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천재 예술가의 기발함, 한국 미술에 활력 불어넣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19-08-04 10:00:00 수정 : 2019-08-02 19:30:1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⑭ 베니스에서 만나는 백남준의 유산 / ‘미술계 올림픽’인 베니스비엔날레에 / 한국, 1986년 42회 행사에 처음 참가 / 전용공간 없어 네 평서 소규모 전시 / 백남준, 발로 뛰며 한국관 필요성 설파 / 부지 없자 화장실 자리에 건립 아이디어 / “이동식 화장실 수백 개 기증할 것” 제안 / 23대1 경쟁률 뚫고 1995년 개관 성공 / 1963년 첫 개인전서 ‘비디오아트’ 선봬 / 1970년대 인터넷 상상… ‘W3’ 작품 구상

#베니스의 여름, 그 안에서 빛나는 한국관

유럽 여행을 앞두고 있다. 오랜만의 방문에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특히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58th International Art Exhibition?La Biennale de Venezia)을 관람할 생각을 하면 그 풍선은 떠오를 것만 같다. 전 세계 200여개의 비엔날레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의 뜻을 가진 미술 행사다. 3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는 트리엔날레(triennale), 4년마다 열리는 전시회는 콰드리엔날레(quadriennale)라 한다. 전 세계 미술을 한자리에 모아 대규모 전시를 연다. 전시를 보고 있노라면 국제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이 눈에 들어온다.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설렐 수밖에 없는 자리다.

베니스비엔날레는 크게 두 개의 전시로 구성된다. 하나는 국제전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전이다. 본전시라고도 불리는 국제전은 비엔날레 총감독이 기획하는 전시다. 국가전은 국가별로 예술감독을 선정해 선보이는 전시다. 가장 훌륭한 전시를 선보인 국가에는 대상 개념인 황금사자상을 수여한다. 이 행사가 ‘미술계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는 90개의 국가가 참가했다. 행사의 중심으로 꼽히는 카스텔로공원에 상설 전시장을 갖고 있는 국가는 31개국이다. 호주, 오스트리아, 브라질, 캐나다, 체코, 슬로바키아,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스, 헝가리, 이스라엘, 일본, 네덜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러시아, 스페인, 스위스, 미국 등이다. 그중에는 한국도 자랑스럽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관을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 인물이 작가 백남준(1932~2006)이다.

오는 11월까지 열리는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전경. 올해는 김현진 예술감독의 총괄 아래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아드리아해가 내려다보이는 유리의 집

한국은 제42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했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86년이다. 고영훈과 하동철의 회화작품을 들고 나갔다. 국제적인 무대에 선 것은 영광이었지만 서글픈 부분도 있었다. 전시공간이 없어 이탈리아관에서 네 평 정도를 받아 작은 규모의 전시를 열어야 했다.

당시 백남준은 독일 캐피탈지의 ‘세계 100대 미술가’ 중 5위를 차지한 영향력 있는 작가였다. 그는 고국의 미술에 대한 자부심과 믿음이 있기에 이런 상황이 안타까워 발 벗고 나섰다.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1993년 밀라노 갤러리의 개인전에 미술계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다.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총감독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개인적 목적을 달성할 기회에 한국관 건립의 당위성을 설파하는 데 애썼다.

하지만 카스텔로공원에는 남은 부지가 없었다. 현실적인 한계에 백남준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화장실과 관리사무소가 있는 자리에 한국관 용지를 마련해 달라고 한 것이다. 대신 넓은 행사장에 필수인 이동식 화장실 수백 개를 기증하겠다고 했다. 백남준의 화장실 제안에 꿈쩍 않던 관계자들은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카스텔로공원에 국가관 신설이 본격화됐다. 호주관 이후 15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23개 국가가 건립 신청을 냈고 이 중 한국이 최종 선정됐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가 100주년을 맞이할 때 전시장을 개관해 의미가 더 깊었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 김석철과 베니스대 교수인 프랑코 만쿠조가 공동으로 설계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드리아해를 가리지 말라는 주최 측 의견을 반영해 유리로 만들었다.

비디오아트 선구자인 백남준의 대표작 ‘W3’. 1974년에 현시대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것이 놀랍다. 20년 뒤인 1994년에 완성했다. 학고재 제공

#백남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이름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를 창시한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도쿄대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195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떠나면서 예술혼이 피어났다. 그곳에서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존의 예술 규범이나 관습을 깨부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주목받았다. 새로운 예술방식의 모색에 앞장섰다.

1963년 독일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다. 제목 그대로 공간에 텔레비전을 늘어놓은 전시였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캔버스로 여기고 송신기로 선을 그려 작품을 선보였다. 화면 안에서 내부회로 변조로 출렁이는 전자 파동은 움직이는 회화 그 자체였다. 비디오아트는 이렇게 그의 손으로 탄생했다. 그것이 미술계에 일으킨 반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백남준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며 비디오 작업을 더 활발히 진행했다. 비디오 영상에 조각, 설치 등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곧 음악과 신체의 사용에도 가능성을 열어 그 범위를 확장했다. 그는 이런 작업을 통해 예술가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백남준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었다.

‘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은 이 작품명인 동시에 백남준이 1992년에 쓴 글의 제목이다. 그리움의 정도를 ‘피드백의 제곱’으로 표현한 것에서 백남준만의 과학적인 감성을 엿볼 수 있다. 학고재 제공

#1974년에 인터넷을 예상한 천재 예술가

백남준이란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나 문구는 셀 수 없이 많다. 어떤 말로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천재성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W3’다.

작가는 1974년, 이 작품의 제작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록펠러재단에 진행 계획서를 냈다. 계획서상 제목은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였다. 무려 20년 뒤인 1994년에야 작품을 완성하며 W3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인터넷을 지칭하는 World Wide Web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1970년대에 인터넷을 예상한 선견지명이 놀랍다. 유선전화만 있던 시절, 그것으로부터 발전한 정보 공유의 장을 상상한 것이다. 상상이라기보다 예리한 통찰력을 통해 예상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 더 정확하다.

W3는 모니터 64대를 X자 형상으로 설치한 작품이다. 각각의 모니터는 재생 시간 20분가량의 영상을 1초 간격으로 옆의 모니터에 전달한다. 이 반복은 현란한 빛을 뿜으며 하나의 움직임이 되어 흐른다. 광랜으로 대량의 정보를 고속으로 전송하는 순식간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다. 현대사회의 역동적인 소통문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노버트 위너의 ‘개연성이 높은 메시지’와 마셜 매클루언의 ‘차가운 매체’와 결합시켰다. 개연성이 높은 메시지나 차가운 매체는 정보 전달량이 적다. 수신자 또는 관람자의 참여만이 정보 전달량을 높일 수 있다. 참여를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공유하고 수정과 반영을 통해 재조직하는 세상. 전 지구적 소통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예술이라 믿은 백남준이 작품을 제작하며 떠올린 모습일 것이다.

#백남준이 남긴 유산

백남준은 우리에게 유산을 남겼다. 비디오아트와 거기서 파생한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비롯해 유산의 장르가 다양하다. 그중에는 베니스비엔날레에 자리 잡은 한국관도 있다.

한국은 그동안 이 자리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미술과 건축 등을 알렸다. 작품성과 가능성을 인정받아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95년 한국관 개관 첫 회 전수천, 1997년 강익중, 1999년 이불이 특별상을 받았다.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는 조민석이 준비한 전시가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관은 증축을 앞두고 있다. 협소한 공간이 항상 문제로 지적돼 왔기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가 끝나면 뒷문 출구 세 평 정도를 넓힌다. 오는 11월쯤 공사를 시작해 내년 봄에 완공할 예정이다. 지금의 한국관을 지은 프랑코 만쿠조 교수가 설계를 추진한다. 김석철 건축가는 2016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베니스비엔날레를 찾을 때마다 저 멀리 유리로 지은 한국관이 보이면 백남준이 생각난다. 이번에는 전시를 보며 공간도 세심하게 살필 예정이다. 증축을 앞둔 기쁜 시점에 지금의 모습은 또 그대로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사진도 몇 장 남겨 보려 한다. 백남준이 남긴 유산을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서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