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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만 되면 성폭력이 '사랑' 둔갑… 너무 낮은 '성적 동의 연령' [탐사기획-'은별이 사건' 그후]

입력 : 2019-08-20 06:00:00 수정 : 2019-08-23 19:2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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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아직 끝나지 않는 '그 사건'/ 사회 공분 일으킨 ‘은별이 사건’/ 15세 여중생과 관계 40대 男 “연인” 인정/ “임신 충격… 상대 요구 끌려다녀” 반박에도/ 대법, 원심 깨고 무죄… 피해자 무고 피소/ 사랑·범죄 경계 모호… 법망 피하는 가해자/ 아이와 성관계 뒤 “서로 사랑한 사이” 주장/ 성적 호기심·불안 이용… 동의 증거 만들어/ 아동 특수성 인정 않는 法 무책임 지적도/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문제 없나/ 韓, 13세 이상 동의 여부 따져 유무죄 결론/ 성적 자기 결정권 놓고 인정 범위 논란/ “그루밍 범죄 늘어 동의 연령 재정립 시급”

“누구나 고교 시절은 추억으로 가득 차 있죠. 그런데 이 아이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고교 생활을 딱 한 달 했어요. 그리고 수년간 수사기관과 법정에 이리저리 불려가야 했어요.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또 법원에서 불러요. 절망감이 듭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도 크게 지었다는 걸까요….”

‘정의’란 무엇일까. 20년 전 맺은 인연으로 ‘은별이(A씨) 사건’ 초기 때부터 현재까지 A씨와 그 가족을 돕는 이학용(67) 목사는 ‘그 사건’ 이후 정의란 말을 입에 쉬이 담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자퇴, 보호시설, 6번의 재판, 그리고 지금의 소송전까지…. 세상은 참 가혹했다.

“지난해 변호사 없이 민사소송을 치렀어요. 시민단체에 알리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일부러 안 그랬습니다. 왜냐고요?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만큼 절망적이었는데….”

연예기획사 대표였던 조모씨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무죄를 들어 무고 등 혐의로 A씨를 형사 고소했다. 3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도 냈다.

조씨는 이 사건으로 1심 징역 12년, 2심 9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A씨가 조씨에게 150여통의 편지를 보낸 점, 평소 애칭을 사용한 점 등을 들어 ‘연인 관계’라고 결론지었다. A씨 측은 ‘어린 나이에 임신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고, 몸이 불편한 부모님이 충격을 받으실까봐 상대방 요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반박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 무죄가 나고 다수 언론이 판결을 지적했어요. 수많은 시민단체와 법조인도 도움을 주셨죠. 두 번째 대법 판결 전에 다들 ‘유죄가 날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결과를 보니…. 그래서 민사소송도 우리가 유리할 게 없다고 본 거죠.”

지난해 12월 1심은 “무죄가 확정됐다고 무고인 것은 아니다”는 취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올해 2월 검찰도 조씨의 무고 고소사건을 ‘무혐의’로 결정했다. 겨우 한시름 놓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조씨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무혐의 처분에 대해선 ‘다시 판단해 꼭 A씨를 처벌해 달라’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

지난 13일 취재팀과 만난 이학용 목사는 “은별이(A씨)와 그 가족들이 지금도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창수 기자

지금 이 목사는 A씨 가족을 도와 힘겹게 소송을 준비 중이다. 고통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 목사는 “끝이 없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상상해보세요. 소송이 끝나면 다 끝나는 걸까요? 아이는 자신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믿는데 국가가 ‘그건 사랑이었다’고 결론낸 거예요.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요….”

 

◆끝나지 않는 ‘아이들의 잔혹사’

우리 사회에서 이런 비극의 서사는 비단 이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청소년성폭력상담소 ‘탁틴내일’ 전문가들과 언론 보도, 법원 판결문, 상담 사례 등을 토대로 최근 10년 동안 사회적 논란이 된 아동·청소년 성범죄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아이’와 성관계를 가진 ‘어른’은 공통적으로 “서로 사랑한 것”, “동의한 관계” 등 논리를 들고 나왔다. 이는 우리 법이 아동의 ‘특수성’ 인정에 인색한 데다 사랑과 범죄의 경계가 모호해 ‘동의’만 인정되면 법망을 빠져나가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2010년 20대 남성 3명이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2살 초등학교 여학생을 여관으로 불러 술을 마시게 한 뒤 돌아가며 성관계를 맺었으나 법원에서 무죄가 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법원은 “음주와 성관계는 인정되나 심리적·물리적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초등학생인 줄 몰랐다’, ‘저항하지 않았다’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지난 6월 ‘10살 여자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은 1심의 징역 8년이 2심에서 3년으로 깎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 몸을 누른 행위가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초등학생과 성관계는 있었으나 강간으로 볼 순 없다’는 논리다. 이후 “감형 판사를 파면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제기돼 국민 24만명이 동의했다.

지난해 11월 자신이 운영하는 학원에 다니는 여자 중학생과 수십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가 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30대 학원장은 기혼남인 데다 자녀도 있었으나 법정에선 “중학생과 연인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권현정 탁틴내일 부소장은 “아이들의 순수한 호의나 성적 호기심, 불안감 등을 이용해 ‘동의 증거’를 치밀하게 만들어 놓고 문제가 되면 ‘서로 좋아한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수사기관에 불려간 아이들이 제대로 된 대처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가해자들의 방어 논리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바보야, 문제는 ‘동의 연령’이야”

 

다수 전문가는 ‘만 13세’로 규정된 우리나라의 ‘성적 동의 연령’을 문제의 시발점으로 꼽았다. 대다수 선진국이 16세를 기준 삼고 있으며, 개방적 분위기로 알려진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은 아예 18세로 우리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현행법 아래에서 한국은 12세 이하 아동과 성관계를 한 상대방은 형사처벌하지만, 13세 이상이면 일단 동의 여부부터 따진다. 13세부터는 ‘임신 등 성관계로부터 오는 미래 피해와 의미를 충분히 인지·예상한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목격자나 증거가 부족한 성범죄 특성,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이 먼저’라는 형사법 대원칙이 더해지면서 성범죄가 ‘사랑’으로 둔갑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된다. 2010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3세 여자 초등학생에게 음란행위를 시키고 강간을 한 혐의로 기소된 40대 남성은 성관계 당시 피해 아동 나이가 13세 생일로부터 불과 ‘4일’ 지났다는 이유로 강간죄는 무죄가 되고 음란행위만 인정됐다.

지난해 7월 대구에서 10대인 여자 조카와 성관계를 맺은 30대 남성의 경우 법정에서 “실은 연인 관계였다”는 주장을 펼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피해 아동 나이가 13세 이상이다 보니 일반 성폭행 사건과 똑같은 구도로 재판이 진행됐다. 법원은 “직접 증거가 조카의 진술밖에 없으며 삼촌이 조카를 때리거나 위협한 사실이 없고 적극적인 저항의 표시가 없었다”며 삼촌의 죄를 묻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의제강간 연령, 즉 성관계 동의 연령 상향이 아동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고 반론을 편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길들인 뒤 성적으로 착취하는 ‘그루밍 성범죄’가 확산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아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과연 어디까지 보호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큰 대목이다. 교사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와 성관계를 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루밍 성범죄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아동 성범죄 흐름과 아이들의 성에 대한 인식 수준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 맞는 동의 연령 재정립이 필요하다”며 “동의 연령이 상향되면 ‘어른이 아이와 하는 성관계는 무조건 범죄’란 인식이 확산하는 등 형벌의 ‘일반 예방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우리 사회는 성 문제에 대단히 보수적이고 대부분 이슈에서 아이들을 ‘보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데, 유독 이 문제에서만큼은 아동·청소년에게 ‘너희의 선택이니 알아서 책임을 지라’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지독한 아이러니”라고 꼬집었다.

 

◆“모두가 무관심할 때 손 잡아준 선생님… 성적요구 거부 못한 내가 죄인된 심정”

 

중학교 3학년. 음악이 꿈이었다. 하지만 부모님도, 친구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한 사람만 달랐다. 선생님. 꿈을 이해해줬다. 이야기를 들어줬고 같이 고민해줬다. 가끔은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열심히 공부하라”며 문제집을 건넸다. 통기타를 가르쳐줬다. 비타민도 줬다. 점점 가까워지던 차에 그가 불쑥 말했다. “손 잡아도 되니?” 거절하지 못했다.

 

따뜻한 조언자였던 그는 급기야 성적 요구까지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내가 이상한가….’ 한 번은 친구에게 그와의 관계를 에둘러 언급했다. 나중에 이를 안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대단한 문제라도 일으킨 것처럼 쉼없이 몰아붙였다. 두려웠다. “죄송해요….” 한참 뒤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말했다. “어디 가서 절대 얘기하지 마, 알겠지?”

 

“그때 내가 웃지 말걸 그랬나. 그때 문제집을 받지 말걸 그랬나. 나의 잘못인가. 계속 자기검열을 하게 돼요….”

 

지난 12일 취재팀이 만난 이모(23·여)씨는 당시 기억을 털어놓고선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기분”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그는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했으나 여전히 성인 남성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이를 감안해 서은주 탁틴내일 팀장이 인터뷰에 동석했다.

 

“유죄라고 달라진 건 없어요. 저는 아직도 (안 좋은 기억들과) 싸우는 중이에요. 그 사람과 비슷한 체형, 닮은 사람을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요.” 이씨는 지난해 교사 A씨를 고소했고, 지난달 항소심 재판이 끝났다. 법원은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1년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연인 관계였다”는 A씨의 주장을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그때 신고를 안 했느냐.’ ‘왜 단호히 거절하지 않았느냐.’ 수사 과정에서 쏟아진 질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조금만 멀리서 봐달라고 호소한다. “아이는 결코 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어요. 제발 본인이 피해 아동·청소년이 됐다고 한 번만 상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어른이 된 지금도 무섭고 두려운데 그때는 더 그렇죠. 쉽지 않은 일이에요.”

 

상대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한 점 때문에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면서 그는 ‘은별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런 사건조차 무죄가 나는데…. 2심 때도 정말 조마조마했어요. 피해자들은 더 이상 법이, 판사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기 어렵게 된 거죠.” 피해 청소년 누구나 해당 판결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란 것. 듣고 있던 서 팀장이 덧붙였다. “청소년들은 인터넷 검색을 매우 잘 합니다. 그 판결은 이미 청소년 사이에 널리 퍼져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체념하게 만들고 있죠. 아직 신고도 안 했는데 ‘맞고소당하면 어떡하느냐’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게 지금의 현실이에요.”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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