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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이민 전도사… “해외 동포들, 이젠 조국 발전 힘 보태야”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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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7-20 05:35:00 수정 : 2019-07-19 2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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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영 (주)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대표이사 / 이민사업에 눈을 뜨다 / 1965년 美 3개월 체류 당시 / 이민국적법 개정 보며 계획 / 귀국길 들른 日서 마음 굳혀 / 지구촌 누비며 정착 도와 / “잘 살 길은 해외진출” 독려 / 190여개국에 750만명 거주 / 200여만명에 직·간접 도움 / 27년째 세계한상 사무총장 / 해외서 성공한 기업인 뭉쳐 / 한국의 경제발전 기여 모색 / “눈은 세계로, 가슴은 조국에”

(주)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양창영(76) 대표이사는 ‘해외이민의 대부’ ‘이민 개척자’로 통한다.

1960년대, 정부는 높은 인구밀도를 줄이기 위해 산아제한과 함께 ‘해외이주법’을 제정하는 등 이민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국민의 이민을 받아 달라’고 미국 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유색인종은 이민을 불허한다’는 미국 이민국적법에 막혀 한국 사람은 미국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없었다.

양 대표는 65년 대학원생 때 미국에 3개월 체류하며 이민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때 미국 정치권은 1920년대에 제정된 이민국적법 개정을 놓고 찬반이 확 갈렸다. 결국 국가별 쿼터제를 도입해 유색인종에게도 영주권을 주는 내용으로 법이 바뀌었다. 귀국길에 일본을 들른 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00여년 동안 인력을 해외로 보내 국가를 부흥, 발전시킨 모습을 보고 해외인력진출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양 대표는 “1902년 12월 대한제국 민영환 대신 명의로 발급한 ‘집조’라는 여권으로 인천 제물포에서 S·S·겔릭호를 타고 하와이로 간 102명이 우리나라 이민의 효시”라고 설명했다. 이어 “하와이로 간 이민 1세대와 그 후손들이 초청한 극소수 외에는 이민을 못 갔다”며 “또 6·25 때 국제결혼을 한 사람이 초대한 가족초청이민 외에 독립이민, 개별이민, 기업이민, 취업이민은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1963년 한국에 해외이주법이 제정되고 65년 미국의 이민국적법 개정 후 본격적으로 해외이민시대를 맞았다”고 덧붙였다.

(주)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양창영 대표이사는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본사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민족이 해외에 나가 그동안 성공을 했다. 이제는 그들이 조국에 돌아와 새 경제부흥의 터를 만들어야 한다”며 “눈은 세계로 돌리고, 가슴은 조국에 묻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현재 한국인의 해외거주자는 190여개국에 750여만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 중 양 대표의 직간접 도움으로 외국에 진출한 사람은 200여만명이라고 한다.

양 대표는 70∼80년대 방송에 출연해 ‘젊은이들이여, 이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하며 각축을 벌이지 말고 해외로 진출하라. 그곳엔 능력에 맞는 수많은 길이 있다’며 해외진출을 독려했다. 그는 1993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발족해 사무총장을 맡아 세계한인상공인, 경제인과 한인 단체의 유기적인 단합을 도모하는 등 네트워크 구성에 앞장섰다.

해외인력진출 사업에 반세기를 보낸 양 대표는 이제는 외국에 나간 동포가 한국에 돌아와 조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6~7위권의 수출무역대국이 된 것은 해외에 나가 있는 750만 재외동포들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해외에서 성공해 번 돈을 조국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다”며 “그들이 저출산 시대에 새 경제부흥의 마중물 역할을 위해 첫 이민을 떠난 인천(제물포)공항 영종도에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를 조성했다”고 강조했다. 지난 16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본사에서 양 대표를 만나 그가 평생 열정을 쏟아부은 해외인력진출사업과 관련된 얘기를 들어봤다.

―이민 사업을 한 동기는 무엇인가.

“1965년 7월 미국에서 도덕재무장운동(MRA) 세계대회와 세계청년학생총회가 열렸는데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미국에 3개월 동안 머물며 30여개 도시를 다녔다. 그때 미국은 이민국적법 개정을 놓고 민주당은 찬성, 공화당은 반대해 양당은 치열하게 공방을 펼쳤다. 1920년대에 제정된 미국 이민국적법에는 ‘유색인종은 이민을 안 받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해 10월1일부로 국가별 쿼터제로 유색인종도 이민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됐다. 당시 한국의 인구 증가율은 5%대였다. 정부는 높은 인구증가율을 줄이려고 이민 정책을 추진했고, 63년엔 해외이주법을 만들었다. 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한국 국민에게도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또 케네디 대통령의 서거로 승계한 린든 존슨 대통령과 재임 중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한국인의 이민 수용을 거듭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인의 영주권 취득이 미국 이민국적법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파악했다. 귀국길에 일본에 들렀는데 그곳은 벌써 1868년 메이지유신을 하며 해외에 사람을 내보낸 점을 알았다. 특히 일본은 척식대학(拓殖大學)을 설립해 교육시킨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냈다. 우리가 잘살 길은 보다 많은 인력을 해외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외인력진출 사업을 시작했다.”

―이민 사업을 하며 어려움은 없었는가.

“처음엔 자본금 1000만원의 비영리재단법인인 범흥공사로 출발했다. 그 후 영리법인인 (주)국제이주개발공사를 허가받았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선진국으로 150여만명,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칠레, 볼리비아,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중남미를 독점해 27만여명의 이주정착을 도왔다.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에도 이민을 보냈다. 1970년대 중남미지역 진출을 위해 지구상에 산소공급의 상당량을 발산한다는 아마존지역에 헬리콥터를 빌려 답사했다. 아르헨티나의 곡창지대인 펌프스를 찾아다니며 많은 고생을 한 기억이 새롭다. 당시엔 해외이민, 해외취업 브로커와 사기범이 많았는데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시골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외우며 ‘인지위덕(忍之爲德, 참는 것이 덕이 됨)’을 생활신조로 삼았고, 대학생 시절부터 도덕재무장운동을 하고 있다. 반세기 동안 한 점 오점 없이 해외인력진출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인지위덕과 도덕재무장운동이 원동력이 됐다.”

―일화를 소개해달라.

“지금은 여권 취득이 쉽지만 과거엔 무척 어려웠다. 해외이민을 가는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받지 않고 여권을 발급받도록 많이 도왔다. 출국 전 식사 대접을 하겠다며 초대한 이들이 있었는데, 집에 가보면 밥상 위에 여권을 갖다놓고 가족들이 나한테 큰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가정부로 미국에 간 여성도 있었다. 가정부로 일하며 영주권을 얻으면 학비가 없는 국·공립대학 입학과 좋은 일자리의 취직이 가능했다. 하지만 영주권이 없는 유학생들은 식당일 등 허드렛일을 해 손에 지문이 없는 이가 많았다. 그때는 판금공, 가정부, 용접공, 도장공, 벽돌공, 병아리감별사가 많았다. 2015년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어느 행사장에서 동포 한명이 다가와 ‘범흥공사 양 사장님 아니세요?’라고 말을 건네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1975년 병아리감별사 자격증을 갖고 이민 갔다고 했다. 병아리감별사는 다른 직업에 비해 배우기가 쉬웠다.”

―해외개발학과 교수로 강단에 선 배경을 설명해 달라.

“우리나라에 일본의 척식대학 같은 대학을 만들고 싶었지만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총장 모임에서 ‘일본은 해외이민대학을 1800년대에 설립했는데 한국은 해외개발, 해외개척, 해외진출 학과가 없다. 부국강병을 위해 해외로 사람을 많이 내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 있는 호서대 강석규 총장이 그 후 해외개발학과를 설치하겠다며 교수직을 제의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분의 뜻이 워낙 진지하고 사명감이 강해 교수직을 수락했고, 정년을 채웠다.”

―재외국민 참정권 연대 공동대표를 맡은 속사정이 있나.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전엔 해외파병, 해외취업자, 원양선원 등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이 있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으로 개정 후 재외국민의 참정권이 박탈됐다. 해외이민을 보내며 부담을 느꼈고,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등 재외국민 참정권부활 운동을 펼쳤다. 2006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고, 2012년 19대 총선 때부터 재외국민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다.”

―19대 국회에 진출했다. 정치에 뜻이 있었나.

“대학에서 정외과를 전공했으나 해외인력진출사업으로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느라 국회의원은 기대하지 않았다. 재외동포들의 염원으로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 새누리당에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선거를 앞두고 재외국민 투표권을 의식해 해외동포를 잘 아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나를 선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례대표를 승계해 2년간 의정활동을 했다.”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세계한상) 사무총장을 27년째 맡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국의 이민역사는 다른 나라에 비해 짧다. 1902년 첫발을 내디딘 이민은 1960년대 이후 그 수가 많아졌지만 그동안 체계적이지 못했다. 해외 한인 상공인·경제인 및 한인 단체의 유기적인 단합으로 조국경제에 기여하며 회원 상호간의 협력과 친목을 도모하고 네트워크를 구성할 목적으로 93년에 세계한상을 설립했다. 매년 국내외에서 세계한상대회, 세계한상지도자대회를 개최한다. 사무총장을 맡아 지금까지 급여 없이 재능 봉사를 하고 있다.”

―이민 간 사람들에게 한국에 왜 돌아오라고 하는가.

“귀소본능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 민족이 해외에 나가 그동안 성공을 했다. 이제는 그들이 조국에 돌아와 경제부흥의 터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 속의 한민족 시대를 열어야 한다. 눈은 세계로 돌리고, 가슴은 조국에 묻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유대인들이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지만 가장 강력한 민족이 아닌가. 이민 사업을 하며 한국인의 DNA가 유대인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간 사람들이 정처 없이 가다가 109번 버스 종점에 내려 일군 동네가 ‘109촌’이다. 버스 종점 쓰레기 더미에 있는 폐기물로 급조한 판자촌에서 재봉틀로 만든 팬티와 점퍼, 와이셔츠가 크게 유행했다. 브라질에서는 코리아 패션이 유명하다. 중남미지역 패션은 한류가 주도하고 있다. 영종도는 항공, 바다가 있는 등 사업하기에 주변 환경이 매우 좋다. 세계한상 회장인 한창우 (주)마루한 회장이 대표 투자자로서 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를 영종도에 설립했다. 세계한상 사무총장인 내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해외에 진출해 성공한 세계한상기업인들이 조국에 투자할 때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양창영 대표이사는… △경북 예천 출생(1943) △경북사대부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 △경영학 박사 △세계도덕재무장운동(MRA) 한국본부 운영위원·감사·이사·부총재 △(재)범흥(이주)공사 이사·상무·전무·사장 △(주)국제이주개발공사 대표이사 △호서대 해외개발학과 교수, 중국 연변대 객좌교수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부총장·총장 △외교통상부 규제심사위원회 위원장, 재외국민참정권연대 공동대표 역임 △제19대 국회의원 △새누리당 재외동포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헌정회 해외동포위원회 위원장(현)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사무총장(현) △(주)세계한상드림아일랜드 대표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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