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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 금지” 외치지만… 사장 갑질, 사장에 신고해야 하는 法 [대한민국 신인간관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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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03 18:00:00 수정 : 2020-08-05 15: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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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치지 않는 직장내 ‘乙의 눈물’ / 일부 재벌 총수, 운전기사에 가혹행위 / 직원에 폭행·폭언 일삼으며 상처 안겨 / 대부분 벌금형 등 솜방망이 처분 그쳐 / ‘내리 갑질’ 막으려 금지법 7월 시행 / 직장갑질 119에 제보 70% 늘었지만 / 가해자 처벌 아닌 회사에 불이익 줘 / 원청, 하청 직원 괴롭힘은 대상 안돼 / ‘사각지대’ 보완해 법 강화 필요 지적 / 전문가들 예방교육 필요성 강조 / 재벌 2·3세, 간부들 순종 환경에 익숙 / 타인 배려 힘든 ‘자신만의 세계’ 갇혀 / ‘폭행 없는 갑질’ 너그러운 판결도 한몫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유치원과 학교에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어른들이 정작 직장에선 누군가를 괴롭히고, 또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가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입어 병원 치료를 받거나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괴롭힘 금지법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상급자의 ‘갑질’에서 비롯한 직장 내 괴롭힘은 이제 사회 문제가 됐다. 그 법마저 너무 허술해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집보다 오랜 시간 머무는 직장이 ‘지옥’ 같은 장소가 돼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우울한 장면이다.

 

◆‘가진 자’들의 거듭된 갑질… 남은 것은

조선 태종 때부터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하마비’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날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표식으로 활용됐다. 이때 말을 지키던 마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상전에 대해 논하던 게 ‘하마평’이다. 상전으로선 마부들의 평가가 향후 자신의 출세에도 영향을 주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이 역할을 운전기사가 대신하고 있는데, 자신이 수행하는 상사의 성격은 물론 행선지는 어디이고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지, 내밀한 통화내용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옛 마부와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최근 재벌들이 잇따라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무분별한 가혹행위를 저질러 피해자들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을 뿐 아니라, 자신마저 형사처벌을 받는 등 화를 자초하는 모습을 보여 눈총을 받았다.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회장, 이해욱 대림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벌금으로 1500만원과 300만원을 각각 물었을 뿐이다.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왼쪽)과 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연합뉴스

이 밖에도 한진그룹 총수일가와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 등이 직원한테 폭언·욕설은 물론 폭행을 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재벌총수들의 갑질을 대물림이라도 하듯, 상급자가 하급자에 대한 괴롭힘을 하는 ‘내리 갑질’의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만들어져 지난 16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상태다. 근로기준법에 신설된 해당 조항은 ‘사용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 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갑질에 관한 제보는 70%가량 폭증했다. 직장갑질119가 지난 16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과 이메일 등을 통해 접수한 제보는 총 565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 시행 이전에는 임금체불이나 해고, 징계 등 기존 근로기준법 위반 제보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괴롭힘’ 관련 제보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괴롭힘’을 법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허점투성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하는 시대를 두고 전문가들은 갑질을 근절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데 의미를 두는 모습이다.

 

이화여대 이주희 교수(사회학)는 31일 “장기적으로는 갑질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법이 만들어졌다고 끝이 아니라 (처벌) 사례 등이 나와 각성의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법 시행에 따라) 회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관련 신고센터나 조사 조치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면서 “(회사로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해야 할 필요가 생겼으니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상당히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재벌총수나 그 가족들과 관련해서는 근로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각별한 도덕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법조계와 노동계에선 해당 법이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힘 피해를 접수하고도 제대로 조처를 하지 않은 회사에 불이익을 주도록 하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직장갑질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법의 사각지대가 굉장히 많다. 대표적으로 사장 갑질을 사장한테 신고해야 하고, 근로기준법에 따라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박 운영위원은 또 원청과 하청업체 직원 간 괴롭힘의 경우 동일한 사업장 내 근로계약관계가 체결된 것이 아니어서 적용이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를테면 조현민 한진칼 전무의 이른바 ‘물컵 갑질’은 하청업체 직원을 상대로 한 것이어서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예율 허윤 변호사는 “좀 더 강하게 도입됐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허점이 많지만 일단 도입됐으니 시행해 보고 이 법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 나중에 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법무법인 라온 김윤호 대표변호사도 “원칙적으론 소급입법이 어렵겠지만, 다른 규정을 통해서라도 법 시행 전 피해를 본 이들에 대한 구제가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미 이 법의 개정안이 국회에 올라간 상태다. 지난 2월 해당 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양진호 전 회장 사건의 경우 사업주가 당사자인데 그런 경우 (피해자가) 어디에 호소하겠느냐”면서 “당사자가 그랬을 때 처벌조항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은 괴롭혔다고 처벌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신고했는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며 “결국 한 다리 건너서 하는 방식이다. 처벌 규정이 마련되면 좀 더 신속하게 (처벌 등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직원들 ‘빠따’친 회장, 갑질 아닌 배포로 생각”

 

“직원들을 모두 옥상으로 불렀다. 그리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다. 생질(누나의 아들) 녀석에게는 군대식으로 ‘빠따’를 쳤다.”

 

미스터 피자 창업주인 정우현 전 회장은 첫 재판에서 '갑질 '논란 등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KBS 방송 캡처

정우현 MP그룹 회장은 2012년 자신이 쓴 책 ‘나는 꾼이다’를 통해 근무 중 딴짓을 하는 직원을 이렇게 꾸짖었다고 적었다. 또 운전을 마친 기사에게 매장 업무를 지시했고, 시설에 문제가 생긴 점포 문을 하루만 닫고 제대로 보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 임원을 질타해 회사를 그만두게 했다고 기록했다. 갑질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성공한 사업가가 갖춰야 할 배포’나 ‘강단’으로 포장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갑질 없는 직장’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행동이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법부는 물리적 폭행이 있어야 벌금형 정도를 내릴 뿐 폭언이나 괴롭힘에 대해 너그러운 판결을 내리고 있다. 결국 가장 먼저 갑질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교육해 예방하는 것이 필요한 셈이다.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

실제 갑질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 총수들은 자신의 행동이 큰 문제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경우 직원들에게 뜨거운 보이차를 억지로 마시게 한다거나 염색을 시킨 것에 대해 “강요는 없었고 직원들이 원해서 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회사원들에게 BB탄총을 쏜 것 역시 “범죄 의도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며 “폭행으로 느껴졌다면 반성한다”고 말했다.

 

재벌 2세나 3세의 경우 회사 간부나 주변 사람들이 심기를 알아서 살피고 의견에 잘 따르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타인의 기분이나 감정을 배려하기 힘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 수 있다. 자수성가한 사업주의 경우 보상심리가 발동할 가능성도 높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31일 “자신이 왕인 세상에 살던 사업주들은 ‘이 정도 소리 지른다고 갑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직원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오너로서 또는 창업주로서 고생하는데, 너는 내 덕분에 편히 먹고 살잖아’라는 심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이어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며 “갑질을 당한 직원들이 불만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식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재계에서는 논란 예방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감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어떤 행동이 갑질이고 그 행위로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교육은 수차례 반복해도 과하지 않다”면서도 “경영현안 챙기기도 바쁜 총수들이나 기업 고위 임원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교육을 진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배민영·유지혜·정필재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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