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기도의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A(27)씨는 상사의 잦은 회식 권유가 업무 외 가장 큰 스트레스다. A씨는 “업무 특성상 늦게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상사를 모시고 술까지 마시고 나면 녹초가 된다”며 “이 때문에 최근 부쩍 건강이 나빠진 걸 느낀다”고 토로했다. 최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과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회식 강요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단합’을 명목으로 퇴근 후 술자리가 마련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A씨는 “상사들은 ‘고생한 후배에게 술 한 잔 사겠다’는 취지라고 하지만, 저연차 직원이 빠질 수 없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2. 대학생 김모(23·여)씨는 3년 전 장기자랑을 강요받았던 신입생 환영회가 아직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씨는 “선배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아이돌 춤을 연습했다”며 “당시에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이후 크고 작은 술자리에서도 선배들은 김씨에게 장기자랑을 요구하기도 했다.

2일 고려대학교 불평등과민주주의센터와 한국리서치의 갑질 피해 경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9명(90%)이 최소 한 번 이상 갑질을 당해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일상 속 사소한 갑질들이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사회적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갑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상으로 여겼던 갑질부터 하나씩 되짚어보고, 사회 전반의 ‘갑질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늘 회식 무조건 참석하는 거 알지?”
단합과 친목이라는 명목 아래 술자리 참석을 강요하는 ‘회식문화’는 일상화된 갑질 중 하나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2017년 직장인 989명을 대상으로 ‘회식 부담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6.6%가 회식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로는 ‘퇴근 후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불편한 사람과 함께해야 해서’ 등의 답변이 나왔다. 지난해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B(26)씨는 “(회식) 장소 섭외부터 자리 세팅, 그리고 상사의 이야기 맞장구 등 (회식은) 신경 써야 할 점이 많다”며 “가끔 (신입사원이) 분위기를 띄워 줘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또한 큰 고통”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전후로 회식이 ‘근무시간의 연장’이라는 문제의식이 불거지긴 했지만, 현장에선 아직 회식 강요 문화가 뿌리 뽑히지 못한 상태다. 사람인이 지난해 직장인 695명을 대상으로 ‘아무 이유도, 불이익도 없이 회식을 거부할 수 있는가’를 물어본 결과 10명 중 4명 이상(44.9%)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에 맞춰 ‘의사와 상관없는 회식 참여 강요’도 괴롭힘으로 규정했지만, 현장에선 이른바 ‘공식 회식’이 아닌 사적 술자리도 회식과 마찬가지로 거절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아 장기자랑 한 번 해봐”
대학이나 기업에서 ‘아랫사람’에게 장기자랑을 강요하는 것도 갑질에서 빠질 수 없다는 항목이다. 2017년 경상대학교 학보사인 ‘경상대신문’에서 재학생 252명을 대상으로 ‘새내기 배움터’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중 82.5%가 ‘신입생 장기자랑(춤, 노래 등)’이 주요 행사였다고 답했다. 같은 해 중앙대학교 학보사인 ‘중대신문’이 대학생 21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신입생 68%와 재학생 89.4%가 ‘신입생 장기자랑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대학생 이모(25)씨는 “신입생 때 장기자랑을 싫어하던 친구들이 선배가 된 후에는 후배한테 장기자랑을 요구하는 걸 보면서 (장기자랑이) 뿌리 깊은 악습이란 걸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도 상황은 비슷하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2017년 직장인 341명을 대상으로 사내 장기자랑에 참여해 본 경험을 물어본 결과 62.2%가 참여해 본 것으로 나타났고, 이 중 74.5%는 반강제로 참여했다고 답했다. 이들 중 절반가량(49.5%)이 장기자랑이 끝난 이후에도 당시 상황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10명 중 1명(12.1%)에 불과했다.
일상 속 갑질들에 대해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회식에 강제로 참여시키는 것과, 노래와 춤을 강요하는 등의 행동이 불법인지조차 모르고 하는 것”이라며 “(을들은) 이런 것을 신고해 봤자 자신만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런 것들이 모여 사회의 여러 긴장이나 갈등을 유발하고, 결국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가중해 사회 전반적인 행복감을 떨어뜨린다”고 강조했다.

◆“역지사지 마음으로 ‘갑질 감수성’ 높여야”
전문가들은 이처럼 사소하지만 뿌리 깊은 갑질문화가 지속하면 누구나 을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모든 영역에서 100% 갑인 사람은 없다”며 “자신이 을의 입장에서 겪었던 것을 다시 깨닫고, 이를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사회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갑질 관련 설문조사(2017년 성인 1000명 대상)에서도 응답자 10명 중 8명(78.1%)이 ‘역지사지의 마음만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갑질 횡포는 줄어들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일상 속 민주시민 교육과 갑질을 막기 위한 실효성 있는 제도도 뒷받침돼야 한다. 김 교수는 “미디어 등을 통해 ‘갑질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지속적인 인권·민주시민교육을 시행하는 한편 (갑질을 막기 위한) 제도가 실제 실행력과 액션플랜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 교수는 “일종의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관행처럼 여겨지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이것이 비합리적이라는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갑질이란 것을) 알려도 (상대가) 바뀌지 않는다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도 확실히 뒷받침돼야 한다”고 했다.

◆‘사소한 갑질’ 없애니 직원 만족도·생산성 ‘쑥’
일상 속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사소한 갑질’들을 없애기 위해선 개개인의 의식개선뿐만 아니라 조직 차원의 혁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조직이 앞장서 갑질 폐지를 위해 노력할수록 구성원들은 높은 만족도를 표했고, 일부 조직에서는 생산성 향상 등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2일 서울대학교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학소위)와 총학생회에 따르면 이들은 올해 초 신입생 입학에 앞서 ‘장기자랑 강요 FREE 선언 릴레이’를 진행했다. ‘새내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장기자랑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선언을 단과대학이나 각 학과 학생회 등이 연달아 발표하는 이 릴레이에는 총 21개의 학내 단체가 참여했다.
총학생회는 릴레이를 시작하면서 “관습처럼 행해지는 장기자랑은 선택이 아닌 의무로 강요될 때가 있다”며 “선배들은 장기자랑을 평가하지만, 새내기들의 입장에서는 부담이자 불편함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학생들을 상대로 피드백을 받은 학소위에 따르면 릴레이에 대한 학생들의 ‘전반적 만족도’는 4.71점(5점 만점)으로 나타났다. 학소위 관계자는 “앞으로도 매년 릴레이를 이어갈 예정”이라며 “이를 발전시켜 ‘강권 Free 선언’ 릴레이도 진행하고 싶다”고 전했다.
‘회식 강요 문화’를 없앤 기업들에서도 직원들이 높은 만족도를 표했다. 우리은행은 지난 5월 직원들이 서로 지켜야 할 사항과 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정한 ‘Do&Don’t 캠페인’ 시행을 통해 음주 위주의 회식을 지양하고, 대신 콘서트 관람 등의 문화행사로 이를 대체하도록 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직원들이) 가정과 자기계발을 위해 남는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며 “자기계발을 통해 (직원들의) 생산성이 증대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화학·에너지 기업인 OCI도 지난해 6월부터 불필요한 회식을 회사 차원에서 폐지하는 등 회식 강요 문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 중이다. OCI 관계자는 “법인카드로 회식비를 내면 감사대상이 된다”며 “(회식 강요 폐지에 대한) 직원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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