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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고 갈 땐 '일본인'이라 하고… 보상 땐 '조선인'이라 제외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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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8 06:00:00 수정 : 2019-09-18 09:5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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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의 파렴치한 이중적 태도 / 일제 패망 후 국적 바뀌었단 이유로 / 각종 보상·지원 정책서 철저히 배제 / 야스쿠니 합사 땐 다시 일본인 둔갑 / 죽어서도 끝나지 않은 비극 / 일본 내 조선인 유해 수습 않고 방치 / 해외서 발굴된 유골은 '무연고' 처리 / 우리 정부 DNA 감정 요청마저 거절 / '끝없는 사죄' 獨과 너무 달라 / 독일은 국내외 피해자 모두에 보상 / 기업체 강제노동도 재단 세워 구제 / "韓정부, 日에 구체적 제안 계속해야"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도쿄 촛불행동’의 지난달 10일 시위행진에 맞불집회를 놓은 일본 우익들.

‘끌고 갈 때는 일본인, 보상·지원할 때는 한국인.’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내세운 일관된 논리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제의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동원돼 가장 혹독한 현장에 투입됐지만, 일제 패망 후에는 국적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시행한 각종 보상과 지원에서 배제됐다.

아베 신조 정부는 심지어 2016년부터 매년 20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 전몰자(전쟁 피해 사망자) 유골을 본국으로 들여오면서 조선인은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본인이 사망한 곳마다 그들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조선인도 있다. 나라를 잃고 한때 ‘일본인’이 되었던 이들의 비극은 사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가 자국 내 조선인 유골을 방치하면서 지금도 가해자의 땅에 남은 이들도 많다. 수습된 유해는 일본 사찰에 모셔졌지만 홋카이도와 규슈 등에 있는 악명 높은 작업장 터에는 여전히 수많은 조선인이 땅속 깊이 잠들어 있다.

인간의 유해는 예를 갖춰 안치하지 않는 한 대부분 사람에게 꺼림칙하게 받아들여진다. 하물며 자신의 터전에서 강제로 외국으로 끌려가 원통하게 죽은 외국인 유골이 곳곳에 방치돼 있는데도 많은 일본인이 이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역사를 은폐하고 피해자를 배제, 제외한 결과다.

◆각종 지원·보상에서 한국인 배제

일본 정부는 1952년 제정한 ‘전상병자전몰자유족등원호법’(원호법)과 은급법(연금법)을 통해 자국민 희생자들에게 보상을 하면서 조선인들은 국적 조항을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했다. 앞서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이후 조선인의 국적을 일괄적으로 박탈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군인·군속을 과거에 일본인이었다는 이유로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했다. 보상에서 제외할 때는 한국인이라고 해놓고 야스쿠니 합사 때는 일본인으로 취급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의 경우 1957년 제정된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의료 등에 관한 법률’과 1968년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통해 일본 내 모든 피해자에게 지원했다. 하지만 재일동포와 한국에 돌아온 조선인에 대해선 오랜 기간 피해 실태조사를 하지 않아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지원 범위를 넓히는 노력을 한 것이다. 1965년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생존피폭자의 건강·생활조사를 한 일본 정부는 2005년이 돼서야 재일동포와 한국인을 조사 대상에 포함했다. 피폭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한국인에 대한 보상도 2003년에서야 이뤄졌다.

일본은 패망 후 소련(러시아) 시베리아에 억류된 일본군과 조선인에 대한 보상에 있어서도 차별을 했다. ‘시베리아 억류자’들은 종전 이후에도 처참한 생활을 했다. 소련은 전쟁 포로를 그냥 풀어주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확인한 1956년 소련 내무성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포로 및 억류자는 60만9448명, 조선인은 1만206명이었다. 소련은 포로를 자국의 경제부흥을 도모할 전후 보상으로 여기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앞서 패망을 예측한 일본 정부가 동의한 일이었다. 억류된 일본인 6만1855명과 조선인 71명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목숨을 잃었고 이들 대부분이 시베리아의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동사했다.

일본 도쿄 메구로구의 사찰 유텐지에 있는 조선인 납골당의 모습. 이곳에는 조선인 군인·군속 유골 712위(한국 281위, 북한 431위)가 안치돼 있지만 사찰 안에는 조선인 유골이 있다는 안내 문구나 표시판조차 없다.

최전선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자국민을 소련에 바쳤던 일본 정부는 2010년에서야 관련법을 만들어 보상에 나섰다. 이때에도 일제와 소련에 의해 두 번이나 강제동원돼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한국인은 배제됐다.

반면 이웃국가에 끝없이 사죄해온 독일은 연방보상법 등을 통해 국내외 피해자 모두에게 보상조치를 취하고 2000년부터는 독일 국가뿐 아니라 기업이 자행한 강제노동 피해자에게도 재단을 세워 구제했다.

◆유해 수습에서도 배제…“한국 정부가 요구해야”

일본이 자국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내세우는 근거에는 ‘국적 조항’ 외에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있다. 이러한 논리를 총동원하더라도 부모의 유골을 돌려 달라는 유족들의 외침만큼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2016년 ‘전몰자 유골수습 추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대상을 일본인으로 한정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한국 유족단체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단체들도 항의했지만 일본은 끝내 유골 수습에서도 조선인을 배제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2015년 ‘전후 70주년 담화’에서 “더는 과거사와 관련해 사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진정한 사과를 통한 화해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발언으로 해석됐다. 이듬해 전몰자 유골수습 추진법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여졌다. 희생된 국민에게 국가의 책임을 다하며 전쟁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패권 국가 시절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일본 도쿄의 국회 인근을 배회하며 선전방송하는 우익 차량의 모습.

국제인도법은 사망자 수색과 신원확인, 매장, 가족에게 통보, 유해송환 등을 전쟁 당사국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자국 병사뿐만 아니라 적국 병사에게도 일정한 의무를 부여한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한국 정부의 구체적 제안이 있으면 적절한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유다. 시오자키 야스히사 후생노동성 대신은 2016년 일본 참의원 후생노동위원회에서 “유족의 심정을 배려해야 한다는 지적을 수용해 한국 정부의 제안이 있으면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도 말뿐이었다. 한국 행정안전부는 한국인 유족 169명의 DNA 감정과 한국 과학자를 파견한 공동연구를 일본에 요구했지만, 일본 후생노동성은 한국 외교부의 정식 제안이 아니라는 납득되지 않는 이유로 거절했다. 일본 정부는 외국 발굴 현장에서 나온 유골의 출신지를 구별해 돌려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화장해 버리거나 무연고 유골로 처리해 일본으로 들여오고 있다.

한국인 유해봉환을 힘쓰고 있는 ‘전몰자의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씨는 요지부동인 일본 정부를 움직이기 위해선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장에서 나온 유골을 과학적 근거도 없이 일본인이라 결론짓고 화장한 뒤 일본에 매장하는 행위를 당장 중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일본에 구체적 제안을 계속하면서 제안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도쿄=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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