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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계약서 유명무실…공연예술계 ‘열정페이’는 진행형 [연중기획 - 청년, 미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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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3 13:13:43 수정 : 2019-09-13 19: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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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난 청년 대상 임금 착취 여전 / 아이돌 ‘인투잇’ 김성현 ‘노예계약’ 폭로 / 가요계 중소기획사 아직도 사각 지대에 / 연습생, 소속사 허락 없이 활동 전혀 못해 / 젊은 성악가 돈 내며 오페라 무대 서기도 / 2015년 연극인 평균 연봉 1285만원 불과 / 아르바이트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
일자리 찾기 힘든 청년을 대상으로 한 공연예술계의 임금 착취 세태는 여전하다. 사진은 2015년 8월 패션노조·알바노조·청년유니온 등이 패션업계의 ‘열정페이’에 대해 규탄 시위를 벌이던 모습.

예술계 ‘열정페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2015년 패션계에서 유명 디자이너가 견습생 10만원, 인턴 30만원, 정직원 110만원을 월급으로 지급했다는 폭로 이후 수년간 사회 각 분야에서 열정페이를 없애기 위한 노력이 벌어졌으나 공연예술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주로 일자리 찾기 힘든 청년을 대상으로 한 임금 착취 세태는 여전하다.

특히 가요계에선 엠넷(Mnet) ‘프로듀스 X(엑스)101’에 출연했던 아이돌그룹 인투잇 멤버 김성현이 지난 5일 SNS에 올린 글로 열정페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저는 ‘인투잇’을 시작한 이후 계약금은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산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스케줄 전 헤어 비스타일링 비용도 멤버들 개인돈으로 지불했습니다. (중략)저는 위약금(1억2000만원)을 내야만 인투잇 탈퇴와 계약해지를 할 수 있습니다.”

‘인투잇’을 시작한 이후 계약금은 물론 단 한 번도 정산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힌 김성현의 인스타그램.

인투잇은 데뷔 전 260회 상설 공연으로 경험을 쌓은 뒤 2017년 정식 데뷔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연예인들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마련한 지 오래지만 동방신기, 카라, 블락비, 엑소, 시크릿, B.A.P, 강다니엘 등에 이르기까지 아이돌의 ‘노예계약’ 문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표준계약서를 따르더라도 아이돌에게 불리한 조항이 많고, 그나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탓이다. 표준계약서상 아이돌이 얻은 모든 수입은 소속사로 돌아가 투자비를 먼저 회수한다. 남는 돈만 멤버들이 나눠 가지는 식이다.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당연히 수익분배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명 아이돌인 AOA나 FT아일랜드도 각각 데뷔 3년, 5년 만에 첫 ‘정산(수입)’을 받았다.

연습생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표준계약서에 명시된 최대 계약 기간에 연습생 기간이 포함되지 않는 탓이다. 전속기간은 원칙적으로 계약체결일로부터 7년까지지만 데뷔일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데뷔 전까지 수년의 연습생 생활을 거치는 아이돌들은 이 기간 소속사 허락 없이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김성현

하지만 연습생들이 계약을 해지할 경우 투자비용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을 위약금으로 배상하도록 돼 있어 소속사를 나가기조차 어렵다. 보통 연습생 기간이 3년 정도로 평균 5300만원 정도 들어가는 점을 고려하면 위약금의 규모는 1억~1억5000만원에 달한다. 연예인 지망생들의 처우 문제가 계속 지적되자 공정위는 2017년 3월 자산총액 120억원 이상인 SM, 로엔, JYP, YG 등 8개 대형 기획사를 대상으로 연습생과의 계약서를 심사해 불공정 약관 조항을 시정토록 했지만 중소 기획사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아이돌은 연예계 다른 부문보다도 기획사의 지원이 중요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갑을관계가 형성된다”며 “특히 나이가 어린 학생들이 대상이 되기 때문에 사회적 감시가 더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호근 국립오페라단장

클래식 분야도 열정페이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다. 지난 4월에는 당시 윤호근 국립오페라단장이 열정페이 문제 때문에 오페라축제 기자회견석상에서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벌어졌다. 관객층이 적은 오페라는 공연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무대에 설 기회를 얻기 위해 성악가들이 출연료를 받기는커녕 심지어 제작비 일부를 부담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내며 무대에 서는 일이 빈번한 실태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지금은 퇴임한 윤 단장은 “오페라계에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잘 안다. 자정해서 노력하겠다”며 업계 관계자로서 책임감에 눈물까지 흘려야 했다. 윤 단장은 “무대에 선 성악가들이 화려해 보이지만 삶은 만만치 않다. 빵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위해 무대에 선다. 노래할 때, 관객에게 자기 예술을 보여줬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사는 분들”이라며 “예술가들이 너무나 힘든 상황이다. 오페라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경영난이 만성인 연극계 열정페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원체 경영이 어려운 탓에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다수 연극인이 열정페이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고 있다. 2015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당시 연극인들이 1년간 예술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평균 수입은 1285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일부 인기 배우의 거액 개런티가 포함한 평균인 만큼 대다수 배우는 최저소득 이하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문화재단 서울연극센터가 2013년 말 발표한 ‘대학로 연극 실태조사’는 더욱 적나라하다. 평균적인 연극인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30대 미혼 남자 배우’인데 월평균 114만원을 버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조차 연극과 관련된 수입은 77만원이고 생계를 위해선 아르바이트 활동이 불가피했다.

이는 6년 전 조사이지만 연극인들에 따르면 지금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체감하는 생활고와 경영난은 더 어려워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촉망받는 중견 30대 연극인은 “나는 형편이 좋아서 연극과 상관없는 아르바이트는 몇 년 전부터 안 하지만 연기학교 강사 등은 꾸준히 해야 한다”며 “다른 배우들은 생활 일선에서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원로 연출가 A씨는 “아르바이트로 생업을 이어가는 배우들이 대부분이라 규모가 큰 연극이나 연습시간을 많이 뺏어야 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뮤지컬 분야는 대형 작품의 경우 회당 출연료 지급 등이 이뤄지나 가끔 임금 미지불 사건이 벌어지곤 한다. 또 제작부문 팀별 상황은 열정페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음악팀을 비롯해 분장팀, 무대팀 등은 제작사와 건별로 계약하는데 보조 스태프는 그 팀에 속하게 된다. 팀에 주어지는 돈은 한정돼 있어 팀을 이끄는 음악감독, 분장감독은 예산에 맞춰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어떻게라도 경력을 쌓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열정은 적은 보수와 맞바뀌게 된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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