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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사막의 바다는 신기루인가 존재의 근원인가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19-10-19 11:16:46 수정 : 2019-10-19 11: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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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명호가 일으키는 ‘환기’
물결치는 사막의 끝에 맞닿아 혹시나 푸른 바다가 시작 되지 않을까 세상이 부여한 의미에 연연하지 않던 작가의 꿈은 우편배달부와 등대지기 망망대해를 하염없이 보고팠던 그 마음 앵글에 담아 주변을 충만케 한다.
이명호의 작업 과정은 복잡하다. 대형 캔버스를 세우거나 잡고 늘어서는 것에는 수십 명의 인력을 투하한다. 이명호 제공

#남대문에서 만난 등대지기가 꿈이었던 사람

얼마 전, 시청에서 서울역까지 걸을 일이 있었다. 바뀐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택시나 버스를 타기에는 가까운 거리인 것 같아 걸었다. 걸으며 익숙한 느낌이 들어 생각해보니 삼성미술관 플라토가 있을 때는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2016년 건물 매각과 함께 주옥같은 전시를 남긴 채 폐관한 곳이다.

그 앞을 지나니 어쩐지 마음이 헛헛하여 길 건너 남대문 마당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킨 남대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위로가 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네모 모양으로 서있는 설치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이명호 작가의 카메라 옵스큐라 재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설립 50주년을 맞아 작가와 함께 기획한 전시였다.

이명호는 등대지기와 우편배달부가 꿈이었다. 등대에 서서 너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거나,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며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었다. 이제 중년에 들어선 그는 두 가지 꿈 모두 이루지 못했다. 대신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되어 작품에 자신의 시선과 행위를 담아내고 있다. 이명호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동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라이카의 홍보대사 활동을 한다. 장폴게티미술관, 프랑스국립도서관, 암스테르담사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최근 작가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전업 작가로 돌아왔다.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고 싶다는 그의 새로운 작품이 기대된다.

#까만 방, 하얀 방 그리고 그 사이 혹은 그 너머

시작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이명호는 졸업 논문 주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사진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부를 거쳐 오랜 시간 공부했지만, 그것의 본질에 관한 이해의 시도는 부족했던 것 같았다. 지도교수는 사진의 본질에 관해 연구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보통 논문은 좁은 주제를 깊게 파고들어 연구 성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명호는 지도교수가 웃었을지언정 이 주제에 진지하게 다가섰다. 사진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한 질문은 미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까지 이어졌다. 예술가들이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사진의 등장 배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명호는 이 프로젝트에 ‘예술-행위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사진의 원리에 따라 세 가지 주제로 구상했다. 밝은 방(카메라 루시다), 어두운 방(카메라 옵스큐라), 그리고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회색 방이다. 각각의 방은 현실을 드러내는 것, 비현실을 만드는 것, 앞의 두 가지 너머를 담는다.

이명호는 ‘나무’ 연작으로 이름을 알렸다.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운 표면에는 고요함이 있었다. 명상적인 화면은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이명호 제공

#서있는 나무와 물결치는 사막이 있는 곳

이명호는 현실을 재현하는 밝은 방 작업을 먼저 했다. 작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은 보는 이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을 환기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주의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무심히 지나쳤던 나무 뒤에 캔버스를 세웠다. 캔버스는 미술, 예술에 있어 근간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캔버스 앞에 선 나무는 의미 있는 무엇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니었고 존재를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나무 Tree Abroad #2’는 나무 연작 중 하나다. 2010년 가을, 몽골리아에서 촬영한 작업이다. 보통 작업의 소재로 삼는 나무는 사연을 가지고 있다. 수백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고목이거나 그 아래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명호가 시선을 주는 나무는 특이한 점이나 사연이 없다. 대신 몽골의 너른 벌판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 중 하나다. 그는 오히려 가장 평범해 보이는 나무를 만나려 노력한다. 대상을 고민하고 선택하는 데에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것의 뒤에 캔버스를 세워 보이지 않았던 의미를 밝힌다.

이후 이명호는 비현실을 재연하는 어두운 방 작업을 했다. 다룰 대상을 고민하다 문득 사막이 떠올랐다. 사막과 바다는 극과 극의 존재로 느껴지지만 사실 커다란 연결점이 있다. 과학적으로 사막의 기원은 바다인 경우가 많다. 이집트 아라비아, 몽골 고비 사막 등에 대형 캔버스를 가져갔다. 평균 57도의 기온에 필름이 녹았지만 이보다 적절한 대상은 없었다.

‘신기루 Mirage #2’는 ‘바다’ 연작 중 하나다. 사막에서 수십 명의 스태프가 캔버스 천을 잡고 좌우로 길게 늘어섰다. 이명호가 카메라를 가지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면 캔버스 천이 바다처럼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해변에서 보는 새하얀 포말 같았다. 사막에서 보는 바다는 신기루로 눈앞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두 작품은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색을 풍기는 것이 매력이다. 이런 연유로 후보정으로 사진을 만들어 낸다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고 그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없으니 정성스럽게 작업하게 된다. 이러한 정성 속에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도 들어있을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을 때 셔터를 누르기 때문에 매력적인 화면이 완성되는 것일 것이다.

#서있는 나무와 물결치는 사막이 사라진 곳

작가는 올해 초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의 제목은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였다. 그는 이 전시에서 회색 방 작업, ‘Nothing But’을 선보였다. ‘Nothing But’에도 캔버스가 서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서 있는 나무도 물결치는 사막도 사라진 채 홀로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상한 것은 비어 있는데도 충만함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보는 사람이 해석할 수 있도록 대상을 지워봤다고 말한다. 결국, 어떤 것도 담고 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품고 있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보고 1980년대 가요 ‘백지로 보낸 편지’가 떠오른다고 말했단다. ‘사연이 너무 많아 쓸 수가 없으면 백지라도 고이 접어 보내주세요’라는 가사가 담긴 노래다.

이 전시를 보고 나서 궁금증이 생겼었다. 이미 세 주제를 모두 다룬 작가가 어떤 작업을 할지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 전 궁금증이 풀렸다.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에서 새로운 작품을 보고 난 뒤였다. 여기서 작가는 연미산 숲속, 작은 풀 뒤에 손바닥만 한 캔버스를 세웠다. 그는 조금 더 섬세한 시선으로 대상에 가 닿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가을에는 많은 것들이 색을 바라고, 떨어지거나 부스러진다. 봄과 여름 내내 꼿꼿하던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올가을에는 이런 느낌을 경험하지 않을 것 같다. 떨어지고 부스러진 것들 뒤에 이명호처럼 작은 캔버스를 마음속에 세울 예정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존재를 환기하고 지난 시간을 되새겨 그 의미를 간직하고자 한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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