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베트남戰 반성적 고찰 … 리얼리즘 부활 ‘신호탄’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1-04 21:00:00 수정 : 2019-11-04 20:35:4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⑥ 정지영 감독 ‘하얀전쟁’ / 저마다 부푼 꿈 안고 파병된 군인들 / 두 달간 땅만 파다 처음 벌인 총격전 / 알고 보니 베트콩 아닌 마을의 소 떼 / 칙칙한 방에 혼자 사는 주인공 통해 / 민달팽이와 다를 바 없는 일상 표현 / 결코 씻을 수 없는 전쟁 후유증 조명 / 정권 홍보용 반공영화 기조 버리고 / 참전용사 내면에 각인된 상처 폭로 / 민주화 흐름 스크린에 드러난 사례

“두 달이 지나도록 우리는 땅만 파고 있었다.”

정지영(73) 감독의 영화 ‘하얀전쟁’(1992)에서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저마다 부푼 꿈을 안고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군인들은 그렇게 땅만 파다가 어느 날 심야에 드디어 첫 번째 교전을 벌이게 된다. 암흑 속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날이 밝고 보니 베트콩으로 알고 쏘아댄 대상은 바로 그 마을의 소 떼였다. 허무하게도 누군가의 잘못된 총기 발사로 시작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마구잡이로 총을 갈겨 댔던 것이다. 다음 날 마을 주민들이 소대로 찾아와 보상해 달라고 시위를 벌이지만 소대 상급자들은 그를 완전히 무시한다. 하지만 한기주(안성기) 병장은 “저 사람들이 뭘 잘못한 겁니까?”라고 되묻고, 전희식(김세준) 병장 또한 “어제 일은 우리가 잘못한 거죠”라고 말한다. ‘하얀전쟁’은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성적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최초의 한국영화다.

◆최초의 베트남 현지촬영 영화

영화는 베트남전 이후 글을 쓰며 살아가는 소설가 한기주가 현재의 1980년 서울과 전쟁이 한창인 과거 베트남에 대한 쓰라린 기억을 오가며 진행된다. 한기주는 한 시사 월간지에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소설 연재를 시작한다. 전쟁 후유증으로 아내와도 별거 중인 상태에서 그 집필 활동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씻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연재를 해나갈수록 과거의 기억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전 당시 후임병이었던 변진수(이경영)가 그를 찾아온다. 베트남전 당시 소대의 마지막 전투에서 살아남은 7명 중 한 명인 그는 권총으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들 앞에 과거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끔찍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불려 나온다.

“괄태충(민달팽이)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은 안정효 작가의 소설 ‘하얀전쟁’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안정효 작가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4년 ‘실천문학’에 연재를 시작했고,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돼 1989년에는 ‘White Badge’란 제목의 영어 소설로 해외에도 소개됐다. 베트남전은 30만명이 넘는 한국 젊은이들이 참전해 그중 5000명 가까이 죽거나 실종돼 돌아오지 못한 전쟁이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힘의 균형이 없는 강대국 미국과 약소국 베트남의 부조리한 전쟁이었다. 작가가 원작에서 베트남전 이후 한국에 돌아와 칙칙하고 음습한 방에서 혼자 사는 한기주를 묘사하며 ‘괄태충과도 같은 삶’이라 표현한 일상은, 저마다 부푼 꿈을 안고 베트남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는 전쟁의 후유증이었다.

영화 ‘하얀전쟁’에서 한기주(안성기·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변진수(이경영·오른쪽)는 베트남전의 악몽으로 되돌아간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 변진수는 권총과 함께 이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내려 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그런 한기주를 연기한 배우 안성기는 원작 소설을 읽고 정지영 감독에게 영화화를 권한 사람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성기는 화려한 아역 배우 시절을 뒤로하고 베트남 전문가를 꿈꾸며 베트남어과를 전공했다가, 베트남전이 끝나고 1975년 외교 관계마저 단절되면서 다시 배우 활동을 시작했던 이력이 있다. 어쩌면 베트남전은 지금의 국민배우 안성기를 있게 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담은 ‘하얀전쟁’에 출연한 것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9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에 합의해 다시 외교를 시작하게 된 해이며, 베트남전 영화를 만들면서 최초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촬영 허가는 물론 협조까지 얻어 가며 현지촬영이 가능했다. 1992년 1월15일부터 약 80일 동안 호찌민, 다낭, 냐짱, 뚜이호아 등지를 돌며 촬영을 진행했으며 당시 한국영화계에서는 제작비 20여억원이 투입된 대작이었다. 그리고 그해 열린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안정효 작가 원작과의 차이점

영화 ‘하얀전쟁’은 원작과는 상당 부분 다르게 전개된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이혼 위기에 있는 아내가 상당한 분량으로 등장해서, 전쟁의 상처로 인해 후반부에 이르러 기나긴 관계의 파탄 끝에 이혼한다는 설정이다. 즉, 부부 관계의 파탄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사실 원작에서 한기주에게는 자식이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초반부에 이미 이혼한 아내가 등장할뿐더러, 극중 아들이 “엄마랑 나랑 새아빠랑 미국에 간대. 이제 방학 때 못 봐”라며 일찌감치 원작의 핵심 요소와 단절하며 전개된다. 그렇게 전쟁 이후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변진수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영화는 올곧게 전쟁과 그 후유증 자체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베트남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란 질문을 보다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하얀전쟁’은 한국영화로는 최초로 베트남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어 현지촬영이 가능했으며, 제작비 20여억원이 투입된 대작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또한 영화 속 현재의 시대 배경은 바로 ‘서울의 봄’이다. 영화에 김재규와 전두환의 자료 화면이 등장하는 것처럼 1979년 10월26일부터 1980년 5월17일 사이 벌어진 민주화운동 시기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0·26사건 직후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군부를 장악하고 정치적 실세로 등장하던 때다. 12·12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가기도 했다. 당시 한국영화에서 그 시기를 이처럼 정면으로 다룬 사례가 없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자신의 영화평론집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에서 정지영 감독에 대해, ‘하얀전쟁’에 앞서 6·25전쟁 당시 빨치산을 소재로 만든 대작 ‘남부군’(1990)을 이야기하면서 “정지영 감독은 남들이 이루지 못한 두 가지 일을 과감히 해냈다”며 “하나는 여유가 있는 제작자조차 기피해 온 대작 촬영의 모험을 강행, 성과를 끌어냄으로써 적극적인 제작 환경을 조성했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 금기시돼 온 소재에 도전, 표현의 폭을 넓혔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 ‘두 가지 일’은 ‘하얀전쟁’에 이르러 만개한다. 한국의 정치 현실과 베트남전에 대한 반성적 기억이 겹쳐져, ‘남부군’과 ‘하얀전쟁’은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 민주화의 도도한 흐름과 변화가 영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 사례라 할 것이다.

◆정지영 감독,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실천적 영화인

한국영상자료원이 펴낸 한국영화사 연구총서 2권 ‘한국영화사 공부: 1980∼1997’에서도 ‘하얀전쟁’과 ‘남부군’은 물론, 조정래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까지 아울러 “노태우 정권이 유연한 민주화 과정을 약속한 1990년은 그에 걸맞게 어느 때보다 자기 검열과 체제 검열에 걸려 실종돼 버렸던 리얼리즘 영화들이 단절의 역사를 극복하고 집중적으로 생산되는 의미심장한 부활을 보여 준다”며 “마치 1990년대가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르 법칙의 상투형을 깨며 그간 침묵했던 현실과 접속했다”고 기술한다. 그 세 편 중에서도 ‘하얀전쟁’은 “그간 반공주의 시각에서 정권 홍보용으로 제작돼 온 베트남전 관련 영화의 기조를 전복시키며 베트남 참전 용사의 내면에 각인된 상처를 폭로했다”고 덧붙인다. 실제로 정지영 감독은 학창 시절,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오발탄’(1961)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길 꿈꾸었던 사람으로, ‘하얀전쟁’은 전쟁 영화라는 장르성 안에서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마주하며 한국영화사가 잊고 있던 리얼리즘 전통을 복원해 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다시 한 번 안정효 작가의 원작을 정지영 감독 그 자신의 스크린쿼터 투쟁과 경험을 살려 창의적으로 각색한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정지영 감독의 영화 세계가 더욱 설득력과 파급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가 1980년대 후반부터 영화인 시국 선언을 주도하고 실제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면서, 할리우드 영화 직배 반대 투쟁의 최전선과 스크린쿼터 운동의 출발점에서 영화계 개혁 운동을 주도한 실천적 영화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휴지기를 가졌던 그의 문제의식은 이후 ‘부러진 화살’(2011)과 ‘남영동1985’(2012)로 이어지며, 여전히 한국영화계의 흔들림 없는 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성철 씨네21 편집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
  • 수지 '하트 여신'
  • 탕웨이 '순백의 여신'
  • 트리플에스 코토네 '예쁨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