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수준 높으니 걱정 없어요.”
오는 10월 초 유럽 순회 연주에 나서는 박영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에게 “유럽 현지에 수준 높은 연주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없느냐”고 묻자 즉각 돌아온 답이다. 박 상임지휘자는 “물론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는 오랜 전통도 있고, 예산도 풍부하고, 잘하는 이를 뽑은 데서 또 뽑으니 잘하지만, 유럽 모든 오케스트라가 다 잘하는 건 아니다”며 “좋은 계기만 있으면 우리가 더 잘할 테니 특별한 부담은 없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이 젊고 기량도 좋다. 특히 부천필은 기량이 월등한 오케스트라”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10월 4일 독일 쾰른필하모닉홀 연주를 시작으로 베를린에서 프랑스 메츠로 이어지는 이번 유럽 정기연주회는 한국 작곡가 조은화가 작곡한 장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하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0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4번 등 까다로운 곡이 고루 포함됐다. 최근 추계예대 연구실에서 만난 박 상임지휘자는 “레퍼토리도 많고 힘든 곡도 많은데 단원들이 모두 집중하다 보니 연습진도가 굉장히 빠르다”며 “오늘로 사흘째 연습인데 벌써 ‘이런 컬러가 나오겠구나’는 연주 형체가 나온다”고 말했다.
특히 부천필은 이번 유럽투어에서 세계 클래식 연주자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전통의 베를린필하모닉홀 무대에도 선다. 박 상임지휘자는 “베를린필하모닉홀 연주는 누구나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세계 정상급 연주홀 무대에 설 기회를 갖는다는 건 여러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마침 부천필은 오랜 산고(産苦) 끝에 2023년을 목표로 전용 콘서트홀을 짓기 위한 터 잡기를 시작한 상태다. 오케스트라는 꾸준히 같은 공간에서 연습해야 자신만의 음색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케스트라에 전용 연주홀은 꼭 필요하나 실제 가지고 있는 악단은 베를린필, 빈필 등 세계적으로도 손꼽을 만큼 적은 ‘꿈의 무대’다. 국내에서도 부천필이 자신만의 연주홀을 가진 첫 오케스트라가 될 전망이다.
부천시가 일찌감치 ‘문화도시’로 좌표를 설정하고 이에 호응해 부천필이 좋은 성과를 쌓아온 덕분이다. 박 상임지휘자는 “전임 임헌정 선생이 젊으실 때 부임하셔서 24년간 놀랍게 발전시키셨다. 그래서 시에서도 전용 홀을 짓자는 얘기가 20년 전부터 있었으나 그만큼 예산이 안 따라오다 제 임기 때에 와서 지어지니 제가 운이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부천필하모닉홀’이야기에 박 상임지휘자 목소리는 열기를 띄었다. 그는 “여러 전문가가 모여 회의를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제 주장은 오로지 ‘음향의 중요성과 예산배정을 최우선으로 해달라’였는데 다행히 모두가 공감해줬다. 다른 건 예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음향 부분 예산은 고정됐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설계단계에서부터 연주자는 물론 악기 담당 등 여러 악단 관계자들이 모두 의견을 내서 악기 이동을 위한 동선, 연습실 크기, 음향 조건 등이 세세히 검토됐다. 박 상임지휘자는 “오케스트라가 주인으로서 연주홀 건축단계부터 참여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덕분에 ‘클래식·무용·연극·뮤지컬 등 모든 공연이 가능하다’며 지어놓았으나 결국 모든 공연에 부적절한 무대가 되어버리는 여느 지자체 다목적홀과는 차원이 다른 클래식 전용 연주장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박 상임지휘자는 “고양 아람음악당(2007년)이 그 시대 지어진 것 중에는 음향이 가장 좋고, 최근 지어진 롯데콘서트홀(2016년)은 다른 연주홀과는 또 다른 세대에 속한다”면서도 “우리 연주장은 한발 더 나아가서 가변형 천장 음향판을 최초로 갖게 된다. 오케스트라 편성에 따라 잔향을 조정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국내에선 소방법에 걸려 이를 적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고 자부했다. 적지 않은 예산문제로 빠졌던 파이프오르간도 부천시 결단 덕에 설치되는 쪽으로 막판에 바뀌었다. “후대에 보면 또 시대적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최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콘서트홀이 태어날 겁니다. 영국 전문업체가 음향을 담당하는데 ‘모든 디테일한 소리가 살아날 수 있도록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32세 젊은 나이에 추계예대 교수가 되어 50세에 부천필 상임지휘자가 된 박영민은 5년 전 취임 일성으로 “계속 새로운 시도도 하고 수준도 높여야 한다. 적당히 하면 퇴보한다”고 다짐했다. 그 말대로 2015년 시작한 ‘말러 시리즈’, 2016년 ‘바그너의 향연’, 2017년 ‘R. 슈트라우스 시리즈’에 이어 올해 러시아의 20세기 음악을 대표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를 진행 중이다. 레퍼토리가 화제에 오른 김에 왜 국내 클래식계에 ‘말러’, ‘쇼스타코비치’ 곡들이 풍년인지 물었다. “요즘 유행이죠. 제가 학생일 때(80년대)는 말러는 (대편성이어서) 국내 오케스트라는 연주가 불가능했고 쇼스타코비치는 옛소련 적성국 음악이어서 금지곡이었어요. 연주가 금지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음반을 못 사게 한 시절입니다. 오케스트라 레퍼토리가 보통 베토벤, 브람스 곡인데 그러다 보니 너무 차별성이 없어요. 오케스트라 곡에도 사이즈가 있습니다. 보통 2관 편성이면 단원 60명 이하 중소규모 오케스트라고 부천필은 3관 편성으로 단원수가 80여명입니다. 그러면 80여명이 참가하는 걸 해야 하는데 모차르트 곡을 하면 참여 단원이 너무 적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선택의 폭이 줄어들어요. 80여명이 할 수 있는 곡이 많지 않습니다. 말러 교향곡 정도를 언제든지 좍 꺼내서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오케스트라면 사실 웬만한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중이 얼마나 연주곡에 익숙 해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현대곡·창작곡 연주가 적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현대곡이 들어가면 관객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한 곡만 끼어 있어도 관객이 그 곡 끝나고 들어올 정도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모험해야 하지 않냐’고 하는데 현실이 녹록지 않다”고 설명했다.
해군제독, 야구감독과 함께 한번 해볼 만한 직업으로 꼽히는 지휘자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물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 혼자 만드는 게 절대 아닙니다. 방향성을 제가 제시하면 단원 각자 아티스트라서 그것에 대한 자신들 반응이 있습니다. 그런 반응이 모여서 부천필만의 컬러가 나오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술이죠. 전체적으로 음악과 음색을 만들기 위해 여러 악기가 조금씩 음정을 조정해서 그 색깔을 만드는 게 오케스트라 예술의 결정체입니다. 오케스트라는 미묘한 차이로 컬러가 조금씩 변합니다. 열심히 세공하듯 화음과 리듬을 다듬어내는 걸 강조합니다. 무슨 ‘화이팅’류의 단합, 인간적 소통을 위한 회식 같은 건 전혀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휘자=카리스마’라는 인식에 대해서도 박 상임지휘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며 뜻밖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요즘 세계적으로 여성 지휘자가 우대받는데 그들이 기회가 주어지니 굉장히 잘한다”며 “왜냐면 여성 지휘자는 ‘마초 스타일’처럼 쓸데없이 인간적 지배를 하려 않는다. 그게 오히려 오케스트라 단합을 잘 시킨다. 역사적으로 얘기된 지휘자의 남성성이 오히려 온전한 의미에선 ‘앙상블’을 그다지 못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지휘자, 좋은 오케스트라’에 대해선 “딱 음악에 헌신해야한다”고 말했다. 박 상임지휘자는 “지휘자는 동작이나 신호, 표현이 음악적 목표에 딱 분명히 부합해야 한다. 그러기 쉽지 않아서 하는 얘기다. 과장이나 허세는 지휘자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며 “그런 유혹을 느낀다.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니까”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지휘자의 쇼맨십도 무대에서 보다 자극적인 음악 반향을 끌어내기 위해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런 이유 없이 그저 과장된 몸짓인 경우가 매우 많다는 지적이다. “지휘자도 연주할 때는 연습할 때와 달리 오케스트라에 보여주는 면모가 있습니다. 무대에 불이 들어왔을 때 지휘자의 그런 열정에 단원도 스스로 감동하고. 지휘자도 감동하면서 관객도 예기치 못한 효과와 음악적 달성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냥 과장된 쇼맨십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좋은 연주자는 음악에 헌신해야 합니다.”
공연계에서 오랫동안 시빗거리인 관객 매너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는 “조용할 때 (소리)나면 좀 짜증 나죠. 집중해서 잘 가는 중인데 ‘김샜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탓할 수는 없죠. 물론 전자기기는 조심해야 하고 아예 차단했음 좋겠는데, 그 또한 실황이 가진 우연성 아니겠어요. 그런다고 연주가 흔들릴 정도는 아닙니다. 그 정도는 극복해낼 수 있어야 프로죠. 돈 내고 시간 내서 온 관객이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텐데. 특히 악장 간 기침은 집단 심리죠. 세계 어디나 있는 현상입니다. 날씨 나쁜 나라는 관객 기침이 굉장히 많아요. 러시아 연주를 들어보면 계속 누군가 기침합니다.”

포부만큼 도전적으로 부천필을 이끌어 온 박 상임지휘자는 유럽투어 후 계획에 대해서 “너무 고생하는 건 안 해야지 한다”면서도 야심찬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또 다른 음반 녹음 시리즈를 생각해봐야죠. 말러 심포니 등 부천필이 녹음한 음반이 꾸준히 호응을 얻으며 굉장히 성공했습니다. 또 연주홀이 완공되면 국제음악제도 가능한데 하려면 미리 준비해야죠.”
마지막으로 콘서트홀 연주 직전 객석과 악단의 모든 감각이 그가 치켜든 지휘봉에 집중된 순간 느낌을 물었다. “지배력이요? 어휴. 그게 부담이지 쾌감이겠어요. 부담이지. 내 손끝 하나로 왕창 말아먹을 수 있는 생각이 든다면 얼마나 부담이겠어요. 스트레스는 그냥 받아요. 받아서 엉망이 돼요. 지휘자가 장수한다는 건 옛날얘기고요. 아마 잘 된 지휘자만 장수했을 거예요. 잘 안된 지휘자는 그전에 다 죽었을 거예요.”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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