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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은 그림, 역사의 한 부분… 젊은 작가 후원 큰 보람”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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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5-11 19:00:00 수정 : 2019-05-11 10: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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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컬렉터 문웅 前 호서대 교수 / 학창시절 문학 심취… 전공은 경영학 / 건설회사 창업… 현재 3개회사 운영 / 표구점 직원과의 인연으로 그림 입문 / 40여년간 1000여점 수집 ‘유일한 낙’ / 51살에 예술경영학 박사학위 취득 / 교수재직땐 결강없이 후진양성 매진 / 문인협회 회원 활동… 어릴적 꿈 이뤄 / 日 하코네 방문 계기 문화사업 도전

문웅(67) 전 호서대 교수는 그림 컬렉터로 미술계에서 유명하다. 문 교수는 지난 3월 서울 인사동에서 월북 납북 화가들의 작품 100여점을 선보이는 ‘봄, 북한 미술을 다시 봄’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1916년 10월 일본 도쿄 우에노 미술관에서 개최된 문부성 미술전람회 특선에 오른 김관호를 비롯해 북한 최고등급 화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문 교수가 평생에 걸쳐 모은 미술품이다.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인영헌’에서 문 교수를 만났다. 회사 사무실을 겸한 그의 자택은 작은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거실과 방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서재에는 장서와 그림, 조각품 등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문 교수는 1000여점의 미술작품을 갖고 있다. 그림이 좋아 한두 점 구입하기 시작한 수집이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문 교수는 취미가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학창시절 문학을 좋아했던 그는 국문과를 진학할 생각이었지만 모친이 돈을 벌 수 있는 학과를 가는 게 좋겠다고 해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원에서도 마케팅을 전공했다.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신입생 때 선배의 권유에 의해 서예반에 가입했다. 그는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학교 인근 표구점에 자주 들렀다. 1973년 어느 날 표구점 직원이 “돈 있으면 사라”며 의제 허백련 화백의 10폭 병풍을 추천했다. 군 복무를 마친 1977년 2월 허 화백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해 가을쯤 표구점 직원이 병풍을 팔 생각이 있느냐고 해 생활비도 필요하고 해서 구입한 가격의 10배 정도를 받고 팔았다. 1년 뒤 한 갤러리 앞을 지나다 허 화백의 작품이 전시된 것을 보고 가격을 물었더니 그가 판매한 가격보다 몇 배가 더 올라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그는 앞으로 그림을 사면 단 한 점도 팔지 않겠다는 철칙을 세웠다. 그의 원칙은 40여년 동안 지켜지고 있으며 1000여점의 작품을 수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표구점 직원과의 작은 인연에서 시작된 그림 입문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27살에 광주에서 건설회사를 창업했다. 연립주택과 소형 건물을 짓는 일을 시작했다. 마침 중동 건설 붐이 일어 회사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던 중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공황상태인 광주에서의 사업은 힘들었다. 1983년 회사를 서울로 옮긴 후 열심히 회사를 키웠다. 정부의 ‘주택 200만호 건설’ 일환으로 일산과 평촌 등 수도권 1기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그의 사업은 휘청했다. 신도시로 모든 수요가 집중되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미분양 사태가 속출했다. 그의 건설사업도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부도의 늪을 과감한 추진력으로 탈출했다. 전 재산을 털어 부도 원인을 신속하게 정리했다. 재기에 성공한 그는 현재 인영건설과 인영물류 등 3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문웅 전 교수는 “예술을 사랑해 그림을 수집한다”고 했다. 그는 학창시절 가슴에 품었던 문학소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굶는 과’라며 진학을 말렸던 국문과에 학사 편입해 체계적인 문학공부를 했다.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해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릴 적 꿈을 이뤘다. 서상배 선임기자

성공한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그는 여유만 생기면 미술품을 수집했다. 술·담배·골프를 해본 적이 없는 그의 유일한 낙은 마음에 드는 그림을 구입하는 것이다. 재기에 성공한 회사는 순풍에 돛단 듯 규모가 커졌다. 사업해서 번 돈으로 미술관을 짓기 위해 파주에 땅을 샀다. 그림을 사고 땅까지 마련했다는 소문이 나자 주변에서 미술관 운영과 건설회사 운영은 차원이 다르다며 예술경영학 공부를 권유했다.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대학원 예술경영학과에 진학했으며 내친김에 51살에 성균관대에서 예술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를 거쳐 호서대에서 11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해 8월 정년퇴임했다. 교수 시절 그는 단 하루도 결강하지 않는 열정으로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1980년대 초 일본 하코네 ‘조각의 숲 미술관’을 찾았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한낮 땡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장을 위해 많은 관광객이 줄을 길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문화가 사업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성공하면 조각의 숲 미술관 같은 문화사업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땅을 구입해 건물을 짓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콘텐츠인 미술작품이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미술작품 컬렉팅에 나선 이유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세금 내는 것을 회피한 적이 없다. 세금을 국가에 도움이 되는 돈이라고 생각해 기한에 맞춰 납부했다. 세금을 잘 낸다고 상까지 받았다. 손톱만큼도 부끄럼이 없이 당당하게 회사를 운영했다고 자부한다. 세금 이외에 개인 소득의 많은 부분을 그림을 사는 데 쏟는다.

그는 그림을 사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수천만원을 주고 산 그림이 가짜로 판명 날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단지 그림이 좋아 헐값에 산 작품이 기대 이상의 좋은 평가를 받을 때는 공중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똑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가격이 천차만별일 정도여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어려운 게 예술세계라고 말한다. 40여년 동안 수많은 작품을 구입하면서 터득한 안목과 미술품 감정학 등 이론을 배우고 나서는 질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내공이 쌓였다.

그는 글씨가 너무 좋아 사들인 고서가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 필사본 원본으로 확인됐다고 귀띔했다. 서예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쓴 글씨인 데다 1725년 이전 본인 노존본으로 감정받는 것은 물론 구운몽 권위자인 고려대 정규복 교수의 논문에 그의 이름을 붙여 ‘문웅본’으로 소개됐다. 그는 좋은 작품을 소장하게 되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웃는다고 말했다.

그의 미술 수집은 가족도 말리지 못한다. 1978년 결혼을 앞두고 아내에게 준 결혼선물도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오지호 화가의 60만원짜리 그림이었다. 당시 다이아몬드 반지가 60만원이었다. 10년 전쯤 종로 금은방에서 5부 다이아몬드 반지 가격이 300만원이었지만 그가 결혼선물로 구매한 그림의 가격은 5000만원을 호가했다. 그 그림은 그의 서재에 걸려 있다.

“결혼기념일과 생일 등 기념할 일이 생기면 그림을 한 점씩 사고 있어요. 멋스럽게 보이는 명품 가방과 장미꽃 100송이보다는 의미를 담은 소품이나 판화 한 점을 선물로 받고 기뻐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의 소장품은 인사동에 있는 인영아트센터에서 일 년에 대여섯 차례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 볼 수 있다. 그가 미술작품을 사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림이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작가들을 후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중섭과 박수근도 재료비가 없어 담배 은박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고, 미군 PX에서 5달러짜리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갈 때 뒤에서 작품을 산 컬렉터들이 있었다. 그도 열악한 미술계 현실을 감안할 경우 작품 한 점을 구매하는 것은 그 작가에게 큰 힘을 주고 더 좋은 작품을 창작하는 원천이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 미술작품을 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 미술품을 사면 단돈 얼마라도 작가에게 돌아가 종이를 사든 쌀을 사든 생활하는 데 도움을 줘 작품활동에 더 집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거창한 인도주의자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예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는 후원자 역할, 즉 메세나운동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그림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서재 책장에는 로댕이 그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을 조각한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을 사오니까 일부에서는 국부유출이라며 비난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일본 중원미술관에는 모네, 피카소,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 유독 많다고 설명했다. 1900년대 초 방직공장 사장이 화가를 유럽에 유학 보내면서 인상주의 화가 작품을 사서 일본으로 보내라고 부탁해 많은 작품을 소장하는 박물관이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세계에서 관람객이 찾는다는 말로 국부유출이라는 비난을 일축했다.

그는 16년째 인영미술상을 운영하고 있다. 중앙대 미술학부 한국화·서양화·조소 전공 학생들의 졸업작품을 대상으로 학부 교수들이 각 1점씩을 선정하면 그가 시상하고 있다. 더불어 졸업작품을 후한 가격에 매입해 작가의 창작활동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졸업하는 작가 가운데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경우가 10%도 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역사가 전해지는 것은 문화의 힘이 크다고 믿는다. 고구려 벽화와 일본 아스카 고분벽화가 후세에 전해지듯 그가 모은 그림이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공교롭게 그림을 좋아하는 자신이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나보고 그림을 컬렉팅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도 젊은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수집할 그림을 찾는 보람에 산다.

 

◆ 문웅 전 호서대 교수는…

 

△1952년 전남 장흥 출생 △성균관대 예술경영학 박사 △중앙대 예술대학원 교수, 호서대 문화기획학과 교수 역임 △인영건설, 인영기업, 인영물류 대표이사 △인영아트센터 설립 △‘재기하는 기업인’, ‘오직 한 사람’, ‘미술품 컬렉션’, 번역서 ‘이벤트 프로젝트 관리’ 등 출간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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