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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4㎡… ‘친일파 재산 1위’ 토지 환수 또 좌절돼

입력 : 2019-06-27 06:00:00 수정 : 2019-06-26 21: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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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항소심서 이해승 후손에 ‘사실상 패소’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친일파 후손 재산 환수 항소심 선고 공판이 끝난 후 재판에 참가한 광복회 측 정철승 변호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친일파 후손의 재산 환수는 불가능한 걸까. 26일 정부가 친일파 이해승(1890∼1958)의 후손을 상대로 낸 토지 환수 소송 항소심에서 사실상 패소하자 친일파 재산 환수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를 조짐이다. ‘친일파 재산 1위’란 수식어가 붙는 이해승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법 허점 파고든 이해승 손자… 번번이 승소

 

이날 서울고법 민사13부(부장판사 김용빈)는 국가가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 호텔 회장을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 등기 소송 2심에서 이 회장이 물려받은 토지 중 1필지(약 4㎡)를 국가에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그랜드힐튼 호텔 부지 등 대부분의 토지는 그대로 이 회장 등의 몫으로 남았다. 정부가 청구한 환수 대상 토지 규모는 197만㎡이었다. 다만 재판부는 이미 처분된 토지 매각대금 3억5000여만원은 국가에 환수하라고 했다.

 

앞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이해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함에 따라 그의 손자인 이 회장이 상속받은 토지 중 192필지를 국가에 귀속하게 됐다. 이 땅 가치는 당시 시가로 300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회장 측은 진상규명위를 상대로 국가귀속 처분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냈고, 2010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친일재산귀속법은 재산 귀속 대상을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라고 규정했는데, 이 회장 측은 “후작 작위는 한일합병의 공이 아니라 왕족이라는 이유로 받은 것이므로 재산 귀속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비난 여론이 일자 국회는 2011년 친일재산귀속법에서 ‘한일합병의 공으로’라는 부분을 삭제하고 개정법을 소급 적용할 수 있다는 부칙도 신설했다. 국가는 대법원의 2010년 판결이 절차상 잘못됐다며 재심을 청구하는 한편, 이 회장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국가가 재심 청구 기간(사유 발생일로부터 30일)을 넘겨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청구를 각하했다. 민사 소송을 담당한 1심 재판부도 개정법 부칙에 담긴 단서 조항을 근거로 국가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부칙에는 ‘확정판결에 따라 이 법의 적용 대상이 아닌 것으로 확정된 경우에는 그러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회장이 확정판결을 받은 토지에 대해선 개정법을 소급해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재판부가 환수 결정을 내린 1필지는 애초 국가귀속 대상 토지에 포함되지 않은 땅이다. 재판부는 다만 이 회장 측이 반민족규명법과 친일재산귀속법이 발의·제정된 2004년 4월∼2005년 1월 집중적으로 처분한 부동산 매각대금 가운데 3억5000여만원을 국가에 환수하라고 판결했다.

 

이 회장은 소송에서 ‘이미 처분한 땅의 대금을 토해내라는 건 시효가 지나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어긋나는 권리 남용”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친일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켜야 할 공익상의 필요가 피고가 입을 불이익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으로 압도적”이라고 지적했다.

 

김정륙 광복회 사무총장이 2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 상대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 항소심 선고가 끝난 뒤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왕족 출신·일제로부터 후작 작위 받고 친일

 

법무부와 광복회, 관련 보도 등에 따르면,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되는 이해승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5대손으로, 한일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조선 귀족 중 최고 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았다. 일제는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한 뒤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훈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부여한다”고 규정한 한일합병조약문 제5조에 근거해 황실령 제14호로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시행했다. 이해승은 이 령에 따라 후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인 1911년 1월에는 은사 공채 16만8000원을 수령하기도 했다. 1912년 8월엔 ‘종전 한일관계에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해 12월 정5위에 서위된 후 계속 승급돼 1935년 1월엔 정3위에 올라 일제강점기 내내 귀족의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이해승이 경술국치 이후 조선 귀족을 대표해 일본 도쿄로 가 일본 국왕에게 작위 수여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일본 국왕 모친이 사망하자 참배를 가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한 결과였다.

 

이해승은 또 1915년 1월부터 일제의 협력과 지원 하에 조직된 불교계 중심기관 ‘삼십본산연합사무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17년 2월부턴 이완용 등의 주도로 설립된 친일단체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대표적 관변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1941년 5월부터 평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1년 일제가 조선인들 사이에 자발적 황국신민화 운동을 일으키고자 결성한 ‘조선임전보국단’ 경성부 발기인으로도 참가했다.

 

일제 말기인 1942년 1월에는 ‘조선귀족회’ 회장 자격으로 그간 모금한 국방헌금을 미나미 총독에게 전달했다. 1942년 5월 미나미 총독이 전보되자 대표적 친일신문인 ‘매일신보’에 “(미나미 총독이) 내선일체에 큰 공적을 남겼다”는 요지의 담화를 게재하기도 했다.

 

원고 보조참가인으로 이번 소송에 참여한 광복회는 이날 판결 이후 “거물친일파는 단죄되지 않는다는 70여년 전 반민특위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참담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광복회는 “친일재산귀속법과 그 개정 법률의 취지가 친일파 후손들에게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 아닐 것”이라며 “대법원이 국가, 사회의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워달라”고 호소했다.

 

김주영 기자 buen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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