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궁박한 처지여야 처벌하는 아청법, 현실 외면 꼼수 입법”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입력 : 2019-08-22 06:00:00 수정 : 2019-08-22 00:08:0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하> 아동의 성 지키지 못하는 나라 / 세계일보·탁틴내일 공동 인식조사 / 궁지로 몰리는 피해 아동들 / 잇단 아동 성범죄로 사회적 여론 들끓자 / ‘16세 미만과 성관계 땐 무조건 처벌’ 개정 / ‘궁박함’ 조건 담아 법적 다툼 여지만 남겨 / 현장 목소리 외면하는 의제강간 연령 / “아동은 100% 폭행·협박 없이 성폭행 가능” / 현행 13세 기준 아동의 특수성 고려 안돼 / 투표·결혼할 권리 비해 性만 주체성 강조 / 핵심은 보호… 사회적 화두 던져야 / 우회 입법으로 보완, 근본적 해결책 못돼 / 아동의 사회·문화·정치적 위치 변화 인정 / 성적 목적 접근하는 어른 책임 강조해야

2008년 캐나다는 아동의 ‘성적 동의 연령’ 기준을 14세에서 16세로 상향했다. 지난해 프랑스에선 15세 미만 아동과는 합의한 성관계도 무조건 ‘강간’으로 처벌하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처럼 선진국이 동의 연령과 처벌 조항을 꾸준히 손질하는 건 ‘아이도 동의했다’는 주장을 펴며 성적 착취를 합리화하려는 이가 갈수록 늘기 때문이다. 물론 동의 연령 상향을 두고 “아동·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활발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은 1953년 형법 제정 때 만든 13세 기준을 현재까지 고집한다. 그동안 제대로 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국민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볼까.

 

세계일보와 탁틴내일이 공동 기획하고 현대리서치연구소가 수행한 대국민 인식조사(19∼59세 성인 1000명 대상)를 21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아이의 성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뚜렷했다. 응답자의 76.8%가 “현행 만 13세인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올려야 한다”고 답했다. 자녀가 있는 응답자들의 찬성률(81.1%)은 더 높았다.

 

상향 연령으로는 18세가 24.9%로 가장 많았다. 이어 13세(21.1%), 15세(19.8%), 16세(14.6%) 순이었다. 미취학 자녀를 둔 응답자들은 불안감이 더욱 커 상향 기준으로 18세를 꼽은 비율이 다른 집단보다 높은 33.7%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아동의 ‘성’을 터부시하고 그저 ‘모른 체’만 해왔다고 꼬집는다. 그 결과 13세 이상 아동·청소년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심지어 계약 체결권도 없으면서 유독 성적 동의만은 가능한 모순이 생겨났다. 지금도 ‘제2, 제3의 은별이’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아동의 성적 동의 능력과 의미를 제대로 연구하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보다 현실성 있는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긴 했지만 허점이 너무 많아요. 아이들을 ‘궁지’로 몰고 있습니다.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높인 거 아니냐고요? 전혀 아닙니다. 사실상 ‘꼼수’예요.”

국회는 잇따른 아동 성범죄로 여론이 들끓자 지난해 말 아청법 개정안을 조용히 통과시켰다. 만 13세 이상 16세 미만 청소년과 성관계를 맺을 시 동의나 대가성 여부에 상관 없이 무조건 처벌받게 한 것이다. 사실상 의제강간 연령을 현행 13세에서 16세로 올린 효과를 기대한 셈이다. 하지만 그 ‘조건’이 문제였다. 아이가 반드시 ‘궁박한’ 처지여야 하기 때문이다. ‘궁박함’의 해석을 놓고 법정에서 다툼이 일어날 여지를 남긴 셈이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아동·청소년은 돌봄과 보살핌, 지원이 필요한 만큼 성인보다 기본적으로 궁박한 처지”라며 “가출 청소년만 궁박한 것으로 치면 예컨대 학교에서 일어나는 ‘그루밍 성범죄’나 최근 확산하는 온라인 성범죄는 어떻게 막을 것이냐. 현실을 전혀 모르는 입법”이라고 꼬집었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시각마저 나온다. 임수희 대전지법 천안지원 부장판사는 “아이들을 보호하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성범죄 피해 아동이 이제 스스로 재판에서 ‘궁박함’마저 입증해야 하는 구조가 됐다는 것이다. 임 판사는 “이 법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가 궁박하지만 않다면, 설령 궁박하더라도 이를 몰랐다면, 성관계나 성추행을 해도 된다는 신호를 준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은별이 사건’은 아이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하는데 국가가 ‘그건 사랑이었다’고 규정한 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런데 지금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비극은 앞으로도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법과 제도는 아이들의 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보호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일단 그동안 미뤄놨던 아동의 성, 즉 우리 사회 ‘성적 동의 연령’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일부러 외면해 온 아동의 성이 갖는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 전문가들 “현실 반영하기엔 너무 낮아”

물론 동의 연령 상향이 모든 아동·청소년 성범죄의 해결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현장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현행 13세 기준을 두고 “아동의 특수성이 고려되지 않은 기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설령 아동이 ‘동의’ 표시를 했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상대방의 ‘면책 사유’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부소장인 장형윤 아주대 교수(소아·청소년정신의학)는 “현장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동·청소년들의 ‘동의’라는 것이 성이 지닌 다양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한 뒤 내려진다고 볼 수 없다”며 “성폭행은 ‘폭행·협박’이 있었는지가 중요한데 아동은 거의 100% 폭행·협박 없이도 성폭행을 당할 수 있으며,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아동에 관한 ‘모순적’ 태도도 꾸준히 지적되는 대목이다. 왜 유독 성에 관해서만 아동의 ‘주체성’을 강조하느냐는 것이다.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예컨대 통장을 만들거나 휴대전화를 살 때 청소년은 모두 보호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성관계만 아이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아이도 분명 권리 실현의 주체인 것은 맞으나 왜 우리가 18세 미만을 ‘아동’(아동복지법)이라고 부르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동의 연령 상향을 단순히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만 볼 게 아니란 시각도 있다. 진란영 서울시립중랑청소년성문화센터장은 “아이들의 성적 권리를 인정하되 아이들에게 성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어른들한테 더욱 책임을 강조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논의, 이제라도 나서야”

하지만 그 기준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주로 선진국들이 많이 도입한 ‘16세’나 유엔 아동권리협약상 기준인 ‘18세’로 올리자는 의견부터 형법 조항은 그대로 놔두고 일본이나 독일처럼 ‘보완 입법’을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해당 나이에 참정권, 결혼할 권리 등도 함께 부여한다면 연령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는 “의무교육 확대 등 초기 양육 기간이 길어졌다는 점이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며 “모든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기까지 조건이 많아진 시대 변화를 감안해 동의 연령 역시 육체뿐 아니라 아동의 사회·문화·정치적 위치 변화 모두가 반영된 기준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라며 “‘어려운 문제’라며 자꾸 피하고 우회 입법으로 현행 13세 기준의 허점을 보완하려는 것은 문제만 더 복잡하게 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조진경 대표 역시 “‘아이니까’ 술·담배는 물론 투표권, 결혼할 권리 모두 허용하지 않으면서 ‘아이라도’ 성적인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건 몹시 이중적”이라며 “아이들의 성 보호 대책 마련을 정부가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지난달 국무총리실 산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아동이 성행위가 일으킬 결과를 제대로 추론하는 연령 시점에 관한 연구에 착수한 상태다. 이는 향후 관련 논의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이현숙 대표는 “동의 연령 문제가 제기된 지 벌써 수년째인데도 관련한 논의가 자꾸 뒷전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동의 연령뿐 아니라 아이들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우리 사회가 끊임 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