밖 세상과 만나도록 한다. 영화는 영화 안과 밖, 과거와 현재로 할머니의 삶을 이어낸다.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머물게도, 가두지도 않는 영화이자 영화 운동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일본 개봉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일본 개봉을 위한 사전홍보 행사에서 일본 우파가 상영을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으로 영화는 일본 사회에서 화제가 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영화는 일본 우파의 방해 소동으로 인해 전국 개봉을 가능하게 하고, 영화가 운동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다. 영화로 인해 일본 내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는 국가 검열로 인해 독립 영화가 흥행하는 역설이 존재한 시절이었고, 방해 공작으로 인해 사회운동이 불붙는 시기였다. 일본 개봉 이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확산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전쟁 성범죄를 마침내 전쟁범죄로 이끌어낸다. ‘낮은 목소리’는 역사의 피해자가 존재를 드러내고 그들을 위무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알려내고 바로잡는 사회운동이자 나아가 현재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텍스트가 되어 갔다.

◆계속되는 ‘낮은 목소리’ 연작

‘낮은 목소리’는 이후 ‘낮은 목소리 2’(1997), ‘낮은 목소리 3-숨결’(1999)로 이어가면서 할머니들이 대상에서 점차 주체가 되는 과정을 담는다. ‘낮은 목소리’가 감독의 목소리로 시작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듣고 담는 과정이었다면, ‘낮은 목소리 2’는 할머니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 촬영이 시작되고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간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가둔 상이 아닌 할머니 개개인의 개성과 욕망을 담으면서 영화는 할머니들을 적극적인 노래와 농담으로 담아낸다. ‘낮은 목소리 3-숨결’에 이르러서는 감독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제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묻고 답하는 주체가 돼 영화를 끌어간다. 이용수 할머니가 다른 동료 할머니들과 마주 앉아 증언을 듣고 나누고, 김윤심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담을 수필로 기록해 전태일 문학상을 받고 이를 통해 딸과 소통한다.

‘낮은 목소리’ 3부작 연작의 힘은 이슈를 이슈로만 보지 않고 이슈 안에 있는 사람을 보게 한다. 영화는 9년여간 세월을 함께하면서 할머니들의 슬픔을 공감하고 그녀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보이후드(boyhood·남자의 어린 시절)의 할머니 버전, ‘그랜드마더후드’랄까? 슬픈 것은 ‘그랜드마더후드’가 세월과 함께 완성돼 갈수록 할머니들이 점차 유명을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아직도 국가 차원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의 산증인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 사안을 기반으로 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딜레마다. 사건 해결 이전에 소멸과 망각이 먼저 일어나는 현실에서 기록과 상영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다. ‘낮은 목소리’가 오늘도 계속 상영되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 안타깝고, 그래서 다행이다.

이승민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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