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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선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

입력 : 2019-05-24 01:00:00 수정 : 2019-05-24 07: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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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장편 ‘진이, 지니’ / 사육사 영혼이 원숭이 몸속으로 / 왜곡된 삶을 거부하고 죽음선택 / 속도감 있는 스토리·판타지 더해 / 따스하고 다정하고 뭉클한 느낌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동물의 몸이 되어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여자 ‘진이’,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남자 ‘민주’, 이들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각성시킨 또 하나의 존재 보노보 원숭이 ‘지니’. 인간과 동물을 아우르는 이 세 생명체를 매개로 소설가 정유정은 신작 장편 ‘진이, 지니’(은행나무)를 통해 죽음 앞에 선 존재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펼쳐냈다.

보노보 원숭이의 몸을 빌린 여자의 죽음 앞에 선 자유의지를 그려낸 소설가 정유정. 그는 “나 자신과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치열하게 사랑하기를, 온 힘을 다해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썼다. 서상배 선임기자

서른다섯 살 사육사 ‘진이’는 영장류센터에서 스승처럼 연구자의 길로 진로를 바꾸어 출세의 길을 가고 싶었으나, 콩고 킨샤사에서 잡혀가는 보노보를 구하지 않고 달아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이 간절한 욕망을 접는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보노보라는 종이 침팬지와 구별되기 시작한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는다. 진이는 보노보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푹 빠져들면서 그 생명체와 동화되는 듯한 무한한 애정을 느끼지만 구해내지 못하고 달아났던 죄책감에 시달린다.

“내가 무엇을 꿈꾸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뭘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다루고 연구할 자격이 내게는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그날 밤에야 알아차렸다. 길 건너 골목에 숨어 그 아이가 철장에 갇힌 채 삼륜차에 실리는 걸 보던 순간에, 삼륜차가 비바람 속으로 사라져버리던 그 순간에.”

이 보노보 ‘지니’가 머나먼 한국 땅으로 밀반입됐다가 탈출하고 이번에는 ‘진이’가 우연찮게 구조 대열에 합류해 지니를 품에 안고 영장류센터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진이는 중환자실에 실려가 의식불명 상태에 놓이고, 지니는 살아남아 ‘민주’의 도움을 받는다. 이 김민주라는 서른한 살 남자는 공무원 시험만 3년째 치고 있는 룸펜이요, 가족으로부터 경원시당하는 루저의 삶을 살고 있어 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남자가 진이의 영혼이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가 벌어지는 본격적인 ‘진이 지니’의 판타지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보노보의 몸속에서 진이는 “인간에 의해 인간들 속으로 끌려 나온 후, 인간으로 인해 생사의 질곡을 넘나들고 인간을 위한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가 인간에게 자신을 통째로 강탈당해버린 지니의 삶을, 지니 자신으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진이는 자신이 선택한다면 영혼의 소멸은 피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왜곡된 삶을 거부한다. 민주는 삶과 죽음을 분리하지 않는 진이의 태도를 보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정유정은 “나는 죽는 게 너무 무서운데 그것은 나 자신과 헤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라면서 “그걸 언젠가 받아들이려면 열심히 살아서 이게 내 삶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에서는 15살 소년들에게 막 싹트기 시작한 자유의지를,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25살 청년들이 구현해내는 자유의지를, 이번 작품에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마지막 자유의지를 그려냄으로써 ‘자유의지 3부작’을 완성했다고 작가는 의미를 부여했다. 정유정은 “그동안 스릴러나 재난소설 같은 이야기 스타일을 시도하는 데 신경을 분산시켰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몸에 익은 정유정표 스타일을 바탕으로 이야기 자체에 더 많은 방점을 찍겠다”면서 “앞으로는 600만년 전 태곳적 이야기나 근미래 혹은 땅속 세계 같은 SF나 판타지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힘들고 괴로운 국면일수록 고민을 고통스럽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현실에서도 예외 없이 유머를 찾는다는 정유정은 이번 소설에는 더 많은 ‘정유정표 위트’를 뿌려놓았다. 정유정은 “내 유머는 저질”이라면서 “우울하지 않게 이야기 자체를 즐기면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명랑하게 웃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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