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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은별이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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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29 10:42:42 수정 : 2019-09-29 10: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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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은별이 사건’은 2011년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조모씨가 자신의 아들과 불과 2살 차이가 나는 15살 여자 중학생에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해 임신·출산에 이르게 했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된 사건입니다. 1심과 2심은 조씨에게 각각 징역 12년, 9년의 중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고 “연인 관계였다”는 조씨 손을 들어줬습니다. 지난해 조씨는 ‘서로 사랑해놓고 무고를 한 것’이라며 은별이에게 수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현재 재판이 진행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전문가들과 함께 그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26일 오전 11시 서울남부지법 314호 법정 앞. 커다란 백팩을 맨 A씨가 안내판에 다가섰다. 빼곡히 적힌 재판 일정을 훑어보던 A씨 시선이 멈췄다. ‘피고 OOO’.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OOO는 그의 딸이다. 세상은 딸을 ‘은별이’라 불렀다. 이른바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의 여자 중학생이 바로 그의 딸이다.

 

항소심 첫 재판이던 26일 어머니 A씨가 법정에 붙은 재판 안내판을 바라보고 있다. 이창수 기자

 

한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은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된 뒤 자연스레 ‘잊혀진 사건’이 됐다. 하지만 은별이와 그 가족들에게 ‘끝’은 없었다. 지난해 연예기획사 대표였던 조모씨가 이제는 20대가 된 은별이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성폭행 무고를 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검찰은 ‘혐의 없음’ 처분했고, 민사 재판부도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왔다고 해서 무고인 것은 아니다”란 취지로 은별이의 손을 들어줬다. 그럼에도 그는 집요했다. ‘꼭 다시 판단해 형사처벌을 해달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서를 제출했고, 민사 판결에는 항소장을 냈다.

 

“8년이나 됐어요… 어떻게 해야 끝이 나는 걸까요.”

 

거듭된 설득 끝에 어머니 A씨는 이날 짤막하게 소회를 털어놨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했다.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있죠? 처음 몇년간 제가 그랬어요. 분노와 슬픔, 괴로움, 자괴감에 어느 순간 말이 턱 막히더라구요. 한때 말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몇번이나 실신하기도 했죠. 많이 나아졌지만 불쑥불쑥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와요. 그때 (은별이가) 교통사고를 안 당했다면… 그런 생각에 지금도 괴로워요.”

은별이 측은 수사 초기부터 일관되게 ‘성범죄’임을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연인 관계로 보인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장면

 

조씨는 자신의 아들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은별이를 우연히 마주치고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했다. 그의 아들과 은별이는 불과 두 살 차이였다. “심지어 (은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가 났을 때) 파란불이었단 말이예요, 파란불….” A씨의 눈에 회한이 차올랐다. “(대법원 무죄 이후)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구나, 생각이 들어요. 우리 가족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느 부모가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저 하늘에 기도만 할 뿐입니다.” 오랜 소송 탓인지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은별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된 연예기획사 대표 조모씨는 은별이로 하여금 부모에게 가짜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오도록 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장면

 

그렇다면 조씨 입장은 어떨까. 앞서 그는 입장을 묻는 취재팀에 “상대방의 거짓 제보에 속지말라”“사건을 보도할 경우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조씨는 이 사건 관련해 은별이의 심리상태를 검사한 뒤 검찰에 의견서를 낸 대학 교수와 관련 기사에 댓글을 단 네티즌 등을 다수 고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날 법원에 나온 조씨의 변호인은 “나는 이 사건을 잘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며 명함 교환도 거부하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A씨와 법원을 찾은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아동·청소년 성범죄 사건의 경우 설령 형사 재판에서 무죄가 나더라도 무고를 이유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드물다”며 “소송이 계속되면 당시의 기억이나 감정이 계속해 떠오를 수밖에 없고, 이는 ‘치유의 단계’에 들어서는 것을 늦추게 된다”고 우려했다. 강윤영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우리 법원이 10대 청소년이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40대인 상대방에게 보낸 애정표현 메시지나 호칭 등을 근거로 ‘연인 관계’라 판단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사건 초기부터 은별이 측을 돕고 있는 이학용 목사는 “은별이 가족이 지금도 강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창수 기자

 

이번 소송이 정말 ‘끝’일까. 은별이 가족을 곁에서 돕고 있는 이학용 목사는 고개를 저었다. “상상해보세요. 아이는 자신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믿는데 국가가 ‘그건 사랑이었다’고 결론낸 거예요. 소송이 끝났다고 잊혀질까요? 이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은별이 사건은 ‘구조’의 문제…‘남의 일’ 아냐”

 

그동안 역대 정부는 모두 아동·청소년의 성을 철저히 보호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아동 성범죄에 민감한 국민 법감정이나 아동을 미성숙하고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가부장적인 분위기도 사회에 팽배하다. 그렇다면 ‘은별이 사건’이 유독 이례적인 케이스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폭력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숱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 2010년 20대 남성 3명이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2살 초등학교 여학생을 여관으로 불러 술을 마시게 한 뒤 돌아가며 성관계를 맺었으나 법원에선 무죄가 났다. ‘초등학생인 줄 몰랐다’‘저항하지 않았다’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2013년에는 40대 문구점 주인이 문구류 등을 주며 환심을 산 뒤 여자 중학생과 성관계를 맺었으나 역시 무죄가 선고됐다. 지난해 7월 대구에서도 10대인 조카와 성관계를 맺은 30대 남성이 “실은 연인 관계였다”는 주장을 펼쳐 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이는 ‘만 13세’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낮은 ‘성적 동의연령(age of consent)’ 때문이란 지적이 강하다. 즉, 우리 법이 13세만 넘기면 아이들도 ‘성관계로 발생하는 임신 등의 피해와 의미를 충분히 인지·예상한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란 것이다. 법정에서 아동과 성관계를 맺은 어른이 ‘동의’의 근거만 댈 수 있으면 나이차가 얼마가 나든 ‘적법한 관계’가 된다는 얘기다. 여기에 목격자나 증거가 부족한 성범죄의 특성,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이 먼저’라는 형사법 대원칙이 더해지면서 성범죄가 ‘사랑’으로 둔갑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된다.

 

권현정 탁틴내일청소년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아이들의 순수한 호의나 성적 호기심, 불안감 등을 이용해 ‘동의 증거’를 치밀하게 만들어 놓고 문제가 되면 ‘서로 좋아한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수사기관에 불려간 아이들이 제대로 된 대처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가해자들의 방어 논리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부소장인 장형윤 아주대 교수(소아·청소년정신의학)는 “현장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동·청소년들의 ‘동의’라는 것이 성이 지닌 다양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한 뒤 내려진다고 볼 수 없다”며 “성폭행은 ‘폭행·협박’이 있었는지가 중요한데 아동은 거의 100% 폭행·협박 없이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으며,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아이는 어른이 아냐…이 사건, 우리였으면 유죄”

 

그렇다면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들은 대부분 15∼18세를 동의연령 기준으로 삼고있다. 이 연령 이하 청소년의 경우엔 ‘동의 여부’가 별로 중요치 않다는 얘기다. 특히 ‘아동의 정서·신체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어른과의 성관계는 설령 동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무조건 범죄’란 시각이 확고하다. 다수 전문가들이 ‘은별이 사건’을 두고 “외국이었다면 ‘무죄’는 꿈도 못꿀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실제로 세계일보 취재팀이 지난 7∼8월 아동성착취 근절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인 엑팟 인터내셔널(ECPAT International)의 도움을 받아 국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설문에 응한 14개국 시민단체 중 12곳에서 ‘은별이 사건은 우리나라 같으면 유죄 가능성이 크다’는 의견을 보내왔다.

 

“나는 판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서 성범죄 피해 아동의 ‘강간’ 주장이 성인 가해자의 ‘연인관계(romantic relationship)’ 주장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론적으로 16세 미만 아동은 성행위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아리안 쿠브외 활동가·벨기에)

 

“15세 이하 아동과 음란행위를 할 경우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10년 이하 중형이 선고됩니다.”(껫사니 찬뜨라꿀 활동가·태국) “아동보호법에 의거해 18세 미만 아동과의 성교는 범죄입니다. 18세 미만 아동의 경우 외모의 성숙도가 법정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리오 활동가·인도네시아) 

 

“최근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20대 남성이 13세 여아와 성관계를 했다가 법원에 기소됐으나 ‘연인관계’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대중의 압력(huge pressure from general public)으로 결국 ‘강간’으로 재판결 내려졌습니다.”(토마스 카우프만 활동가·룩셈부르크)

 

개방적인 분위기로 알려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등도 ‘적어도 18세는 돼야 성행위에서 오는 각종 위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아동에게 접근하는 어른들을 처벌하고 있다. 강선혜 탁틴내일 팀장은 “다른 국가들의 연령 기준이 무조건 옳다거나 그들이 아동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건 아니다”면서도 “대부분 국가가 16세 이상을 동의 연령으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 이를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하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했다.

 

◆“100년 전 일본 기준을 왜 고집하나”

 

전문가들은 현행 ‘13세’ 기준이 1953년 형법 제정 때 별다른 사회적 합의 없이 만들어진 뒤 여지껏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는다. 학계에선 일본 정부가 1907년 만든 13세 기준이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70년 가까이 고집하고 있는 것과 달리, 정작 일본은 오래 전부터 지방자치단체 별로 ‘음행조례’를 만들어 18세를 사실상의 동의연령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일본 법무성의 ‘성교 동의 연령에 관한 논의 경위 등’이란 문건을 보면 1907년 일본 정부는 ‘여자의 발육 정도’ 등을 근거로 기존 12살이었던 의제강간 연령을 13살로 높인 것으로 나와 있다. 이 기준이 1953년 우리나라에 넘어왔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이창수 기자

 

유가쿠 도쿄 시바파크 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예를 들어 ‘도쿄도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에 관한 조례’를 보면 18세 미만 청소년과 성교 또는 유사성교를 한 사람은 2년 이하 징역이나 100만엔(약 114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게 된다”며 “다만 청소년의 건전한 육성이 목적이므로 청소년 간의 관계는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다수의 선진국들은 동의연령 기준과 처벌 조항을 꾸준히 손질하고 있다. 캐나다는 2008년 동의연령 기준을 14세에서 16세로 상향했고, 프랑스는 지난해 15세 미만 아동과는 합의한 성관계도 무조건 ‘강간’으로 처벌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는 아동을 정서적으로 길들인 뒤 범행을 저지르는 ‘그루밍 성범죄’나 “아이도 동의했다”“서로 좋아서 한 것”이라며 성착취를 합리화하는 어른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우리 사회가 단 한 번이라도 13세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등 의미에 대해 연구를 해본 적이 있느나”며 “100년 전 남(일본)의 법을 베껴 지금까지 안 바뀌고 있는데, 그때 일본 사회와 지금 우리 사회가 어찌 같을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우리 사회는 성 문제에 대단히 보수적이고 대부분 이슈에서 아이들을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유독 이 문제에서만큼은 아동·청소년에게 ‘너희의 선택이니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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